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지표 문장을 들이대는 학부모
통지표 문장을 들이대는 학부모
  • 양영희(민들레 편집위원, 전 교사)
  • 승인 2017.03.2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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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샘의 교육비평]양영희(민들레 편집위원, 벗 이사, 전 교사)

나만 옳다는 학부모들의 신념이 간혹 교육현장을 힘들게 한다. 학교공동체의 민주주의 그리고 대화를 생각해본다.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저녁에 비가 온다더니 햇살이 사라지고 찬기가 가득해진다. 꼭 학교 가기 싫은 사람들 마음과 닮았다. 지금 이 순간, 일 년 을 어떻게 버틸지 막막한 무거움으로 잠 못들 교사들이 보이는 듯하다. 학교는 왜 걱정과 불안의 공동체가 되어버렸을까?

모든 코드가 내 아이에 맞춰진 학부모는 무섭고 위험하다. 입학 초부터 날마다 교실을 모니터링하고 사소한 일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직접 대응에 나서며 교사들을 제압해 온 부모들에 대한 얘기는 이제 익숙할 정도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용감함이 어느 정도인지 주변에 당당히 알리며 다른 이들과 연대를 시도하거나 주변 학부모들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들의 특징은 대부분 정확한 사실인지마저 하지 않은 채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교사들을 코너에 몰아넣은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교사가 상황과 과정을 설명하려 해도 대부분은 듣지 않는다. 대화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사실 하나를 크게 확장해 신념화하면 아무도 그걸 수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혁신학교가 확산되면서 마을공동체까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학교 주체간의 벽은 높고 험난해 보인다. 상호관계와 협력, 그리고 기본적인 신뢰마저 사라진 자리에 학부모와 교사가 줄다리기를 하고 어느 한쪽이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 현실처럼 보인다. 교사들은 아이들도 장악해야 하고 학부모한테도 지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비웃듯 학부모들은 ‘교사들을 손봐줬다’고 표현한다.
어떤 학부모들은 마치 교사를 길들이고 학교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엄청난 능력인 것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류의 부모는 한 학교에서 오래 아이를 교육시키지 못하기도 한다. 언젠가 일 년에 3번씩이나 전학을 시키다 다시 원래 학교로 돌아온 경우도 봤다. 그 부모는 늘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 아이는 관계와 학습, 기본적 정서생활이 다 무너져버렸다.

학교에서 교사와 교실을 쥐락펴락 하는 부모는 아이를 극단적으로 훈련시키는 경우도 있다. ‘교사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모두 기억했다 전하게 하고, 심지어 교사가 아이를 교육할 때(그들은 혼낸다고 표현한다. 언제부턴가 학부모들은 교사들이 아이를 혼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핸드폰에 녹음을 해 오도록 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잡아낸 담임교사의 문제점(?) 몇 가지를 들고 그들은 당당하게 교장실로 간다. 그는 교장실에서 자신의 발언에 효력을 더하려 주변의 인적 네트워크를 먼저 소개한다. ‘아는 친척이 방송국에 있다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혹은 청와대나 고위직에 누군가 있으니 알아서 하라고 ’ 그리고 교육청에 전화를 하거나 교장실에 처 들어가 멱살을 잡는 일도 흔한 일이다. 아쉽게도 그 정도의 협박에 교사들을 헌납하는 교장도 많다. 그들은 학부모가 보는 앞에서 담임을 교장실에 불러 사과하게 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재발방지 약속도 한다. 그때 학부모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시라. 그들은 그렇게 작아진, 그야말로 별 볼일 없어진 교사들에게 자신들의 아이를 교육하게 한다. 언제든 손볼 수 있는 그런 맘에 드는 교사들에게 말이다.

얼마 전 들은 어느 학교의 사례에서 학부모가 담임의 문제라고 가져온 지적사항은 이렇다.
‘수업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질질 끄는 실내화를 신고 다니며, 다리를 꼬고 앉는다.’
위와 같은 정보를 학부모는 아이를 시켜 얻어냈다고 한다.
수업시간, 아니 근무시간 내내 나는 머그컵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계속 말을 하는 직업이라 목이 갈라지고 말이 잘 안 나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뜨거운 물이나 차를 곁에 두는 경우가 많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차를 마시든 커피를 마시든 그게 문제가 되는 걸까? 외국의 수업장면을 보면 잔디밭에 누워서 수업하는 경우도 있던데,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누구를 불러놓고 위 사항이 학부모에게 사과하고 머리를 숙여 잘못했다고 할 만한 일인지 묻고 싶다.

학부모는 교사를 향해 폭언과 폭행에 가까운 행동을 하면서도 교사에겐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감정도 없이 늘 예의를 지키길 요구받는다. 엘리베이터 걸이나 전화상담원보다 더한 감정노동에 시달린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신들은 막말을 한 시간 이상 하면서도 교사들은 한마디에도 감정이 실리면 안 된다는 억지에,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최근에 들은 학교 소식으로 가장 기가 막힌 이야기는, 종업식 날 아이가 받아온 통지표의 문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걸 그대로 들고 교장실로 찾아간 학부모 이야기다. 그 학부모는 담임도 만나지 않고 곧바로 교장실로 향했다고 한다. 학부모는 통지표 내용 중 부정적인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 방송국에 제보하겠다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교장은 교감을 통해 담임에게 수정을 지시했고 담임은 통지표 내용을 1차 수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정한 내용도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이의 통지표 내용을 학부모가 직접 써 와서 그대로 바꿔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담임들은 잘 써줬는데 이번 담임만 아이를 나쁘게 평가했다고 불평을 했다는 것이다. 그 학부모는 교장실에 쫓아가서 2차 요구까지 모든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고 한다. 교감이나 부장은 교장과 학부모 사이에서 담임에게 내용을 전하거나 교장실로 가라는 심부름을 했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통지표의 내용은 생활기록부라는 학생의 중요한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수 십 년 동안 보존되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의 하나다. 학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서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학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문장으로 담임이 받아 적게 만들었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아무리 학부모의 협박이 있었다 해도 교장이 학부모의 말만 듣고 학교 안의 상황이 밖으로 퍼져 나갈까봐 담임교사에게 그 요구를 수용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때 교장은 교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에 대한 평가권은 교사가 가진 최후의 권한이다. 일 년 동안 아이를 가르치고 생활하며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써 주는 것은 교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니 문구수정과 같은 일은 상식적인 곳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교사가 정상적인 교육을 하게 하려면 있어서는 안 되는 요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당한 요구를 교장이 수용하라했다니 그 교장의 교육관이 의심된다. 또 교장실에서 불려간 담임교사가 느꼈을 공포가 전해진다. ‘협박과 강요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교사의 모멸감은 얼마나 컸을까? 앞으로 어떻게 아이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교육을 할 수 있게 될까?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해 보였을까? 그가 교단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전해 듣는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도 못하고 무릎 꿇은 후배교사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느 곳이든 기본 경계가 무너지면 그곳은 우수수 다음 수순을 밟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국정농단을 통해 본 이 나라처럼 말이다. 학교는 갈수록 갈등사레가 폭주하고 학교 폭력 등의 신고와 처리로 머리가 아프다. 그 때마다 목소리 큰 학부모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요구사항을 늘어놓는다. ‘상대방 아이를 다른 반으로 보내라. 담임을 교체해라, 전학을 시켜라, 담임이 사과해라,,,,,,.’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모든 아이들과 교사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가 선택한 방법은 항상 가장 쉬운 길이다. 바로 약자만 주저앉히는 거다. 그게 학생이 되기도 하고 담임교사가 되기도 한다. 요즘은 교사에게 침묵과 모욕을 강요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하면 그 다음의 요구는 위의 사례처럼 끝도 없이 커져간다. 실제로 학교에서 풀지 못한 교권침해 사례는 정신과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교육공간에서 풀어져야 할 문제가 개별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방치되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공동으로 대응하고 대화하며 교육이 중심이 되어 해결하는 사례는 줄어들고 있다. 학교의 고민은 교사들의 교권이나 전체 아이들의 정상적 배움이 아니라 목소리큰 민원인일 뿐이다.

학부모와 민원에 관련해 교사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건 교사가 마음 놓고 전 과정을 말할 곳도 없다. 교육공간에서 일어난 문제가 교사 개인 문제가 아닌데도 학교는 민원이 제기되면 교사의 능력과 연계하거나 학생을 잘못만난 ‘복불복교실’을 탓하는 풍조로 귀결된다. 그냥 그 반을 맡은 게 재수 없는 일인 것이다. 과연 그런 해석과 그런 해석으로 내려진 행동패턴이 맞는 걸까? 그런 행동패턴은 나만 안 걸리면 되는 것이고, 걸린 사람은 일 년을 눈물 흘리며 사는 것이다. 동료들은 그저 재수 없는 사람의 아픔을 바라볼 뿐이다. 가슴 한켠으론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이다.

교사들은 모두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다. 자신의 학급이야기가 공적으로 회자되는 일이 무능함으로 인식되는 분위기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교사들이 마음을 열고 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교나 교육청 시스템에 있다. 교권을 지키고 그것이 공교육을 지키는 길로 이어지도록 하는 장치가 없다. 교육청이나 관리자는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덮으라하고 빨리 해결하라고만 한다. 그러니 싫어도, 옳지 않아도 민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관리직이나 동료교사들이 동료애를 가지고 돕는 분위기도 없다. 심지어 주변에서 대충 해결하는 게 편하다는 식의 충고가 더 많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하는 교사를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는 풍조가 더 강한 것도 있다. 버텨봤자 너만 손해라고, 너만 힘들다고 속삭이는 선배들이 더 많다.

자기학교의 교사도 지키지 못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공정한 시선도 갖지 못하는 교장은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외국의 학교는 교장이 학부모와 아이들 상담을 다 도맡아 하는 경우를 본 적 있다. 우리의 교장실은 너무나 역할이 비어있다. 교사들과의 관계 형성도 안 되어있고, 섬처럼 교장홀로 지내며 하루 종일 티브이를 보는 사람도 봤다. 그가 왜 그곳에 출근하고 있는지 의심스런 관리자를 많이 봤다. 교장뿐만 아니라 교감이나 부장급 교사들도 후배 교사하나 보호하지 못하는, 부당한 힘 앞에서 침묵하는 학교는 얼마나 상막한가? 그곳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교사들 마음은 또 얼마나 처참한가?
폭탄처럼 문제학부모의 아이만 피하려는 오늘날 교사들의 가련한 상황은 학년 초를 맞는 교사들의 현주소다. 경력이 많은 사람도, 신규교사도 그리고 아이와 학부모도 똑같이 잠 못 드는 새 학기의 풍경은 우리 교육이 고르게 불안하고 고르게 걱정스러움을 보여주는 민낯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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