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우울
봄날의 우울
  • 이경달
  • 승인 2019.03.04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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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여행

겨울날 화사했던 새소리가 봄 산에 들리지 않는다. 집 둘레 바삐 날던 그들이 어디로 간 것이다. 두 주먹 크기의 새와 작은 새가 갑자기 사라졌다. 늦게 일어난 탓인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 아래 덤불에 작은 새는 무수하다고 한다. 덤불에 그들이 있다. 큰 새는 어디로 갔느냐. 새를 그리워한다. 비온 날도 그들을 찾고 흐린 날도 그들을 찾는다. 봄날에 그들을 찾는다. 마당 끝으로 새소리를 들으러 간다.

시간과 공간이 한정된 내게 봄은 무엇인가. 우울했다. 봄 날 새소리도 작은 고양이도 그저 바라보던 내가 우울한 것이다. 우울이 다가왔다. 왼쪽 팔꿈치가 아파 고생했는데 갑자기 통증은 사라지고 낯선 곳에서 고깔모자를 쓴 손님의 기괴한 얼굴처럼 우울했던 것이다. 아마 죽은 혼들의 날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도마에 떨어지는 칼 소리다. 도닥거리는 소리는 감자나 무를 썰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나타난 이 감정은 무엇인가.

‘감정에 휘둘려’ 그런 말을 듣는다. 큰 감정만 그런 것인 듯 여긴다. 감정은 큰 충동성과 또 크고 작은 무엇이다. 근원도 알 수 없고 방향도 알 수 없는 그것이 꽃 같은 모습의 아릿따운 여인으로 나타나든지 잘생긴 머슴아로 나타난다. 근원도 출처도 희미한 그것이 형체를 갖추고 시공간이 존재하는 곳에 나타난 것이다. 인간을 흔든다. 우울에 밤을 설쳤다. 두터운 커튼을 비집고 햇살이 보이던 그 때까지 나는 뒤척거렸다. 우울은 사람을 뒤척거리게 한다.

감정은 사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말과 뜻. 뜻은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감정은 무수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듣는 ‘문맥에 맞는 말’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시험은 그걸 요구하기도 한다. 책을 보던 그가 갑자기 책을 덮고 배고프다고 한다. 그는 낯선 곳의 손님처럼 그 말을 뱉은 것이다. 배가 고픈 것인지 아니면 심심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존재가 흔들린 것인지.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그저 말을 듣고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리저리 관찰을 하고 묻고 이해하는 과정이 빠지면 ‘오리무중’이다. 감정이 가라앉았다는 것이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파도의 세기가 줄어든 것이지 바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반문한다.

인간의 조건이 반문이다. 무엇인가 묻고 묻는 그 바탕에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 이 우울도 긴 여정으로 나를 찾아 온 것인데 나는 그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인가. 그 배고픈 자는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물음이 바쁜 현대에 무의미한 것인가. 반문이다. 이 반문은 심층으로 감정을 발하는 곳까지 내려가도 유효하다. 감정을 발하는 그곳을 우리는 어떻게 여기는지. ‘아마’ 각기 달리 볼 것이다. 마음의 층을 이동하면서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른 풀의 봄 산을 앞에 두고, 멀리서 온 소식을 듣고 나는 우울한 것이다. 어쩌면 이건 영혼이 내게 깃들어 있는 증빙일 것이다. 그러니 봄날의 우울은 ‘종교’가 있는 그 근원의 흔들림이기도 하다.

내게 독립적 우울, 이 우울의 본질은 모두에게 같은 것인가. 우주가 이 작은 육체에 깃들어 있고, 이 작은 육체를 벗하여 세상의 한 점에 어느 날 서있는 것이다. 나의 오래된 고향으로 부터의 편지가 우울이다. 우울은 거대한 나무뿌리 같다. 뿌리를 자르면 나무는 죽는다. 가지 없는 나무가 없듯이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어떤 감동인 공감의 뿌리가 아마도 이런 우울에 깃들어 있을 것이다.

러시아 문학. 톨스토이 고골리 토스토예프스키 푸시킨. 흔히 보는 그곳에는 러시아의 우울이 있다. 독특한 그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들과 내가 공통된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울하다. 대부분의 그들이 우울하듯이 읽는 이들도 그저 우울하다. 그러니 오래전 그들과 지금의 내가 어떤 우울의 근원에서 생긴 무엇을 우울의 공통된 감정으로 공감하는 것이다. 이게 나쁜 것일까. 잘못된 것인가. 묻는 이유는 사람들은 이런 우울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경증 치료방법은 자신을 ‘잘’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권한다. 그런데 자신의 짜증을 ‘그래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우울증도 그러하다. 자신의 인간 크기를 키우라는 우울이다. 내게 낯선 곳에서 온 그들이 문을 두드리고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것은 배척대상이 아니다. 자신에게 반문하는 것의 반대는 분명하다. 자기성찰이나 회심이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다. 전장에서 폭탄의 위력은 얼마나 많이 죽일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직선적이다. 폭탄은 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죽이는 좋은 성능이다. 폭탄으로 죽는 사람들. 우울이 공감 대상이고 공감이다.

봄에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빈산은 사람 없이 채워간다. 안네 카레리나. 쇼스타코비치의 세컨드 왈츠. 이상하게 화사한 이 음악은 영화에서 춤과 함께 나타난다. 우울은 이런 화사함과도 짝을 이루는 듯하다. 마음이 가난한 징표가 아마도 우울일 것이다. 우울이 황금가지로 변하는 장치가 자기회한인 듯하다. 변환장치이다. 사막에서 나침반이 없으면 크던 작던 원을 그리고 제자리라고 한다. 제자리 돌기를 막는 봄날의 우울이다. 그 우울에 또 우울이 보태지는 인간의 봄이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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