낡고 헐한
낡고 헐한
  • 양영희(하중초 교사)
  • 승인 2015.03.1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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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 서서

분주한 일상 그리고 한적함

금요일, 서둘러 퇴근하고 다시 간단하게 짐을 꾸려 전철을 탄다. 7호선 강남역 신세계 백화점과 연결통로를 이용해 새로 단장한 호남선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던 중 고급스런 외식풍경을 본다. 품격 있는 식사와 만남을 즐기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저들이 먹는 음식 값은 얼마나 할까 생각한다. 나는 매표소 옆의 나름 안심이 되는 저렴한 가격의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좁은 식당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혼자인 손님들을 성별로 묶어 자리를 정해주었다. 나는 칼국수를 먹고 있는 아가씨 앞으로 안내되었다. 종업원들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부터 하라고 했다.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를 손님들에게 노골적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막차시간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저녁을 먹고 신문이라도 보며 쉬고 싶었지만 읽을거릴 꺼냈다간 쫓겨날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의자에 앉아 먹을 수 있는 식당 중에 가격이 싼 편이었기에 나 같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은 4명씩 8명 정도가 서로 마주보며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맨 끝의 아가씨 앞에 안내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혼자 온 사람들로 각자 시킨 음식을 말없이 먹고 있었다. 테이블이 너무 작아 의자도 다닥다닥 붙어 있기에 멀리서 보면 모두 일행처럼 보였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 속에 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 앉은 아가씨의 식사를 방해한 것 같아 ‘칼국수 먹을 만해요?’라고 말을 건넸다. 아가씨는 미소 지으며 ‘네’라고 답했다. 아가씨와 나란히 앉은 덩치가 큰 외국인 아저씨는 만둣국을 먹고 있었다. 나는 ‘만둣국도 맛있어 보이네요.’ 했다. 아가씨와 외국인 남자가 함께 웃었다. 조금 후에 내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한 젓가락을 입에 가져간 순간 너무 통증이 심해 그만 음식을 뱉을 뻔 했다. 학기 초 피곤함으로 몸살기가 있는데 입안과 혀가 다 헐었던 것이다. 상처가 많은 입안으로 뜨거운 것이 들어가니 상처들이 놀라 반응을 했다. 갑자기 뜨거운 음식이 아픈 내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주자 왠지 모를 슬픔이 왈칵 올라왔다. 3월은 몸이 너덜거리는 것 같다. 다 닳아 헤진 내 신발의 밑창처럼 내 몸 어디에도 계속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숟가락 위에 칼국수를 조금씩 얹어놓고 후후 불며 속도가 나질 않는 식사를 했다. 얼마 후 내 옆쪽으로 한 칸 떨어져 아저씨 한분이 안내 되었다. 그는 우리 쪽 테이블에 있던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갔다. 나와 외국인 아저씨가 동시에 숟가락을 챙겨주려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따뜻함을 느꼈다. 상막한 저녁식사, 여행을 떠나거나 먼 여행에서 돌아온 노곤함과 분주함이 잠시 녹는 듯 했다. 자가용으로 학교와 집만 오고가다 이렇게 터미널에 나와 사람 사는 풍경 속에 들어가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어느새 내 앞의 아가씨는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 사라졌다. 그녀가 입술을 닦은 휴지는 빨간 립스틱 자국과 함께 좁은 탁자에 남겨져 있었다. 종업원은 그녀가 남긴 음식그릇과 쓰레기를 한곳에 마구 담아갔다. 아직 식사중인 우리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내 옆쪽의 한국 아저씨는 감기에 걸렸는지 몇 번 콜을 풀며 후다닥 식사를 마쳤고 그가 버린 휴지들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다른 손님이 앉았고 그들도 칼국수를 시켰다. 나만 빼고 ‘모두들 곁에 있는 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내 볼일에만 집중하는’ 이런 분위기의 식사가 익숙해 보였다.

외국인 아저씨는 국물까지 깨끗하게 식사를 마친 후 내게 맛있게 먹으라고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내가 만두 국 맛있냐고 물어보니까 아주 좋다고 말하며 웃는다.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식사를 끝냈다. 이 낯선 저녁풍경과 나의 피로는 묘하게 닮았다. 낡고 헐한 느낌말이다.

(201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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