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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자기에 무얼 싼거요
마음여행
2018년 02월 20일 (화) 08:44:10 이경달 ccc8620@hanmail.net

그 보자기에 무얼 싼거요


날개를 가진 아이들이 있다. 그 날개를 꺾지 말라고 한다. 둘레의 그들. 과년한 아들과 딸이다. 결혼뿐만이 아니라 결혼한 그들도 고전적인 여성상으로서 아내와 육아를 멀리하고 산다. 이곳의,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다. 혹 그게 문제라고 여기는 그게 문제라는 분도 있다. 이 둘레로 쏟아내는 말이 많다. 비슷한 소리이다. 소리는 조금 더 강력하다. 강력히 반응한다. 생물학적인 여성과 달리 우리들이 여성이라고 부른 여성성이 무엇인지. 백인백색이다. 곧 내용이 복잡하고 중층적이며, 개인의 경험이 사물을 달리 보이게 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지 범위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적당히 불거나 바람이 불지 않는 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름답다. 나무의 습기라는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흰 연기다. 불완전 연소가 아니면 흰 연기 다음은 무채색이다. 아지랑이처럼 배경이 일렁인다. 난로가 타는 동안에 창문은 열려있다. 해가 능선에 있고 그러다가 가끔 들리는 작은 종소리와 뜬금없이 나타나는 기억과 또 그 기억에 덧붙여진 감정이다. 산에 혼자 살면 미친다는 말을 실감케 한 날의 날이다. 눈을 치운다. 눈을 치우고 눈을 치운다. 쇠 삽과 빗자루로 치운 날도 있었다. 저 아래 길은 오르막이다. 그곳을 드물게 지나는 차들이 미끄러진다. 그곳까지 눈을 치운다. 새벽을 나서는 차들이 눈을 꼭꼭 눌러 놓는 그곳까지 치우는 것이다.

날개는 비상이다. 아이가 날개를 가진 것을 어찌 알까. 그저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 몇 가지, 그러니 고층 건물 꼭대기 서쪽으로 보이는 노을만 풍광의 모든 것이라고 한다. 해가 지면 사라질 풍광이고 해가 있는 동안이라도 달라 보이는 풍광을 받아들이지 못해, 움직임 없는 스틸사진을 위해 날개를 꺾는다. 이런 그들은 비슷한 높낮이의 음정을 가지고 있다. 소리로서 그들은 분노하고 성취로서 스틸사진이다. 형식적 문법의 완성이다. 날개를 꺾는 장치의 완성이다. 날개는 이탈이다.

변신. 사람은 변화한다. 그 때의 그 모습이 동일한 것은 공시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공간이다. 시간이 없으니 개인도 없다. 같은 인간.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 같은 모습이다. 유머나 장난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름답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뇌신피질이 없는 그들에게도 발견된다. 까치의 악다구니 장난 그리고 공격성은 잘 알려져 있다. 까치는 장례식도 행한다. 인간은 변신한다. 순간 달라진다. 부정적으로 바뀌는 부분만이 논의 되지만 변신은 흔하다. 인간은 순간 변신한다.

그곳은 넓고 화려했다. 거울과 문. 벽 둘레로 거울이 있고 문이 있다. 저 문은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 곳이다. 그 공간에 내가 있었다. 적당히 소란스럽고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어둡다. 거리를 두고 앉았다. 벽으로 가는 사람이 있었다. 거울을 보고,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또 보지 않고 들어간다.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들도 나와서 거울을 보는 자도 있고 또 그러지 않는 자도 있다. 들어 갈 때와 달리, 나오면 주먹질에 욕설 그리고 소리치는 예언자로 변신한다. 거울을 보는 자는 보다 드세다. 울고 호탕하고 무드를 타고 용감하다. 곧, 창문을 통해 뛰쳐나간다. 넓고 화려한 이곳의 마루는 견고하다. 견고한 곳으로 어떤 사연으로 들어온 그들이 문을 다녀오면 창문으로 뛰쳐나간다. 외부에서 볼 때 그저 그랬는데. 그저 그런 이상한 집이다.

이상하지 않는 집. 정상과 비정상. 물화. 시대는 문화에 따른 윤리가 있다. 그리고 방식도 있다. 조선시대 개가를 한 사대부는 용서받지 못했고, 제사를 소홀히 한 사대부는 있을 수 없었다. 바뀐 문화라는 것은 개인에게 무엇이 될까. 물화로서 존재하던 것은 규제이고 강력한 결속이기도 했다. 천년전의 기독교와 지금의 개신교를 연관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삼년상을 행하는 그 곳에서, 격렬한 감정은 변신의 행위였다. 임의적이었다. 죽은 자가 그리워 숨이 끊어지듯 한 애달픈 후손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감정은 칭송받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배척받거나 칭송받는 그 행위가 같은 출발이었다. ‘지적이고 예’를 말하는 그들에게 이런 감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였고 힐난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칭송했다. 장례식에서 지나치게 우는 그들을 보고 꾸짖는 분들도 있고, 등을 토닥이는 분들도 있다.

자갈이 있고 모래가 있는 강변이나 해변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면 거저 감탄한다. 주고받는 말과 무엇을 만드는 모습이나 물음을 툭 던지는 그들이다. 죽고 싶다는 섬뜩한 아이들. 모래사장을 지치도록 뛰어 다니고 또 지치도록 뛰어 다니는 아이들. 세월이 지나면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바닷가에서 우는 아이들이 있다. 바다가 서러워 운다. 바닷가 백사장은 아이들에게 문이었다. 바다를 본 아이들은 영원이 그들에게 손짓을 한다고 격하다. 그러나 혼자 다녀온 문이다. 바다는 여럿이 보고 혼자 슬프다. 삶도 혼자 외롭게 살아야한다고 운다.

갈등. 감정의 얽힘. 쇠사슬의 매듭. 얽힌 실타래. 단칼에 쇠사슬을 끊는 그런 탁월한 현실은 없다. 사슬은 칼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탄소강과 연철를 수백겹하여 만든 다마스커스의 칼. 단번에 쇠사슬을 자르지 못한다. 단칼에 자른다는 것은 그저 희망이다. 수백톤의 칼은 들지 못한다. 단조하는 분들이 쇠를 자를 때 뜨거운 상태에서 쇠칼을 놓고 햄머로 여러번 때려서 끊는다. 인간은 감정을 칼로 베듯 하지 못한다. 티포탯. 갈등을 해결 전략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평판의 전략이다. 그러니 평판과 인내가 전략인 시대로 바뀌었다. 수학적인 모델을 수없이 시물레이션 한 결과다. 직관에 반한다. 갈등이 촉발되어 가정이 뒤얽힌 것을 우리는 만난다. 감정 촉발. 그는 변신하여 돌아온 것이다. 아이가 어른이 아니듯이 어른도 아이는 아니다. 시간을 두고 사람은 변한다. 짧은 시간의 그들은 변신한다. 문을 열고 들어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인내하는 그들은 문을 열지 않는 것이고 열더라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고 들어가더라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이다. 거울로 자기모습을 수없이 확인하는 과정이 인내하는 그를 만들고 그를 견뎌내게 한다. 감정을 자른 칼은 지적인 태도 이성적인 사고로 알려져 있다. 이성의 유럽은 대전으로 인간과 세계를 불태웠다. 쇠사슬은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면하고 더럽고 추악하게 여긴 감정의 순간에 쇠사슬이 된다. 창으로 뛰어 내리는 인간들. 그들이 발을 딛는 곳은 어딜까.

날개가 있는 그들은 천사다. 땅에 발을 딛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그런 흔적을 본다. 하늘을 나는 아이들에게 땅이 있음을 끊임없이 일깨우지만, 그의 날개를 꺾지 않는다. 참새는 덤불에서 먹이를 구한다. 덤불이 세계다. 모래사장과 바다를 문으로 그들이 느낀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은 나를 모더니즘 분파로 만든다. 띄엄 띄엄 끊어진 상들의 연결에 피어난 임의적 언어를 모더니즘은 사용한다. 이 언어는 감정을 잘라서 감정이 된다. 감정은 문이다.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머니의 추억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왜 그곳에 다녀오면 그들은 창으로 몸을 던지고 울고 그리고 무드에 젖은 인간이 되는가. 아이들의 날개는 그곳을 보다 쉽게 드나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금지된 곳이고 낯선 곳을 드나드는 능력이다. 오래된 영화, 금지된 장난. 어떤 아이들은 등에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창으로 비치는 햇살은 바닥을 가로질러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이곳에 아이들이 뛰어 다니지 않는다. 거친 들에도 학교 운동장에도 아이들이 사라졌다. 따스한 양지에 옹기종기 앉아서 추위를 피하던 아이들이 없다. 학교 운동장의 인조 잔디와 무덤은 멀어져 있다. 무덤에서 꽃은 피지 않는다.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이 이곳과 저곳에 없으면 어디에 있는가. 거울을 보고, 문을 밀고 들어간 아이는 그곳에서 떠돌아다니는가. 다시 문을 찾을 생각도 없이 빛들과 함께 황홀의 밤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이 없는 햇살 비치는 방이다. 아이들이 문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을 열고 나온 그들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들은 손에 보자기를 들고 있다. 우리는 보자기에 무엇을 싸고 보자기에 무엇을 넣고 다닌다. 그들은 무엇을 들고 황천으로 갔을까. 학교를 가는 그들의 보자기에는 책과 도시락과 더불어 무엇이 있었다. 날라 다니던 풀씨와 손을 닦은 때와 바람과 추위가 있었다. 증명하기 위해 펼치는 수많은 자료가 보자기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들이 들고 있는 보자기는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 빛깔과 모양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끈적거릴 감정을 담아 오지 않았는지. 보자기에는 또 추운 바람의 기억과 겨울감자와 무를 베어 먹고 남긴 꼬랑지와 껍질이 지린 땀 냄새가 있는 것이 아닌지.

콤플렉스. 열등감. 저주. 바닥은 구멍이 났고 헐어서 비어있는데 그곳에 종이나 비닐을 덮거나 짚단으로 얹혀 놓아도,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노출되거나 허수루이 덮인 그곳을 뛰어가거나 유심히 보지 않으면 발이 빠진다. 심하면 몸이 빠진다. 마루가 높은 절벽에 걸려 있으면 그건 심각하다. 되돌아 올 확률이 거의 없다. 마루는 목수를 동원하면 고칠 수 있다. 구멍이 빙하에 보이는 크레바스라면, 북극을 지나면서 본 얼음과 얼음의 틈이라면 목수는 거저 목수다. 잘 준비된 분들은 밧줄을 걸고 또 카메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잠깐 탐험한다. 고소 공포증이 있다. DNA이상이라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이런 구멍을 콤플렉스라고 한다. 콤플렉스는 ‘체’와 같은 말이다. 심한 구멍은 열등감이 콤플렉스가 된 경우이다. 그건 큰 구멍이다. 구멍에서 밀려오는 저주는 인간을 신들리게 하고, 인간을 오직 한 점만 보게 한다. 공포와 쾌락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주다. 저주는 바라는 자가 당하는 것이다. 이런 구멍을 통한 변신은 어른을 아이로 만들거나 평생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 감정이 나를 잡아먹는 현상이다. 지적이거나 이성적인 그들이 감정이라고 비웃는다. 그들이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감정은 바다를 보는 시선보다 큰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잠깐만에 인간을 변신시킬 수 있는 위력이다. 지상에 이것 외에는 인간을 순식간에 바꾸는 것은 없다. 술과 마약 역시 인간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파라다이스가 있다. 술과 마약. 어느 곳에서 이것이 성행하고 있는가.

마음 저편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끈은 감정이다. 감정은 사다리다. 큰 감정과 작은 감정, 그 다리를 건너서 다가온 공포와 쾌락이 인간을 물들게 하는 것이다. 공포와 쾌락은 새의 날개다. 재능은 그쪽 세계에서 공포를 포장지로 삼아 날아 온 것이다. 그래서 날개를 가진다.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날개를 떼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눈을 크게 뜨면 세상은 다양한 빛깔과 다양한 형상을, 다양한 감정의 관계로 얽혀 있다. 파시스트의 제복은, 그들의 일상복은 단일했다. 지금 과외수업이 다양성에 뿌리를 둔 것인지 의심하는 이유이다. 혹 ‘Top Dog’를 목표로 삼고 있지 않는지. 그건 단일성이다. 또한 포장지인 공포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문 뒤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두렵고 괴이하지만 시대를 가로지르는 사고가 있다. 아이폰이 마음속의 이미지를 근간으로 했다면 윈도우는 공학적이다. 이미지는 무수한 무엇의 결합이다. 사람들이 아이폰에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열광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는다. 문을 열면 처음 만나는 것이 이런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감정과 짝을 이루고 있다. 감정이 끊어진 겨울 낙엽은 그저 낙엽이다. 날개를 가진 아이들이 섬세한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은 그들을 향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한다. 갈등과 감정의 얽힘으로 보석을 싸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귀한 보석마저 쓸데없는 것으로 여긴다. 재능이 잘리는 것이다. 명절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산성에 도움 되지 않고 감정적으로 상하기도 하는 여기에는 세상을 건너는 사다리가 숨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든 타부가 사라지고 모든 명절이 사라진다. 그러니 관계가 끊어지고 보이는 것만 찾는 것이다. 스스로 날개를 꺾고 또 아이들의 날개를 꺾는다. 이것이 단일한 사회다. 고전적인 여성성이 무너지는 것은 이런 단일성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 남자가 가진 여성성이 또는 여성의 모델로서 지혜의 여인이 사라지고, 보이는 눈앞의 빛이고 진동하는 소리이다. 세상이 힘든 것보다 이런 감정, 곧 저 곳을 넘나드는 사다리가 견디기 힘든 것이다. 생물학적인 성이 아닌 감정이 뒤범벅이 되어 나타나는 어떤 모습을 여성성이라고 한다. 외면하면 보이지 않을 듯하지만, 그게 나를 삼킨다. 세상에서 무서운 일은 문 너머의 세상을 인위적으로 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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