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양영희(전 교사, 교육잡지 민들레 편집위원)
  • 승인 2017.02.06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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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6,25에 대한 구체적 증언들을 들으며 자랐다. 낮에는 군인들이 몰려와 마을의 모든 집안을 수색하며 빨치산을 찾으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인민군 후원자나 동조자를 가려냈고, 밤에는 산에서 빨치산이 내려와 식량과 먹을 것, 옷가지 등을 가져갔으며 심지어 그들의 사상과 노래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공포 속에서 배운 인민군 노래를 어머니는 지금도 기억을 하고 계신다.날마다 ‘밤낮으로 드나드는 서로 다른 주체와 색깔의 폭력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마을을 수탈하고 겁을 주며 때로는 과감한 즉결처형도 감행하는 절대 권력이었다. 그토록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마을의 젊은이들이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우리가 영화에서 봐 왔듯 군인과 인민군이 같은 형제인 경우도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낮에는 비행기의 폭격으로 토굴에 숨어야 했고 밤에는 빨치산 보급투쟁에 나선 형제들의 총칼 앞에서 떨어야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빨치산들의 행색이었다. 얼어서 동상에 걸린 발들은 양말도 신발도 없는 경우도 많았고 부상당한 사람들의 모습은 낮에 다녀간 군인들의 협박 즉 밤손님들에게 협력하지 말라고 겁을 준 일을 잠시 잊고 숨겨놓은 양식을 꺼내 밥을 해주게 되더라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시절 낮에는 국군에 협력하고 밤에는 인민군에 협력할 수 밖에 없는 나름의 지혜로 목숨을 지켰고 그것은 마을의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통해들은 전쟁은 배고픔과 공포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동상과 절차 없는 죽음들 그리고 적과 아군보다 깊은 인간에 대한 원초적 동정심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여자들은 심지어 총보다 키가 작아 전쟁기간동안 10센티나 훌쩍 자랐다던 10대 소녀들까지 참전시킨다. 당시 공산당 사상으로 무장한 그녀들의 당상수가 자발적으로 전쟁터로 향했으며 어머니까지도 그 선택에 동의한 경우도 많았다. 인간이 생명보다 우선해야 하는 절대가치가 있는 걸까? 백만 이상의 소녀들이 2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그만큼의 숫자가 빨치산으로 지하 공작원으로 저항 활동을 했다. 자동소총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고 탱크를 몰고 전투기를 조종하고 부상자를 간호하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했다. 저자는 전쟁을 경험한 200여명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녀들의 목소리로 전해준다.

남자가 써낸 전쟁은 숫자와 승패의 기록과 목적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다르다. 전쟁터에 나갈 때 가져갔던 물건들, 입었던 원피스, 어머니의 미소와 눈물부터 죽음을 보고 들으며 놀라고 변해가는 마음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픈 마음이 치유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남자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언어들로 증언한다. 남자들은 영웅담을 쏟아내지만 여자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그 추악함을 섬세하게 온 몸으로 기억하고 토해낸다. 저자는 여자는 생명을 낳는 존재라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엔 적합하지 않다고 쓴다.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었던 세 가지는 배로 기지 않고 두 다리로 서서 전차 타기, 흰 빵을 통째로 먹기,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침대보 위에서 실컷 자기”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줄줄이 걸린 붉은 살점의 고기를 볼 수가 없어. 붉은 색이라면 무엇도 볼 수 없어. 붉은 색이라면 치가 떨려”
“전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직 살아 있는 우리한테 물어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멋대로 역사를 바꾸지 말고 지금 물어봐”

스탈린 시절엔 책도 출간될 수 없었던, 그러니까 오랜 세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생각과 감정이 이 책에 기록된다. 어쩌면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문제도 아직 미제로 남은 여자들의 전쟁이야기가 될 것이다. 역사는 누구의 시선으로 기록되고 정리되어야 하는지, 왜 배제되면 안 되는 목소리가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저자는, ‘수십 개의 목소리들이 낯선 진실을 외치며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죽음과 살인은 어떻게 다른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경계는 어디인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정신 나간 생각과 의기투합할 수 있는지, 심지어 죽일 의무가 있다는 생각까지 하는지’라고 쓴다. 그리고 여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들의 지난한 삶의 증거를 모아낸다. 저자가 만난 러시아인, 소련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타지키스칸인... 그녀들의 꿈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살기를 원한다.

아이들의 놀이처럼 한시적으로 적을 만들고 사람들을 길들여 그 죽음의 놀이에 빠져들게 하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이 바로 전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 ‘자신도 몰래 빠져들어 몰두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혹시 그 시절 소녀들처럼 손들고 자청해 뛰어들고 있는 전쟁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줄도 모르고 밤낮으로 자본의 사슬에 묶여 경쟁하며 사는 일, 조금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날마다 채찍질하며 단 하루도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우리, 자연과 이웃이 모두 파괴되어도 보이지 않는 우리. 무엇보다 매일 죽을 것 같이 힘들다고 말하는 우리.....
이 껍데기는 몇 년이 흐르면 벗겨질까? 그때 ,우리가 어리석었다고 말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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