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평화와 하나되는 대한민국(3) _민주공화국의 여정
한반도의 평화와 하나되는 대한민국(3) _민주공화국의 여정
  • 박준철 칼럼
  • 승인 2019.03.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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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의 여정
하나된 만세 (1919년-1945년)

1919년 1월 18일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막되었다.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 황제가 급사했다. 국내외 정세가 격변하자, 이때를 맞아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상하이에서는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일본에서는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종교계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 ·안주(평안남도), 의주·선천(평안북도), 원산(함경남도)에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7개 도시 모두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3월 1일 이후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연이어 일어났고, 3월 중순을 넘어서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3.1운동은 도시와 농촌 가리지 않고 누구든 조직하고 참여하는 자발성에 힘입어 두 달 넘게 이어졌다.

 

민주주의여 만세 (1945년 1960년)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에, 이기붕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날 선거는 공무원과 경찰 등을 동원한 노골적인 부정선거였다.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발포를 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고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 실종되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커지는 가운데 4월 18일에는 고려대생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정치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60년 탱크 위에 올라선 시민들
1960년 탱크 위에 올라선 시민들
1980년 희생자들의 상무관 안치
1980년 희생자들의 상무관 안치

 

다음날인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사수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4월 25일에 대학교수들까지 거리에 나서면서 시위가 확대되자 다음날인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임을 위한 행진 (1960년-1980년)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시작되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인 5월 18일 광주에 주둔한 공수부대는 시위대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저항하자, 계엄군이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여 계엄군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고 비상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갑작스런 이웃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은 무장을 하고 계엄군에 맞섰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고립되자 광주 시민들은 자율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서로 돕고 먹을 것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며 저항했다. 5.18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던 전남도청을 점령하면서 막을 내렸다.

 

6월 항쟁 (1980년-2000년)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두환 정부는 진실을 은폐한 채 ‘턱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4월 13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의 염원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호헌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해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나섰다.


6월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24여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6월 18일에는 150여만 명이, 26일에는 130여만 명이 쏟아져 나오는 등 민주화 투쟁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결국 6월 29일 여당인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6.10 민주항쟁 당시 현장과 2017 촛불시민혁명 당시 광화문
6.10 민주항쟁 당시 현장과 2017 촛불시민혁명 당시 광화문

 

촛불시대(2000년-2019년)

2016년 가을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마침내 10월 29일에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았다.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의결하기 전주 토요일인 12월 3일에는 전국에서 230만 명이 모여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다. 촛불시위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인용한 다음날인 3월 11일까지 20회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전국의 거리에서 추운 겨울을 밝힌 촛불시민은 연인원 1700만 명에 달했다. 촛불시위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비폭력 평화 시위를 이어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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