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선언 백주년 "우리는 ‘스스로 섰’(獨立)는가?"
3.1 선언 백주년 "우리는 ‘스스로 섰’(獨立)는가?"
  • 이정배
  • 승인 2019.02.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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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선언 백주년 기념설교(요 8:31-38, 롬 9:1-5)

이정배(현장顯藏 아카데미) 

지금부터 10년 전, 2010년의 첫날을 맞으며 저는 2013년과 2017년 그리고 2019년을 떠 올렸습니다.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유불선 종교가 공존하는 이 땅에서 WCC 10차 대회가 개최될 2013년, 근대의 시작을 알린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 그리고 3.1 운동 백년을 맞는 2019년을 기대하며 2010년 첫날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영적 자폐증에 걸린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흐름과 접해 활짝 열려질 것을 기대했고 그 영향으로 500이란 숫자가 주는 의미만큼 교회가 개혁되길 바랐으며, 그 결과로 2019년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에 앞장서 100년 전 민족에게 진 빛을 되갚을 수 있기를 염원했습니다. 당시 천도교의 막대한 자금과 정신적 지도력 덕분에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이렇듯 과거 역사는 기독교가 민족에게 큰 빚을 졌음을 알려줍니다. 그때를 이끌었던 손병희, 이승훈 그리고 한용운 같은 산(山)처럼 큰 영혼의 사람들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꿈을 꾸었다

아쉽게도 2013년과 2017년 두 역사적인 해는 ‘왕 되기’를 자처한 가시나무가 그랬듯이 기독교계 최고가 되려했던 어느 한 목사에 의해 의미를 잃었습니다. WCC 신학을 부정했으며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함으로서 기독교를 암흑의 종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19년을 이끌 힘을 기독교로부터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남남갈등을 부추기며 거짓뉴스를 생산하는 진원지가 되었으니 걱정입니다. 그럴수록 100주년을 맞는 기독교는 신앙선배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일로 분주합니다. 작금의 자신들 못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 하는 듯싶습니다.

루터신학이 중요한 것은 ‘오늘도 종교개혁이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3.1운동을 기리는 것도 자주, 평화, 독립의 정신이 살아있기를 바라서 입니다. 외세에 맹종한 채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이 손에 든 태극기는 100년 전 자주와 독립을 열망하던 그날의 태극기와 의미가 같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총통 아베 노부유키의 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조선 민족이 제 정신을 차려 옛 조선의 영광을 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일본이 총칼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었기에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2010년부터 3.1 운동 백주년의 해를 마음에 담았었기에 이 날을 옳게 지나고자 많이 노력했습니다. 우선 신학자들과 더불어 3.1 정신을 조명하는 책을 엮었고 여러 종교인들과는 ‘2019년 한반도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겠으나 그때를 흉내 내며 이 시대를 사는 종교인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의 시대적 의미를 되물었습니다. 이념, 종교, 계급, 성별, 국적의 차이를 불문한 채 자주와 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의 정신을 잇기 위함입니다.

▲ 종로에서의 3 1만세운동
▲ 종로에서의 3 1만세운동


물론 그 시대의 독립과 이 시대의 독립 간의 의미 차(差)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섰(獨立)는가?’라는 질문앞에 정직하게 서야할 것입니다. 정치적 맥락에서 뿐 아니라 우리들 의식적인 영역에서도 이 물음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선열들이 그토록 목 놓아 외쳤던 자주와 독립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바울, 이스라엘에게 혼과 얼의 분출을 촉구했다

오늘 읽은 두 본문 중에서 로마서 본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人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다메섹 체험 이후 ‘자유 한’ 존재가 되고 보니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기 민족이 안타까웠던 것이지요. 본래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만의 ‘언약’과 ‘율법’, ‘예배의식’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까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도 혈통으로는 이들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일 수 없고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야 하느님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제게는 일견 민족주의/탈(脫)민족주의 논쟁으로 읽혀집니다.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과 정신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대비시켜 말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리 시대에 ‘민족’을 말하는 것은 뜨거운 감자를 삼키며 말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이 ‘민족’이란 주제입니다. 원초, 본질적 시각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수구적 옹호(긍정)도 옳지 않겠으나 민족을 허구적 (근대)구성물로 여기는 것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점에서 민족을 정체(불변)적 개념인 ‘자체동일성’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자기동일성’ 차원에서 이해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자기동일성’ 차원에서 우리 민족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좋은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제국주의는 자신들 야욕을 위해 우리 민족을 열등한 존재로 각인시켰지요. 본디 흥(興)을 좋아한 민족이었음도 한(恨)의 사람이라 일컬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응(저항)하고자 민족주의자들이 과할 정도로 영웅사관을 부추겼습니다. 단재 신채호 같은 이는 광개토대왕과 강감찬을 내세우며 민족 자존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혈통적으로 하느님 자녀라 여겼듯이 말입니다.

이점에서 ‘뜻의 존재론’을 말했던 함석헌의 역사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영웅사관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는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어떤 삶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우리들 ‘처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현실의 ‘고난’ 속에서 뜻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 ‘뜻’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동력인 까닭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과거에 집착하여 자신들 현실에 눈감는 동족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종살이 했고 지금도 제국 로마의 폭정 길들여 살면서도 여전히 과거만을 들먹거리며 돌같이 굳어진 ‘자체 정체성’에 함몰된 채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기 한 몸 바치겠다고 작정하며 나선 것입니다. 3.1 정신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과거 좋은 유산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일어서지 못하고 스스로 설 의지를 잃었다면 그것은 폐기처분되어야 마땅합니다. 1910년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이완용의 정세판단이 이런 실상을 반증합니다.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관념이 없고 단지 각자가 자기보호에 급급하고 … 불교는 절간에서 절을 지킬 따름이라 신도가 없고 유교는 글 읽는 사람이 급격히 줄었고 … 예수교와 천주교의 경우, 한국 사람으로서는 큰 인물이 없으며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정부 탄압으로 힘을 못 쓸것인 바, 무력으로 진압하면 큰 난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로선 결코 안이한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식민화시켜 영구히 그렇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겠지요.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습니다. 죽은 듯 했던 민족이 그로부터 10년도 채 되지 않아 ‘뜻’을 갖고 일어선 것입니다. 우리들 ‘과거’가 현실을 위한 ‘뜻’으로서 재탄생된 것입니다. 결코 민족자결주의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속에 간직된 ‘얼’과 ‘혼’이 분출된 결과일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민족에게서 기대한 것도 실상 이것이었습니다. 제국에 기생, 안주하지 말고 오롯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이었지요. ‘하느님 자녀’란 천부인권의 다른 말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과거유산이라 자랑치 말고 오늘 찾아 살아내라고 바울은 절규했습니다. 이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겠다고 한 것이지요.

이점에서 33인의 선열들은 바울을 닮았습니다. 자주와 독립과 평화, 그것은 바울이 체험한 자유의 다른 말인 까닭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섰음’을 만방에 알린 3.1 선언을 우리는 ‘혁명’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우리를 홀대했던 중국이 3.1 혁명을 지켜보며 많이 부끄러워했었지요. 모택동이 조선이란 나라를 중(重)히 대접하라 명했답니다. 오늘의 중국을 있게 했던 5.4혁명이 이렇게 해서 촉발되었음을 역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 스스로 설 것을 촉구하셨다

두 번째 본문,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본서 8장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멋진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유를 말하시니 유대인들 모두가 불편해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었는데 ‘자유’ 하라고 하니 분노까지 표출했습니다.

정말 이들은 종이 되어 본 적이 없었던 걸까요? 이미 수백 년 동안 주변 강대국의 지배 속에 살았고 몇 번에 걸친 봉기에 실패를 거듭했기에 이런 식민적 상황을 자연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죄는 율법, 도덕적인 차원, 그 이상이겠지요. ‘스스로 설 수’ 없는 현실에 살면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못한 유대인들을 향해 죄의 종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늘의 말씀을 지닌 자는 세상으로부터 자유 해야 옳습니다.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 밖, 체제 밖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하늘의 말씀이 사라졌기에 이들은 거짓된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눈에 이들 모두가 체제의 종노릇하며 사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느 독립영화의 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해방이후 친일하던 밀정을 법정에서 재판관이 심문했습니다. ‘당신은 왜 독립군까지 잡아가두는 못된 짓을 했는가?’라고 물었지요. 그의 답은 ‘우리나라가 독립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이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독립과 해방을 자신들 영역 밖의 일이라 생각했었겠지요. 로마 권세를 두려워하며 그들에게 세금 바치며 자신들 안위를 보장 받으면 족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 종교행위 하는 것으로 자신들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죄의 종노릇이었을 뿐입니다.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서 『萬種一臠』을 지은 정동교회 목사, 탁사 최병헌은 천부인권, 나라주권을 빼앗긴 채로 사는 것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유대인을 죄의 종이라 했을 때 이런 면을 지적하지 않았겠습니까?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생각하자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섰는가?’를 물으면 어떤 답을 할 수 있겠는지요. 좋은 집에서 남의 손 빌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는데 왜 ‘독립’을 말 하느냐고 불편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서, 예수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아직 ‘스스로 서지’ 못했습니다. 분단체제하에서 원심력이 구심력을 해쳐 남남갈등이 더없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지금 광화문 광장의 풍경은 가관입니다. 대한 애국당 사람들 수 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험한 말들을 쏟아 냈고 이들을 지지하며 찬송을 부르는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100년 전 독립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이념, 종교, 계급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희의 『세 여자』라는 소설에서 배우듯 독립에 있어 사회주의 역할이 지대했지요. 최초 상해 임정에서도 민족주의자, 기독교인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일했습니다. 논밭 팔아 수조에 달하는 돈을 독립을 위해 내놓은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일해 하루 몇 센트를 벌었던 사탕수수밭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이 모은 군자금도 기억할 일입니다. 선교사들이 정치적인 일에 관여치 말라, 타종교 인들과 말을 섞지 말라 가르쳤음에도 민족 앞날을 위해 3.1 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이 우리들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하지만 백년 후 지금 평화가 정착되어야 할 한반도 안에 갈등이 골 깊어졌습니다. ‘스스로 섰다고’ 착각하는 이들 탓에 하늘이 준 평화의 기운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이념공세를 퍼붓는 목하 기독교인들이 종 된 줄을 모르고 스스로 자유하다 여겼던 바울 당시 유대인들을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자유 수호란 이름으로 우리들 역사의 일부였던 사회주의를 적대시했고, 없는 자들을 너무도 쉽게 사지로 내몰았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외세를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스스로 섰는가?’, ‘자유한가’라는 예수의 물음에 불편을 느꼈다면 우리에게 하느님 말씀이 없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독립이 불가능할 것이라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러 사회적 위상을 갖고 있음에도 종교인,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3.1 선언 백주년을 기념할 기회가 있을 것이나 오늘 우리는 무뎌진 이스라엘 민족의 감각을 일깨우려는 예수와 바울의 심정으로 3.1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민족의 혼이 깃든 3.1 선언을 하늘이 주신 말씀이라 믿고 그 정신, 자주, 독립, 평화의 가치를 실현시킬 목적에서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의식도 옛적 유대인처럼 많이 무뎌졌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 안주한 결과일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을 지배했던 제국이 로마였다면 오늘 우리들을 압도하는 실체는 자본주의겠지요.

얼마 전 종영된 ‘스카이 케슬’ 연속극 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됩니다. 승부욕을 부추기는 엘리트 교수아버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피라밋’을 깨트리며 그의 아들이 절규하듯 내뱉은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세상은 몇몇 소수만 높이 오르는 피라밋이 아니라 모두가 손을 잡을 수 있는 둥근 원(지구)처럼 생겼다’고 말입니다.

‘스스로 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가 말한 자유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3.1 정신으로 이 땅 한반도가 어떻게 독립되어야 하겠는지요?

아시는 대로 강력한 원심력이 만들어 낸 분단체제는 남남갈등을 증폭시켜 3.1 정신을 훼손시켰습니다. 남북이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해도 분단체제에 기생한 이념집단들이 힘겹게 합니다. ‘피라밋’ 끝에 올라 가난한 청년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면서 자유 수호를 외치는 사람들, 그들은 나라 찾겠다고 삶을 던진 선열들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매단 사람들을 향해 ‘저들이 자신들 하는 짓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분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다. 여전히 종의 삶을 고집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을 말입니다.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는 역사 속 ‘뜻의 존재’를 믿는다면 예수 십자가는 이제 우리들 몫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들어 온 기독교는 오늘을 기다려왔습니다.

3.1 선언 100주년의 해에 하늘은 한반도에 새 기운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평화체제를 일굴 때 기독교는 비로소 이 땅에 존재할 이유를 갖습니다. 목에 걸린 십자가, 교회 벽에 걸린 장식품으로서 십자가가 아니라 원심력에 휘둘린 종살이 곧 70년 분단장벽을 허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처럼 우리 역시 자신들 노예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저들이 자기 하는 짓을 모른다’고 절규하면서 말입니다.

여전히 주변에는 ‘거짓된 자유’를 신봉하며 진리를 죽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미년의 ‘뜻’이 살아 있다면 기해년을 사는 우리에게 바울의 결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언제 종 된 적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며 분노하는 가엾은 동족들을 위한 죽을 각오 말입니다.

백 년 전 3월 초하루, 우리들 선열들은 그런 삶을 택했습니다. ’스스로 서고자‘ 죽음도 감내했던 자신들의 삶을 하느님 발길에 차인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미년 3.1 정신을 우리가 기리는 이유이겠습니다.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는 말이 우리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서고자’ 했던 그 때의 ‘뜻’을 2019년에 다시 이어 갑시다. 그 뜻이 우리에게 다시 십자가를 요구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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