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탕
모탕
  • 이경달
  • 승인 2018.12.3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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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여행


모탕

 

얼음이 두껍다. 깊이를 가지지 않거나 흐르지 않는 물이 먼저 언다. 추위는 물에 축적된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언다. 가장자리에 갈색 잎을 물고 언다. 남쪽 그들에게 꿈같은 소리다. 팥빙수도 아니고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더구나 냉장고에서 꺼내는 그런 얼음이 아닌 하나의 덩어리다. 얼음. 1기압에서 섭씨 영도 아래도 떨어지면 고체로 변한다. 사이언스이다. 얼음을 둘러 싼 감정은 어떤가. 산골 냇가가 얼음으로 채워진다. 늘 본다. 물이 없는 곳은 사막의 추위 같다. 얼음이 있는 추위와 사막의 추위다.

 

아이들이 겨울 운동장에서 사라졌다. 재미있는 놀이가 손 안에 있는 탓인가. 운동장에는 놀 친구도 없고 친구가 없으니 놀 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통학하는 차. 움직이지 않는 건물. 시소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소의 페인트 빛은 아이 없는 공간에 저 홀로 밝다. 시소의 중심은 고정되어 있다. 그 때 학교에는 이게 움직였다. 장난으로 양측 무게를 달리하고 낄낄거렸다. 시소 끝자리를 장갑으로 털고 그녀는 저기에 나는 여기에 앉는다. 시소를 탄다. 처음에는 상대를 본다. 시간이 지나면 하늘을 본다. 정점에 오면 반대편에서 발로 디딘 힘으로 다시 땅에 닿는다. 양측의 몸무게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게 재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무거운 쪽이 장난을 치면 가벼운 쪽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매달려 있다. 그러다가 무거운 쪽이 자리를 비켜버리면 엉덩방아를 찧는다. ‘시소를 살살 타자’라는 말은 시소를 타는 아이들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혼자 타는 미끄럼틀이나 그네가 차라리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장작이 들지 않는 구들’은 이런 산골 추위면 늘 듣는다. ‘그런 말의 그’는 더 이상 장작을 지피지 않는다. 권했지만 거절했다. 성의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구들 놓는 분들의 말에는 ‘양심’이 있다. 곧 모든 구들은 역류한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진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구들은 역류한다. 경복궁이나 창경궁의 구들은 역류하지 않았을까. 오래된 권세가의 구들은 어떤가. 굴뚝을 높여도 역류한다. 구들이 데워지고 굴뚝으로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에서 그럭저럭 나무를 태우면 역류하지 않는다. 유사한 시스템으로서 ‘열역학’이 들어가면 강제 환풍이다. 현대 기술이다. 이 기술은 원가를 줄이고픈 생산자에겐 귀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공간을 두고 강제 환풍 시스템을 설치한다. 차가운 공기와 더운 공기는 무게가 다르다. 차갑기 때문에 열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가 역류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물로 달리는 자동차’에 열광하고 ‘장작이 필요 없는 구들’에 열광하느냐. 아마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탓일 것이다.

시소를 탄다. 땅에 발이 닿는 곳보다 높은 이곳은 어딘가. 푸른빛 하늘. 산등성 그들 집을 본다. 현실의 무게를 팽개친 그는 어디에 있을까. 괜히 나무꾼의 선녀가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막집에 무엇도 없는 곳에서 선녀가 있고 선녀는 이밥에 향기나는 반찬과 좋은 옷을 걸치고, 아이들은 즐거이 논다. 그런 현실은 없다. 용궁은 없다. 그러나 용궁에서 나만을 위한 수많은 잔치가 펼쳐지고 내가 용궁의 귀한 게스트라니. 정도의 차이는 있다. 정도를 넘어서면 삶의 의미는 상실된다. 이런 달나라와 용궁은 현실에서 무엇이 될까. 선녀의 나뭇꾼이고 용궁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성취’의 존재지만, 섹슈얼리티의 현현 이다. 망상이 퇴행을 이끌고, 낯선 세계로 떠난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장작하기 힘든 현실이 망상을 불러오고 그 틈에 사기꾼이 나타난다. 조금 쉽게 돈을 벌어 보겠다는 그 틈으로 밀려들고 이상한 종교가 끼워들고 괴로운 현실 대신 낯선 풍광이 어른거린다. 낯선 풍광. 외면과 쾌락. 현실을 두고 선택이 다양하다. 선택이 다양한 것은 현실의 다양한 측면이다. 거대한 현실의 어떤 지점을 선택해서 걷는다. 이 선택이라는 것도 쉽지가 않다. 명품 브랜드가 그저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었던 선택의 이면에는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웅크리고 뿌리내리고 있다. 어떤 선택이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선택한 것은 현실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시소는 늘 황홀했다.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어린아이는 없는 책을 읽고 없는 나라를 꿈꾸었다. 시소 한 끝에 엉덩이를 대고 하늘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황홀했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시소는 내려오고 발은 땅을 디뎌야 한다. 다들 떠나가면 혼자 타는 시소가 된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그 말은 ‘짐승의 언어’일 가능성이 높다. 고양이가 벌떡 일어서서 먼 하늘을 본다. 한참 후 다시 잠을 잔다. 배고플 때 앙앙거리다가 허기가 가면 불러도 대답이 없다. 고양이에게 먼 산을 보는 것은 뭘까. 배고파서 먹는 것과 달리 벌떡 일어나 무엇을 보다가 다시 자는 이것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꿈은 뒤섞인 것이고 실수이고 재미이다. 생명력이다. 어른이 꾸는 꿈이 아이와 다르지 않는 것이 우울이다. 윤리와 도덕이 없는 공간이다. 그들에게 나와 타인은 무엇인가. 흐르는 기억 속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침대보다 큰 키는 자르고 작은 키는 억지로 늘리는 대상인가. 그런 ‘임의적인 행위’가 보이지 않게 흐르다가 표면에 드러난 것인가. 모든 것이 낯선 그들이 된다. 선녀와 용궁의 말을 믿지 않는 그들이 야속하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희미하다.

그래서 발은 대지를 딛고 머리는 하늘에 두는 것이라 했던가.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은 망상이고 땅에만 발을 두는 그것은 부분의 세계다. 이상 없이 인간은 살 수 없고 그렇다고 이상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기는 고단한 현실에서 발을 땅에 딛지 않는 인간을 향한 잔혹한 행위다. 망상은 스스로 버림받는 자해다. 사기가 스며들고 스스로 자해하고 그리 지낸다. 지금 현실은 어떤지. 자기를 객관화하는 추상이 가능할까.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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