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저항하는 정치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
폭력에 저항하는 정치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
  • 양영희(교육잡지 벗 이사, 민들레 편집위원)
  • 승인 2017.05.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렌트의 정치>/권정우,하승우/한티재

광화문 찬 바닥에서 보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산처럼 쌓인 문제들은 많지만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나라의 모습으로 차근차근 갈 수 있다고 안도하는 시기에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게 되었다. 수개월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비장한 마음이 들었을까 싶다.

21살, 태어나 처음으로 투표를 하게 된 아들도 일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개 사전투표를 했고, 후보를 고르기 위해 핸드폰으로 후보자 토론을 보며 정치에 관심보이며 실천하는 걸 봤다. 큰 걸 바라지 않는 시민들이 그동안의 무관심을 반성하며 ‘내버려두어선 절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한 결과일까? 투표율도 높았다.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한나 아렌트가 얘기한 ‘정치’란걸 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문을 쓴 김상봉은 ‘한국은 폭력에 중독된 사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 주체적의지도 능력도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폭력을 미화하고 폭력을 숭배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학대하는 군대체험을 티비에서 오락거리로 만드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거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많은 전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양민이 희생됐으며 전 국토가 학살터였고, 시민을 지켜야할 군대가 시민을 학살한 나라 즉 한반도 자체가 수용소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를 지닌 곳에서 평화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걸 함석헌이 개탄했다고 소개한다. 나는 아렌트가 경험한 수용소의 모습이 조금 변형된 채 우리 역사를 관통해 온 데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식민지를 거쳐 독재의 시대엔 인간의 목소리는 발현될 곳이 없었고 일부 용감한 자들은 잘려나가고 위태로웠기에 왜곡된 문화는 각각의 생존에만 충실하기도 힘겨웠던 역사 아니었는가?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전체주의는 강제수용소를 고안해낸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을 빼앗고 실험동물로 인간을 전락시킨다. 전체주의는 운동으로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미워하는 대상을 향해 나가고 도전하도록 했으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했고 과거의 질서를 파괴하도록 했다. 정치인들, 귀족들, 부르주아지아, 유대인이 대상이 되었다.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가진 가장 인간다운 조건인 다원성, 개성, 자발성을 제거한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을 말하며 타인과 다른 존재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수용소에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선 소멸, 절멸 상태에 처한다. 그의 죽음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자살마저 선택할 수 없다. 지배의 결과는 완전한 파괴였다. 파괴된 인간은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이 되고 어떤 자극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전체주의는 근대가 낳은 최악의 이데올로기이자 장치이다. 개인의 신념과 확신, 의견은 위험스러운 것이며 사람들 간의 우정이나 신뢰라는 것 역시 자발성을 깨울 수 있다면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수용소에서는 완전히 벌거벗은 평등, 완전한 고립 속에 실험체로 존재하며 인간적이라 믿어왔던 감정들과 연민, 동정, 증오, 분노 이성조차 생존 앞에 누추해진다. ‘익사 한자’, ‘죽어가는 놈’이라 불린 수용소에 갇힌 자들은 명령에 따르며 굴복하고 누군가 먹다 남긴 빈 죽 그릇을 핥다가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갔으며 끝은 가스실이었다. 죽음을 이해하기에 너무 지쳐버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상태, 단두대에 올라가기 전 이미 파괴돤 그들은 완벽한 노예가 되었다.] 

‘완전히 홀로인 존재, 삶의 아무런 의욕도 빛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며 죽어가는 생존에만 허덕이는 모습’ 아렌트가 그린 극단적인 전체주의 모습인 수용소를 그린 장면에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본다고 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재등장 가능성을 아래와 같이 경고한다 

[대중이 수용소에 갇히기 전에 이미 고립되어 있었고 공적인 것, 공통의 세계를 잃어버렸다. 각자 자신의 생계를 위해 매진하는 존재들이며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가족 안에서의 따뜻함과 친밀함뿐이며 가족 밖에서는 통계상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가족의 생계를 지키는 것과 부유하게 사는 것이다. 대중사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전체주의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저자는 ‘전체주의는 인간이 다르게 태어났고 다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타자라는 형상을 우리의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그 결과 청소하는 분, 관리소 직원, 카페의 점원 등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타자들을 투명인간으로 지나치게 만든다.’고 썼다. 전체주의는 사람들의 시선과 방향을 한곳으로 고정시킨 채 달려가게 한다. 그런 삶은 인간으로서의 갖가지 것들을 버려야 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파워를 갖는다.   

우리는 정치를 가능케 할 ‘공론장이 없었고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가 공동의 것이라는 점, 공유물이라는 점’도 인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권력이 누구의 소유가 되는 순간 민주적 공동체는 흔들리고 마는 걸 불행히도 우리는 직접 보았다. 

아렌트는 자유롭기 위해 평등해야 하고 평등한 존재로서 자각하기 위해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기에 인위적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평등은 노력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인위적 세계의 특성이며 정치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세계에 평등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각인 시킨다고 보았다.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활성화되지 못한 건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세계 자체가 의도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에게도 평등을 요구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정치가 지속되려면 자유로운 시민도 필요하지만 그 시민들이 만드는 세계의 지속이 중요하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생활하는 세계의 지속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세계를 통해 실현된다. 함께 살기 위해 서로의 거리를 조절하고 관계를 맺고 끊는 방식에 대한 소통과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보장하는 것이 권력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인들의 공약은 헛된 약속이고 정치적 술수가 전략으로 사용됐다. 이런 과정은 약속과 계약의 중요성을 왜곡시키고 세계의 지속이 아니라 현재 장악한 권력의 지속만을 최우선 과제로 만든다. 정치행위를 통해 다양한 시민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소수의 전문가들과 직업정치인들만이 공적인 행복을 독점한다. 그들의 영향력은 커지고 이를 정당화하는 영웅 신화는 비정상적인 정치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방식은 말과 행동이다. 타자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려는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세계는 균열이 생긴다. 그래서 폭력과 권력은 다른 속성을 가진다. 한국정치는 권력을 빌미로 폭력을 행사해 왔기에 우리는 권력을 폭력으로 폭력을 권력으로 혼동한다. 시민은 관찰만하는 관객민주주의로 전락하는 과정이었다. 

아렌트는 정치란 공적인 의견을 나누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원성이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사유하는 것, 그런 사유를 돕도록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기는 것, 그런 생각을 드러내는 활동, 생각대로 행하는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만들고 지속시킬 수 있다.]  

아렌트는 ‘혁명은 새로운 정치행위자가 계속 등장할 수 있는 정치의 기본 틀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촛불혁명은 그 기본 틀을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위대한 실천이자 절박한 목소리였다. 나도 이제 이곳에서 희망을 만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