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평화와 하나되는 대한민국(2) _3‧1운동 (기미독립만세운동)
한반도의 평화와 하나되는 대한민국(2) _3‧1운동 (기미독립만세운동)
  • 박준철 칼럼
  • 승인 2019.03.04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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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특별기고

3‧1운동 (기미독립만세운동)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목전에 두고 지식인들은 세계정세를 예의주시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여운형이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촉구하고자 국내에 밀사를 파견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유학생들은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알리고자 송계백을 국내에 밀파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릴 호기라고 판단한 종교계와 학생들이 본격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나섰다. 그 결과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천도교에서‘일원화’라고 표현했던 연대의 가치에 기반해 준비된 것이었다.

1910년대에 지식인에게는 정치결사의 자유가 없었다. 종교계 지도자나 학교 교원 정도가 사회활동으로서 허용된 범주였다. 바로 그들이 독립운동 모의의 주체로 활약했다. 제일 먼저 천도교가 연대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제안했다. 천도교 창건자인 손병희와 그의 측근인 권동진과 오세창, 1910년 을사늑약 직후 천도교에 입교해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던 최린이 주모자였다. 그들은 1919년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법으로는 세 가지를 마련했다. 첫째, 조선민족대표의 이름으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여 민중시위를 일으켜 조선민족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보여준다. 둘째,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에게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한다. 셋째,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독립에 힘써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다. 연대를 위한 연락 실무는 최린이 맡았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원칙으로 대중화, 비폭력과 함께 일원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2월 초에 최린은 먼저 학교 교원들과 연대했다.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의를 받아냈다. 다음으로는 명망가인 박영효, 윤치호, 윤용구, 한규설 등 조선・대한제국 고위관료 출신과의 연대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연대세력은 역시 기독교계였다. 최린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로 한 최남선을 통해 장로교 장로인 이승훈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승훈은 곧바로 2월 11일에 상경했고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는 동참할 뜻을 밝혔다.

중앙집권적 단일조직인 천도교와 달리 기독교계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는 먼저 평북 선천에서 장로교 지도자인 양전백‧유여대‧김병조‧이명룡 등을 만나 동의를 받아냈다. 평남 평양에서는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와 함께 감리교의 신홍식 목사를 만나 동참의 뜻을 얻어냈다. 2월 17일 서울에 다시 상경한 이승훈은 최린이 아닌 송진우와 최남선만을 상대하게 되자 천도교의 독립운동 준비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로부터 감리교 세력이 강한 서울의 기독교계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승훈은 2월 20일에 감리교 지도자인 오화영・정춘수・신홍식・오기선 등과 만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대에 기반한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으로서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장로교의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상근, 현순 등도 만나 이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마침내 2월 21일에 가서야 최남선의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만났다. 최린은 이승훈에게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준비를 중단하고 천도교와 연대하자고 설득했다. 이승훈은 최린에 오늘날로 환산하면 2억 5천만 원 정도 되는 5천원의 운동자금을 요청했고, 천도교에서는 이를 곧바로 제공했다. 그날 밤 이승훈은 함태영‧안세환‧김세환‧김필수‧오상근 등 장로교 지도자와 박희도‧오화영‧신홍식‧오기선 등 감리교 지도자들을 함께 만났다. 이 모임은 철야회의 끝에 천도교의 독립운동 방법을 확인한 후에 연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승훈과 함태영을 교섭 대표로 선정했다. 다만, 독립청원 계획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다음날 최린은 이승훈과 함태영을 만난 자리에서 독립청원 방식을 거부하며 독립선언을 하지 않을 바에는 연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승훈과 함태영은 다시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논의 끝에 천도교와 연대하기로 결의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은 2월 24일이었다. 양측의 합의는 구체적이었다. 첫째, 독립선언은 3월 3일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수십만 명이 운집하게 될 서울에서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하기로 정했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대량 인쇄해 서울은 물론 각 지방에 배포하고 지방에서는 서울의 독립선언 일시와 독립선언서의 배포 방식 등을 따르도록 요청하기로 했다. 셋째,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가, 배부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 담당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대한 의견서 제출은 천도교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참석국 위원들에 대한 의견서 제출은 기독교가 담당하기로 했다. 넷째, 조선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최린은 그날 밤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만나 연대를 요청했다. 1월 말부터 최린에게 독립의사를 비췄던 한용운은 즉시 승낙했다. 한용운의 주선으로 해인사 승려인 백용성의 동의도 받았다. 한편 최린은 한용운을 통해 유림과의 연대를 시도했던 것을 보인다. 곽종석과 김창숙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나, 중심이나 조직이 뚜렷하지 않아 자칫 개별 접촉을 시도하다 보면 사전에 발각될 염려가 있고 시일도 촉급해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의 연대가 이루질 무렵, 학생 지도자들도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본래 학생들은 전문학교 대표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1919년 벽두부터 의기투합했다. 1월 6일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이 독립운동 문제를 논의하고자 모였다. 이 자리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와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이 함께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준비는 종교계와 마찬가지로 1월 하순부터 이루어졌다. 준비과정에서 주익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일본과 제휴하고 동양의 평화에 대한 유색인종 단결의 결실을 맺고자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를 취지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한 달여간의 준비 끝에 2월 20일에는 각 전문학교 대표를 뽑고 대표자들이 체포될 경우에 대비해 시위를 이끌어갈 책임자를 정했다. 그런데 2월 23일에 박희도가 종교계가 연대해 독립시위를 벌일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2월 25일에는 독립시위 날짜가 3월 1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 지도자들은 이틀간 잇달아 회의를 열어 3월 1일에는 전문학교는 물론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3월 5일에는 학생만의 독자적인 시위를 전개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이처럼 학생들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3월 1일의 독립선언식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종교계의 독립운동에 연대하고자 했다.

2월 27일과 2월 28일에는 민족대표 선정,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등 구체적인 진행과 관련한 연대 활동이 펼쳐졌다. 2월 27일에 종교계는 민족대표를 최종 선정했다. 천도교는 중앙교단 차원에서 도사, 장로를 중심으로 최고위직 간부 15명이 참여했다. 기독교에서는 장로교에서 6명, 감리교에서 10명이 참여했다. 불교에서는 앞서 언급한 2명이 참가했다. 그날로 민족대표들은 최린에게 도장을 보내 독립선언서에 날인했다. 독립선언서도 2월 27일에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공장 감독인 김홍규는 그날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인쇄했다.

2월 28일의 독립선언서의 배포 역시 종교계와 학생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천도교월보사 사장인 이종일의 책임 아래 독립선언서가 전국에 배포되었다. 먼저, 천도교는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배포에 나섰다. 안상덕은 2천매를 들고 강원도와 함경도로 향했다. 김상열은 3천매를 가지고 평안도로 출발했다. 이경섭은 1천매를 받아 황해도 지역으로 향했다. 한편, 인종익은 2천매를 받아 남부지방인 전라북도와 충청북도로 떠났다. 기독교계 인사 중에는 이갑성과 함태영이 배포를 주도했다. 이갑성은 강기덕에게 1천 5백매를 보내 학생들이 서울에 배포하도록 요청했다. 2월 28일 밤 승동교회에는 10여명의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나눠가졌다. 또한 이갑성은 이용상에게 3백~4백매를 주어 경상도에 배포하도록 했다. 김병수에게는 1백매쯤을 주면서 군산지방에 배포하도록 했다. 함태영은 6백매 정도를 평양에 보내고 나머지 6백매를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김창준에게 주었다. 김창준은 이 중 3백매를 이계창을 통해 선천에 보냈고 오화영을 통해서는 개성에 1백매, 원산에 1백매를 보냈다. 불교계에서는 한용운이 3천매를 받아 중앙학림 학생 오택언, 정병헌 등 9명을 통해 서울에 배포하도록 했다. 이처럼 서울에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은 모두 학생들에게 맡겨졌다.

그날 밤, 처음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 즉 민족대표 중 23명이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 학생들의 독립운동 준비를 함께 했던 박희도와 이갑성이 다음날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민족대표들은 자칫하면 불행한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며 학생과의 연대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결국 민족대표들이 참가하는 독립선언식 장소는 탑골공원이 아닌 인사동에 자리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이처럼 종교계의 연대는 민족대표 선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종교계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학생들은 종교계가 준비한 독립선언에 연대하고자 했다. 민족대표들은 학생들의 연대를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서 배포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지도자를 매개로 한 종교계와 학생 간의 연대는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월 1일 새벽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가 시내에서 발견되었다. 오전에는 덕수궁에서 고종 장례 절차의 하나인 조문을 낭독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시내에는 전국에서 고종 장례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 교문을 나온 학생들은 탑골공원으로 행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민족대표 33명 중 29인은 태화관에 집결했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꺼내 돌렸으나, 낭독하지는 않았다. 한용운이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연설을 한 다음 식사를 하고 다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태화관 주인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독립축하연을 베풀고 있음을 알리도록 했다. 오후 5시 반경 헌병과 경찰 80여명이 태화관에 나타나 29인을 체포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시각인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집결해 있었다. 시간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 대표인 강기덕 등은 태화관으로 찾아와 민족대표들에게 함께 탑골공원에 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이 폭동하지 않을까 우려하며 이를 거절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3천~4천여 명의 시위대가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중에 독립선언서를 갖고 있던 해주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인 “아래 위에 수염이 있는 머리를 깎은 마른 흰 얼굴의 30 몇 세의 백색 한복을 입은”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시위대는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독립만세를 부르며 탑골공원을 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탑골공원을 나온 시위대는 동대문과 종로 방향으로 나눠 행진했다. 시위대 본류는 남대문역 앞까지 갔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서소문을 향했다. 이 중 일부는 프랑스공사관으로 행진했다. 이 때 경성전수학교 학생 박승영은 공사관에 들어가 ‘조선은 오늘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독립국이 되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프랑스 정부에 알려달라고’요청했다. 시위대 본류는 다시 서소문 언덕을 넘어서 태평로를 거쳐 대한문 앞에 집결했다. 그곳에서 처음부터 종로에서 곧바로 대한문 앞으로 향한 일부 시위대와 합류했다.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 일단 집결한 시위대는 다시 갈래를 나눠 행진을 벌였다. 첫 번째 무리는 광화문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 경복궁을 향해 행진했다. 두 번째 무리는 덕수궁을 끼고 왼쪽에 있는 영성문을 지나 미국영사관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른 후 서대문으로 빠져나가 옛 도성을 끼고 행진했다. 세 번째 무리는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고종 유해가 모셔져 있는 빈전에 들어가 곡을 하겠다고 우기며 헌병, 경찰과 옥신각신했다. 시위군중 중 일부는 혼란을 틈타 슬쩍 빈전에 들어가 조문을 마쳤다. 네 번째 무리는 남산 기슭에 자리한 조선총독부를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한편, 탑골공원을 나와 동대문을 향해 행진하던 시위대는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방향을 틀어 순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을 향했다. 그 앞에서 만세를 부른 시위군중은 오른쪽 방향에 자리한 조선총독부의원을 향해 행진했다.

서울 시내에 일어난 시위는 저녁이 되자 교외로 확산되었다. 저녁 8시경 마포에 있는 전차 종점 부근에서는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집결하면서 2백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오후 11시 경에는 신촌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2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3개 중대와 기마병 1개 소대를 시위 해산에 동원했다. 이날 시위는 1만여 명이 참여한 평화적 만세행진임에도 불구하고 29명의 민족대표를 포함해 174명이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다
조선총독부는 만세시위의 확산 원인을 ‘선동적 문서의 배부’에서 찾았다. 학교나 교회에 비치한 등사기로 등사한 각종 유인물과 격문, 그리고 신문 등은 3‧1운동을 확산하는 촉매제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 뿌려진 〈조선독립신문〉의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하신문이 발간되었다. 지하신문은 만세시위 소식을 방방곡곡에 알려주는 배달부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과 함께 간단한 구호를 적은 전단․낙서․포스터, 시위계획이나 투쟁방침을 알리는 격문․사발통문, 관리의 사퇴나 일본인의 퇴거를 요구하는 경고문․협박문 등의 유인물들이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한국 광복군들의 서명이 적힌 태극기
▲한국 광복군들의 서명이 적힌 태극기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했다. 시위 현장에는 다양한 깃발이 등장했는데, 태극기를 가장 많이 흔들었다.

태극기는 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작했다. 학생 이외에도 여성 노동자, 기생, 농민,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시위현장에서만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면사무소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걸기도 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거는 마을이 등장했다. 만세시위에는 새로운 운동가도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숨죽이며 부르던 애국가도 만세시위에서는 당당하게 제창되었다. 3‧1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애국가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위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신문과 각종 유인물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만세시위를 널리 알렸다. 시위대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나라 상실의 고통을 절감했고 독립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3‧1운동의 탄압
3‧1운동은 3월 1일 시작되어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되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 여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중 7,500여 명이 살해당하였고 16,000여 명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탔다. 경찰의 검거자 수는 무려 46,000여 명에 달했다. 1919년 3월부터 12월까지 검거자 중 19,054명이 검찰로 송치되어 이 중 7,8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일본이 조선에 실시한 치안 법령은 다음과 같다. 통감부가 1907년에 제정한 「보안법」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물론 문서‧그림의 게시나 기타 언동까지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에 제정한 「신문지법」과 1909년에 제정한 「출판법」은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의 신문 발행을 억압하고 구국사상을 담은 많은 서적을 몰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오늘날의 경범죄 처벌법에 해당하는 「경찰범 처벌규칙」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은 한국인의 항일 투쟁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엄격히 단속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총독부는 1912년에 「조선형사령」을 공포하여 일본의 「형법」과 기타 형사 관련 법령들을 한국에 적용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급히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제령 제7호)」을 제정해 만세시위에 참여한 한국인에게 적용하고자 하였다. 독립운동자의 경우,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가 전체 유죄 판결의 71.7%로 압도적이었다. 이어 「형법」의 소요죄 위반이 21.8%에 달했다. 「출판법」과 「제령 제7호」는 각각 3.5%와 2.1% 밖에 되지 않았다. 3‧1운동을 모의한 민족대표 대부분은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면사무소나 주재소에 방화하거나 순사와 헌병을 살상하는 등 폭력시위를 벌인 민중들은 더 엄한 처벌을 받았다. 징역 5년 이상이 43명, 10년 이상이 21명, 무기징역이 5명에 달하였다. 중형의 경우, 「형법」 상의 소요죄‧방화죄‧살인죄‧강도죄‧사기죄가 적용되었다.

▲체포압송되는 3‧1운동 주도학생들
▲체포압송되는 3‧1운동 주도학생들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었다.

첫째,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저항운동이었다.〈2․8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는 ‘무단전제이자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종교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이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서>는 일본을 민주주의의 공적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자는 독립투쟁에 나선 ‘우리 편’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은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둘째, 3‧1운동은 세계를 향해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도 세계 평화는 없다고 외쳤다.

당시 한국 독립이 곧 평화의 실현이라는 평화담론이 광범히 퍼져 있었다. 대한국민의회가 3월 20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자주 독립에 있다’라고 단언했다. <기미독립선언서>도 2천만 한국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면 ‘동양의 영구한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3‧1운동을 모의한 종교계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의 하나로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고 하여 비폭력의 원칙을 제시했다.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상징하는 직접행동이 바로 만세시위였다. 3‧1운동은 두 달 넘게 이어진 반일투쟁이었지만,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3‧1운동으로 빛났던 민주주의‧평화‧비폭력의 정신은 독립운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3‧1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활약했던 학생, 청년, 노동자, 농민, 여성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며 대중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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