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 강찬호 기자
  • 승인 2017.03.05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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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 28주기 추모제 행사 열려...홍순창 작가, 가슴 속에 시인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아기자기하게 다양한 프로그램 선보인 따뜻한 무대.

기형도 시, 엄마걱정이 행사장에 전시되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뒤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 (...)’ - 바람의 집.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 (...)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그 집 앞.
‘(...)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 이 누추한 육체 속에서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운산고 2학년 학생들은 매년 '기형도 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추모제에서 운산고 학생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기형도 시인 28주기 추모행사 ‘어느 푸른 저녁’이 기형도기념사업회(회장 김세경, 이하 기념사업회)가 주관으로 3월4일 오후4시 광명문화예술센터에서 진행됐다.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시를 써가듯이 소박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행사였다.

광명지역에 연고를 둔 기형도 시인을 주제로 매년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운산고 학생들도 참석해 지난해 활동 결과물을 선 보였다. ‘기형도 프로젝트’는 2학년 프로젝트 수업으로 진행된다. 개학으로 막 3학년이 된 김보담, 신혜선, 정화영 학생은 기형도 시 <그 집앞>을 소재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이 시를 각색해 어떤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발을 다친 발레리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좌절과 고통에 놓인 이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애니메이션 영상과 시 <그 집앞>이 교차되면서 지나가는 영상을 통해 청중들은 시의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이어 운산고 유화진 학생은 동료 학생들 5명과 함께 작업한 샌드아트를 선 보였다. 선택한 기형도 시는 <대학시절>이었다. 유화진 학생은 “당시 시인이 시를 쓴 배경이 된 대학시절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 노력도 했지만, 그 보다는 현재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학교폭력을 소재로 시를 재해석해봤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기형도 추모제 행사에 참석해 관객으로 앉아 있었는데, 일 년 뒤 작품을 제작해 발표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척 떨린다.”며 청중들의 호응을 받았다. 운산고에서 진행되는 기형도 프로젝트는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와 결합해, 매년 재탄생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기지가 넘쳐 눈길을 끈다. 벌써 내년이 기약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형도 시노래 모임 '시락'의 공연.


운산고의 기지에 어른들도 분발했다. 기형도 시 노래 모임인 ‘시락’이 신곡(?)을 선 보였다. 시락은 기념사업회 소속 회원들이 만든 아마추어 노래모임이다. 시를 읽고 공부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노래도 얹게 된 것이다. 시락이 불러 온 노래는 ‘엄마 걱정’(최영주 곡) 단 한 곡뿐이었다. 이번에 <바람의 집>(노성은 곡)을 추가했다. “아직 연습이 충분치 않아 미흡해도 시를 읽는 듯 들어 달라”며, 시락은 첫 곡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독특한 분위기가 담긴 이 노래는 시락 회원들의 낮은 목소리로 청중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두 번째 <엄마걱정>은 대표 곡인 만큼, 여유 있고 자신 있게 불려졌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무대도 더해졌다. 기형도 시가 랩으로 불려진다면. 래퍼 김미래씨는 <정거장에서 충고>를 랩으로 불렀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본인을 소개한 후, “<정거장에서의 충고>에 멜로디를 넣고 랩 메이킹도 직접 만들어 봤다”며, 함께 즐겨달라고 주문했다.

이날 추모제에서는 기형도 시인과 함께 청춘의 시절을 보냈던 지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기형도 시인은 소하동에 거주하면서 인근 안양으로 출퇴근하면서 군 복무(방위)를 했다. 기형도 시인은 당시 안양지역에서 활동했던 문학청년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처음 서로를 알게 돼 우정을 나눈 홍순창 작가가 행사에 참석해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홍순창 작가는 81년 여름 안양에서 문학청년들과 시화전을 개최했는데, 그 때 기형도를 만났다며 그 때부터 우정을 나눴고, 함께 지내며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함께 시도 쓰고 합평도 하고 안양천변 목재소 야적장을 아지트 삼아 술도 마시며 놀았던 추억도 회상했다. “기형도는 노래도 잘 했다. 일반적으로 문인들이 고집, 개성도 강하고 기인적 행보를 보익도 하는데, 형도는 자기 개성과 색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술도 마니 마시지 않으면서도 모임에서 재밌게 어울리는 친구였다. 특히 친구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는 것이다. 친구로서 만으로도 족했다.” 기형도 추모 행사에는 처음 참석했다는 홍 작가는 “가슴 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 담고 있다는 것은 축복, 행복이다.”며, 참석한 사람들을 격려했다.

이날 행사는 모두 8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사회는 양철원 광명시청 학예사가 맡아 진행했다. 김진숙 회원이 ‘기형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영상기록을 선 보였다. 신상호 회원이 <빈집>을, 방춘락·김길자 회원이 <바람의 집>을, 이말복·손세라, 모녀 회원이 <도시의 눈-겨울판화2>를, 박승원 도의원이 <질투는 나의 힘>을 낭송했다. 초대시인으로 참석한 위상진 시인은 ‘입 속의 검은 잎’을 낭송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프로그램 끝 순서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함께 낭송했다. 이종락 기념사업회 초대회장도 경북 상주에서 올라와 행사에 참석했다. 기념사업회는 기형도 시인 추모제를 통해 기형도 시인에 대한 기억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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