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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소리
마음여행
2018년 03월 14일 (수) 10:53:06 이경달 cc8620@hanmail.net

잃어버린 소리

 

사방이 유리창이다. 스며든 빛이 마루에 머문다. 유리 집이다. 눈이 녹는다. 처마. 낙차를 가지고 있는 집의 처마 그 곳에서 모인 물방울이 떨어지면 소리를 낸다. 공간에서 생긴 소리이다. 한옥이나 단층집이 가지는 즐거움이다. 슬래브가 아닌 집과 배관을 통하지 않는 집에는 이런 소리가 난다. 슬레이트 지붕 집에서도 물받이가 상하면 그냥 떨어진다. 빗소리다. 도회지에서 잃어버린 소리다. 단층집이 드물고 더구나 기와에서 처마에서, 빗물이 배수관을 통하지 않고 떨어지는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낙수다.


   


미닫이문. 삐걱거린다. 서랍을 열 때도 비슷한 소리가 있었다. 서랍에 많은 물건이나 무거운 물건이 놓여 있으면 심했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요즘 서랍은 롤러가 열고 미닫이문도 롤러가 닫는다. ‘자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리거나 들리지 않는다. 한옥 문은 비틀리거나 비를 맞아 부풀면 ‘끽‘하는 소리를 냈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은 손으로 치고 발로 차서 열었다. 나무 틈인 홈을 목문이 지나는 구조이다. 바퀴가 없고 레일이 없다. 나무가 만나는 자리에 기름을 칠하거나 초를 칠하면 한층 부드러웠다. 소리는 그래도 남았다. 심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는 칠판에 손톱을 세워 내는 것과 닮았다.


난로를 지피는 동안 창을 연다. 겨울에도 창을 연다. 창으로 바람소리와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다. 장작은 타면서 소리를 낸다. 황홀이다. 쇠문에 달린 바람구멍을 타고 장작소리다. 구들의 그들이 아니면 잘 기억하지 못한다. 소리는 언어이전이다. 바람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가끔 광기와 닮았다. 귀를 기울이면 귀신같다. 오싹한 소리와 바람이 된다. 바람은 과학으로서 방향과 세기만을 문제 삼는다. 겨울 계곡바람. 쇳소리를 내면 전장의 칼부림이다. 칼부림. 나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아직 떨어지지 않는 잎들이 떨어지는 소리. 무엇을 담고 있다. 내부의 무엇을 흔들고 있다. 나는 느리고 묵직하고 분리되지 않는 감정으로, 감정의 덩어리로 귀신같다고 느끼는가. 잎이 떨어지고 부딪히고 마주하는 소리에 내부가 ‘저절로’ 진동하는 것이다.


계곡을 타고 들어온다. 기차 소리다. 기적이다. 짧고 둔탁한 쇳소리다.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서면 기차는 콩닥거린다. 밤중이면 그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다. 먼 곳의 개는 우울하고 음울하게 짖는다. 묶인 개는 놀라고 분노하고 있다. 기차 소리를 싫어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기차가 지나는 마을. 소리에 감정을 각기 달리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낮은 음과 높은 음 그리고 그것의 조합. 어떤 것은 대체로 편안하고 어떤 것은 대체로 불편하다. 비행기 소리다. 언제부터인지 들린다. 헬리콥터가 난다. 빠른 전투기는 가끔 폭음을 터뜨린다. 괴상한 소리의 비행기다.


물소리. 냇가 얼음이 녹는다. 비가 내린 뒤 눈이 왔다. 물의 양과 경사와 놓인 돌과 회전 폭에 따라 소리를 낸다. 나뭇잎 흔들리는 작은 소리가 겹쳐진다. 어떨 때는 느리게 징을 치는 듯하다. 냇가는 징을 친다. 소고를 두드린다. 큰 냇가는 떨어져 있다. 멀지 않는 곳에 낙동강이 지나고 있다. 물은 소리다. 맑은 냇가는 소리가 맑다. 강이 씻겨가고 냇가가 씻겨간 소리가 좋다. 봄날 냇가가 좋다. 나와 무관하게 또 무관하지 않는 소리가 있다. 작은 소리가 무수히 모인 소리는 아름답다. 과학의 발견이다. 작은 소리의 무수한 모음이 좋은 것은 인간 삶의 역사이다. 텔레비전과 스마트 폰에는 이런 소리는 없다. 대역폭의 한계 때문이다. 소리에는 편안함뿐만 아니라 두려움 귀찮은 무엇 그리고 그리움이 존재한다. 인지하는 인간이다. 동물도 비슷할 것이다. 빗소리의 비. 질퍽한 거리. 구두에 옷에 지장을 준다.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사라져야 할 이유이다. 바람도 역시 그러하다. 지는 낙엽은 거추장스럽다. 거추장스러운 나무가 내 집 둘레에 있다는 그 자체가 일상을 방해한다. 도회지를 구성하는 권력을 향한 길을 방해하는 것이다.


소리가 사라진다. 장해물을 넘지 못하는 소리. 자라지 않는 나무. 사라진 계곡. 소리가 사라진다. 들을 수 없다. 자동차 소리와 빛에 흔들리는 거주지에는 없다. 현대 건축의 당연한 현실이다. 자동차와 웅성거림. 지하도의 익숙한 걸음과 전자음.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감정으로서 무엇인가. 냉혹하고 냉엄한 것을 인간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적인 물음이다.


아파트는 인위적이고 지하철도 인위적인가. 그런 물음이 양자택일이 아니라면 자기 판단에 따른 의견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은 지구상의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분들은 지구상의 어떤 것도 인위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저 지나간다. 낮은 산과 흐르는 강과 소리와 어스름이 ‘단지’ 그리울 뿐이라고 한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은 인위적인가.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기. 빛나는 화면. 정밀하게 가공된 사진들. 밝은 색과 화려한 색. 아니면 곡괭이와 삽으로 판 동굴은 자연적인가. 폐광의 풍광은 어떤가. 채석장의 모습들은 무엇인가. 산을 깎는 것과 댐을 만든 것은 무엇이 되는가. 버추얼 리얼리티는 어떤 모습이 매혹적인가. 근거는 있기나 한 것인가. 우리는 어떤 표현을 하는가.


윤택한 자연계. 종의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넓은 의미에서 지구는 종의 다양성과 무관하게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번성하다가 몰락하는 과정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인위적이니 자연적이니 하는 말에 새로운 지푸라기를 들고 나타난다. 지푸라기를 태우면 연기가 시야를 가린다. 자연적이라는 것.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라는 것. 인간이 자연과 일정 접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 마음은 자연이다. 수백만 년간 굶주리고 헐벗었고, 아주 적은 시간만 작은 소리가 있는 움막에 살았다. 진화의 과정이 적층되어 온 것이다. 역사이전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그리 적층되어 왔다. 마음은 너무나 정돈되고 깨끗하고 차단된 이런 곳에 익숙하지 않다. 파국처럼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는 감정이다. 감정은 내 안에서 분출한다. 그 감정이 쉽게 길들여 질 수 없는 이유이다. 자연발생적인 감정을 채찍과 총칼로 그리고 거짓으로 억누른 경험이 있다. 전체주의의 귀결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역린을 거슬리지 말고 물결을 거슬리지 말라고 한다. 집단학살과 폭동이 어떤 희망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폭발이고 파괴다. 파시즘의 연구가 도처에서 이루어져도 ‘현재인 이유’가 감정이 현재인 까닭이다.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화폐가 있다. 다양한 이유로 발달하고 진보하고 그리고 움직인다. 화폐는 몇 가지로 분류한다. 화폐는 사람과 직결되는 어떤 장치로서 작동한다. 작동하는 곳이 현실이고 감정의 어떤 영역이다. 돈은 자연스러운 인류 진화의 흔적으로서 남아 있는 감정의 일부다. 그러니 윤리와 도덕에 비추면 어색하고 위험하다. 감정은 지적인 것이 우위라고 여기는 인간에게 대개 어리석고 유치한 면을 보이고 있다. 화폐가 낯설고도 광기라고 여기는 이유이다. 광기는 현실과 착종하는 현실의 혼잡이다.


인간 내부의 감정. 인간 내부에서 일어서는 충동성. 아마 이것을 관리하거나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오다. 피비린내 역사가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표출되어야 한다. 록페스티벌. 축제. 운동장과 또 그런 곳. 또 다른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 그러나 감정적인 그들에게 책 읽는 행위는 대단히 힘들다. 책은 본디 어렵기도 하다. 또 언어로서 담겨지기 위해 어떤 조건들의 삭제를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감정으로 읽는 세계에서 지적인 행위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열광할 때 열광하고 그리고 일상으로의 복귀다. 도회지는 일상이다. 감정의 분출에 장소구분이 필요한 이유이다.


인간 마음은 지금의 도시와 제도가 견디기 힘들다. 감정은 저항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둔 엄마가 실감한다. 이 감정을 말로서 관리한다는 것은 잠시만 가능하다. 누누이 보아왔다. 아이들에게 강제로 학교와 학원을 다니게 한 결과가 무엇인지. 생명력은 이런 저항의 감정에서도 분출한다. 한편 이 감정을 이성적이라고 한다. 충동성과 달리 정확한 잣대와 움직임과 자기 제어가 감정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양가적이다. 차라리 지적인 인간이 문제라고 한다. 감정이 끊어진 인간은 괴물같이 존재한다. 파괴적이다. 세상을 단 하나의 시각으로 보는 위험이다.


우리의 육체가 지금의 포식과 편안함으로 혹 길들여진 고양이가 되는 것이 아닌지. 포식은 감정을 길들인다. 본디 고양이는 좀체 길들여지지 않는다. 고양이는 거리를 유지한다. 게으름은 감정의 또 다른 측면이다. 아파트의 고양이는 게으름과 달리 길들여지는 것이다. 먹이를 스스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과 거리 그리고 조심성. 치매의 분들이 음식을 탐하는 분도 계시지만 가진 음식을 나누기 위해 내놓기도 한다. 마음을 나누는 현상이 치매에서 발견된다. 세상 편하게 게으른 감정으로 자기 갈 길을 간다. 유아적인 감정이다.


산에서 나무를 베는 사람은 불편한 감정에 시달린다. 나무를 베는 그 행위 자체가 싫은 것과 간벌과 어린 나무를 조림한 설명이 밝다. 감정이 나무로 하여 굴절되고 그리고 지금의 언어로서 표현된다. 감정을 읽는 행위가 공감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아니면 그저 말이다. 벌목하는 분들의 감정은 낯선 곳에서 일어난 것이 여과 없이 나타난 현상이다. 벌목꾼에게 나무는 그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하다. 나무를 베는 단순한 행위에 이런 감정이 불편하다. 마을 장수목에 치성을 드리는 ‘신령’스러움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대 종교는 인간 마음에 윤리를 채운다. 윤리가 감정이 된다. 형식에 머무른 종교인의 마음은 어떨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례와 문화적 전통이 그저 형식이었다면 마음은 깜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유교 도덕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니라면 우리는 넉넉한 시간을 변방에 떠돌던 자로서의 감정을 내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감정이 짙은 검은 색을 띤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가끔 혼자 묻는 질문이다. 종교가 개혁되기 힘든 일은 있는 감정을 도외시하고 보이는 말의 이런 저런 나열이기 때문이다. 물화로서의 종교는 그저 그런 이유라고 생각되는 말의 집합이다.


더불어 개인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이 또 다른 감정을 낳는다. 물에서 놀고 싶은 그들이 물에 빠져죽는 타인의 여름을 보면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새로이 추가된 어떤 감정이다. 내부는 복잡한 화학공장이다. 들끓고 있다. 쉬운 제재나 제어는 없다. 감정은 마음의 일부다. 부분이고 분출이다.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음은 도외시된다. 그러니 말의 이동은 그저 말의 이동이다. 마음이 없는 종교가 흔한 이유이다. 편집증에 가깝다. 감정은 전염병이기도 하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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