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사회
어른 없는 사회
  • 양영희(전 교사)
  • 승인 2017.01.09 0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우치다 타츠루 / 민들레

<‘지금 이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은 몇 십 년만 지나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입술을 깨물며 반성할 일 들 뿐입니다. 하지 않으면 좋을 짓만 관과 민이 합심해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모습에 저는 언제나 놀라고 절망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실패를 알아채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을 걸 잃어야 할까요?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예로부터 이어져오던 생활의 지혜나 문화, 심성 깊이 뿌리내린 종교성과 감수성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의 대부분은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되살리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정책 결정에서 정책의 적절성보다 속도가 우선시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돈을 버는 것이 유일무이한 국가목표로 채택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결과가 국토가 더럽혀져도, 자연을 잃어도, 양극화가 심각해져도, 사회적 약자가 나락으로 떨어져도, 집회결사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지 누가 설명해 주면 좋겠습니다. ‘경제 성장이 멈추면 일본은 끝입니다.’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높은 성장률과 국민의 풍요로운 삶이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는지요?>

제목만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 같은 사람에 대한 얘긴가?’ 하며 속으로 ‘나는 얼마나 어른이라는 지점과 거리가 있는지 가늠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우치다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르게 자본이 망가뜨린 일본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며 분석한 이야기들로 책을 엮었다. 곳곳에서 그가 자신의 나라에 애정을 가진 크기만큼 절망하며 자본이 어떻게 가족과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그곳에 소비 사이클과 시스템을 대체했는지 쓰고 있다. 그 결과 사라진 전통적 관계와 권위대신 각자도생의 모래알, 원자화된 사회, 그 사회가 가진 탐욕이 지배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이제 누구도 경험이 많다고 지혜로운 인식을 가졌다고 존중받지 못한다. 다만 돈을 얼마나 가졌는지, 무엇을 소비할 능력을 가졌는지가 중요하다.

원자화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누구나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것이 명제처럼 작동한다. 승리를 위해 끝없이 ‘노오력’ 하라는 것이 청년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그리고 그 승패는 순전히 개인의 것이라고 믿게 한다. 그러나 격차사회는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사회여야 한다. 능력과 성과를 수치로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외 조건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는 전제 자체가 사실은 허구라고 우치다는 말한다.

그는 ‘글로벌 인재 육성이라 하면서 호환성 높은 규격화된 노동자를 대량생산 하는 일이 권장되는 것은 고용주에게 아주 좋은 일이 되고 있다. 언제라도 대체인력이 널려있으니까. 그들은 젊은 사람을 일회용 소모품처럼 대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세계의 청년들이 신음소릴 내며 자신들의 삶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학교에서의 교육활동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갖은 것이 당연시 되고 교사도 학생도 결과에 집중한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교육에 나라의 대들보를 육성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 추구에 전념하는 인간을 육성하는 일이 학교교육이 되었다.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학교가 존재한다는 근본적 합의가 잊혀진 채 사적 이익 증대를 위해 학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이는 학교 교육의 쇠퇴로 이어졌다.’ 고 말한다. 또 사적이익의 증대를 위해 ‘서로의 다리를 잡아당기는’ 현상이 만연한 곳이 교실의 모습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기존의 사제관계는 새로운 계약관계로 대체되었다. 가족의 해체 과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완전히 사라졌고 그런 맥락이 교실에서의 교사의 권위추락과 연동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공동체 사회에서 가졌던 아버지의 위치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일들을 결정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구성원에 대해 정보나 소통능력이 없었으면서도 그 역할을 수행했었다. 그건 아버지가 가족을 부양할 기본 능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집을 짓고 가족이 먹고 살며 필요한 것들은 아버지를 통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가족이 어떻게 살지에 대한 전권을 장악했었다. 구성원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그러나 지금 가족 내 권한은 많은 부분 어머니에게 넘어가 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자식들의 능력과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녀들은 가족 내 설자리가 없는 아버지의 모습과 정교한 어머니의 권력 하에서 자라며 어른이 될 자신들의 모습을 모델링화 한다. 그 과정에서 바람직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배울 수 가 없다는 것이 우치다의 의견이다. 우치다가 말하는 전통적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찬양은 일부 페미니즘의 저항을 불러올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가 살아온 세상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고를 펼치는 중이라고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우치다는 결핍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었다고 분석한다. 풍요로움은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그것이 가족과 이웃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는 모두 고립되어 외롭고 힘들게 살 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풍요도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데 이미 깨져버린 관계는 복원능력을 잃었다. 우치다는 그 해결점으로 세미퍼블릭을 제안한다.

<세미퍼블릭은 공과 사, 그 사이를 연결하는 준 공공성 같은 것이다. 홀쭉하게 야윈 공, 병적으로 비대해진 사, 그 사이를 연결하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사적인 감정이나 사상을 빨아들여 공적인 틀로 정리해 내는 시스템, 공적인 이념을 사생활로 가져와 일상으로 체화해 내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가 가진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본래 가족이란 유아나 노인, 병자를 돌보기 위한 것’이란 지적엔 공감한다. 지금 우리 주변에 버려지고 있는 약자와 노인들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공적자원(사회 공통자본)이 시장으로 넘어가 누군가의 사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은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을 되돌리고, 자연을 파괴시키는 행위를 막아내는 것 그리고 진정한 의사 소통력을 높이는 것이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이란 불화와 맞닥뜨렸을 때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매뉴얼을 촘촘하게 만듦으로써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적절하게 대응하기라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힘을 거세시킨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다. ‘의사소통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외 없이 규칙 깨기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시스템 밖으로, 가설로라도 입장을 옮겨 보지 않으면 시스템 문제나 흠이 보이지 않는다. 의사소통이 어려울 때 먼저 입을 다물고 자기의 입장을 일단 보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 발언의 우선권을 넘기는 것이 대화의 매너다. 대화에서 진리는 미결상태에 놓여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득이라는 수순을 밟을 수 가 없다. 소통의 불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상대에게 다가가기, 상대의 숨소리가 들리고, 체온이 느껴지는 지점까지 가까이 갈 것, 상대의 품에 달려들어 안기기’그게 무엇이든 상대의 지성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전할 수 만 있다면 조금씩 다시 숨을 쉬게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