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여행
팔순여행
  • 양영희(민들레 편집위원, 전 교사)
  • 승인 2017.05.16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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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편지

▲ 팔순 부모와 떠난 여행지 순천만의 야경은 아름답다. 

“어쩌다보니 이 나이가 돼버렸네.”
부모님 팔순이라고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버님이 한 말씀이다. 자식의 욕심으로 부모를 어느 한자리에 세워둔 채 살아서 일까? 똑같이 한 살씩 먹는건데 유독 부모님은 곱으로 나이를 먹는 것 같다.

자식들도 당사자인 부모님도 인정하기 힘든 팔십이란 나이를 깃발처럼 들고 여행길에 올랐다. 두 분이 동갑이라 팔순여행의 주인공은 나란히 동생이 운전하는 차의 뒷자리에 앉으셨다. 이미 늦은 여행은 걷기도 힘든 몸으로 겨우 버티는 수준이어서 일정에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고향인 전라도 땅을 두루 돌아보고 싶다고, 순천만도 가고 싶고 여수도 가보고 싶고 절에도 가고 싶다고......그동안 마음으로만 가고 싶었던 곳을 줄줄이 말씀하신다. 동생과 난 그걸 다 모아 2박 3일 일정을 짰다.

첫날은 출근길 정체를 피하려 5시부터 일어나서 준비해 남원으로 향했다. 날이 흐리고 간간이 비도 내렸다. 며칠 전부터 들떠 있던 엄마는 날씨를 탓했다.
“썩을 놈의 비가 다른 날 다 놔두고 하필 오늘 오고 그려”
그래도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두 분이 대화를 나누며 ‘여기가 이렇게 변했네, 아이고~’를 연발했다.

돌아가신 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에 도착했다. 남원에 사시는 큰 외삼촌 부부도 산소로 오셨다. 절을 올리고 막걸리를 부어 드렸다. 내겐 늘 맛난 걸 주셨던 다정한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쌀밥 먹는 게 소원 일만큼 가난했던 시절 외갓집은 곳간에 먹을 게 많았었다.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외할머닌 떡이니 엿이니 강정을 들고 나오셨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외삼촌들이 소죽을 끓이며 구워주었던 고구마와 우리 집엔 없는 축음기로 음악을 들려주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어떤 공간 혹은 어떤 공간에서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억을 송두리째 떠올리게 해 주기도 한다.

외삼촌이 사준 추어탕을 먹고 외숙모가 만들어온 쑥절편을 받았는데도 엄마는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한다. 멀리 사니 만나는 게 쉽지 않은 동생인 것이다. 정 많은 삼촌의 옆모습에서 엄마 향이 느껴진다. 어렵게 헤어진 후 외삼촌은 여행 내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매일의 안부를 묻고 볼거리를 안내하는 그 마음이 내게도 전해졌다.

‘보절면 황벌리 51번지’
동생과 나는 아직도 수 십 년 전 떠나온 고향집의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부모님이 원하는 코스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잠시 고향집에 가보기로 했다. 어린 시절 한 시간 이상 걸어서 학교에 갔던, 멀게만 느껴졌던 그곳은 순식간에 도착했고 마을은 아주 많이 변해있었다. 별똥별과 붉은 노을, 쏟아질 듯 총총한 별들, 친구들, 소와 달구지, 삼나무 벗기는 어른들, 연기 나는 굴뚝, 골목의 소리들......우린 어린 시절의 조각과 남아있는 조각을 퍼즐처럼 맞추며 옛 고향을 완성해냈다. 동생과 부모님이 함께 그 시절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즐거웠다. 그런 날이 오기 어렵겠지만 육남매가 함께 와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눈다면 참 좋겠단 생각을 했다. 동생과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가 보았다. 쉬는 시간마다 탔던 그네, 운동회 날 달리기했던 운동장......우리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며 순천으로 향했다.

퇴직 후 불교에 빠지신 아버지는 절에 가는 걸 가장 행복해하신다. 순천에서 처음으로 간 곳이 송광사였다. 송광사로 가는 길은 연초록 신록이 정말 예뻤다. 다리가 불편한 두 분은 내색하지 않고 걸으셨다. 내색하려 하지 않는 그 모습도 내갠 안타까웠다. 차가 있어도 주차장부터 절 입구까지 걸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여행이 나이 든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은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깐이면 통과할 거리를 우리는 오래 기다리고 부축하며 도착해야 했다.

▲ 숙소에서 바라 본 여수의 바다 풍경

순천 와온 마을에 잡은 숙소 가는 길에 저녁을 먹었다. 와온 해변으로 들어가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산등성이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숙소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은 순천만 갈대숲과 여수의 해산물특화시장엘 갔다. 건어물을 사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한 코스였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는 바다에서 난 것들을 좋아하신다. 장을 보고, 회를 먹으러 갔다. 부모님은 비싼 음식을 사 드리면 표정이 좋지 않다. 그래도 우린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드시냐며 마구 진행했다. 오후 시간을 한가롭게 보내고 저녁노을을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은 구름 속으로 해가 들어가 버렸다. 욕심대로 되지 않는 일은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날 아침엔 순천 웃장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었다. 이 메뉴는 아버님이 가장 만족해하셨다. 수육까지 덤으로 주는 국밥에 반찬도 맘에 드신다고 좋아하셨다. 올라가는 길에 고창 선운사, 익산의 미륵사지를 들렀다. 아버지는 몸이 많이 힘드셨을텐데도 그곳이 절이니 내색하지 않고 다니신다.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도 많이 하신다. 동생은 사진을 담당했다. 나는 무리하다 병나실까 걱정이 됐다.

금요일이라 올라오는 길은 많이 막혔다. 3일 내내 부모님 몸과 마음 챙기는 것도 쉽지 않았고, 긴 시간 꼭 붙어 다니며 생활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부모님도 어떤 면에선 견디느라 고생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자식 눈치 보느라 마음의 소리를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효도란 뭘까? 난 그런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집에 오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보다 더는 여행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부모님의 건강상태가 마음 아팠다. 여행 내내 이번이 마지막일거라는 엄마의 말이 걸렸다. 무언가가 사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나의 노년도 별다르지 않을텐데. 인생이란 그리 정리되는 건데 하니 서글퍼졌다.

어릴 때부터 힘이 넘치고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기억력도 약해지고 지팡이에 의존하며, 걸어도 앞으로 진행이 되질 않는 느리기만 한 엄마랑 동행한 여행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자신을 챙기지 못했던 부모 세대에게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너무 작고 초라하다.

동생들에게도 한번쯤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해야겠다. 그래야 더 늦기 전에 ‘두 분이 기분 좋을 때 얼마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자연을 보고 어떤 감탄사를 연발하는지, 어릴 때는 어땠는지, 우리를 키울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에 가면 합장을 하며 몇 번 절을 하는지 ......’ 등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야 이별에도 힘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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