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소쩍새
밤의 소쩍새
  • 이경달 칼럼
  • 승인 2019.05.03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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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소쩍새

비는 쓸쓸했다. 틈으로 들리는 새소리다. 비가 내리지 않는 밤에도 들리는 그 소리는 다감했다. 무심과 무감과 거리가 먼 소리였다. 풀잎이 젖은 아침이다. 나무를 심었다. 묘목을 키우고 비올 때를 예감하고 옮겨 심은 것이다. 손바닥 크기도 되지 않는 연한 빛깔의 그 빛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사계절 풍광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집은 그렇게 지어졌다. 연한 잎과 빛을 담은 물방울. 밤새인 소쩍새. 계절의 빛과 소리와 공기가 집으로 드나든다. 이 집은 높고 크고 그리고 투명하다.

논리의 붕괴. 이럴 경우 이상한 행동은 따라온다. 나는 지금 그런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 섬뜩했다. 호기심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붕괴. 문법에 맞는 말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술어가 없고 전후가 없다. 특히 심각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 그들은 얼굴과 몸의 비율이 맞지 않는 좀 이상한 그림인 듯했다. 무논리성은 정신분열증 그러니 조현증의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도회지나 이웃으로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분들에게 가끔 본다.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외로운 그들은 의도하지 않게 더 외롭게 삶을 살았다.

해변을 지나가면서 빈 상점의 열을 본다. 들렀던 곳이다. 물건을 사러간 우리일행에게 행한 이상한 행동이었다. 언덕에 줄지어 서 있는 상점들이 그 때는 밤에도 번창했는데 빈집이 되었다. 그들의 행동을 그들은 전혀 모를 수 있다. 장사가 한철이라는 분도 있다. 그러나 붙박아서 장사하는 그들에게 장사꾼으로서의 신뢰는 중요하다. 장사도 배우는 것이라면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그런 말과 행동을. 그런 생각이다.

이런 것을 흉내라고 한다. 그러니 형태가 정형화된 것이다. 구관조나 갈가마귀의 ‘말의 흉내’ 같은 것이다. 조현증의 무논리성은 ‘생각없는’ 흉내이다. 생각하면 흉내를 짓지 않는다. 흉내. 생각을 거쳐 정리되고 정돈되면 멀어지는 세계이다. 계속적인 행위는 사고의 붕괴다. 자신들이 하는 말과 태도를 녹화하여 보라는 권고를 한다. 자신의 모습을 ‘필사코’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말과 행동을 보았다. 자신도 보지 않으려는 그 말을 그 행동을 본 것이다. 무논리성이 가지는 섬뜩함은 생각을 그러니 사고하는 뇌를 거치지 않는 ‘동물의 본능’ 일부를 보는 느낌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말을 외재화하고 행동을 외재화하라는 말은 통할까.

외재화. 가능한 것도 있고 가능하지 않는 것도 있다. 자기의 마음을 외재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대한 자기 마음의 태도는 외재화가 가능하다. 마음의 일부를 조건과 범위를 정해 한정시키면 그 부분에 대한 나의 마음의 태도는 외재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행했거나 행하게 될 그것은 이런 저런 대상이 된다. 이건 자기를 성장시킨다. 자신만만했던 그 말과 행동을 외재화하면 ‘참’ 그리고 ‘대개’는 부끄럽다. 마음의 작은 부분도 외재화시키지 못하면 판단은 없다. 말과 행위가 이것저것 고려없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고려할 것이 빠지는 것이다. 당연히 ‘외재화’함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초라하다. 초라하니 보지 않으려고 하고 또 ‘나’아닌 것에 핑계다.

외재화. 그런데 이건 적어도 뭔가 생각할 수 있는 분들에게 가능하다. 사람들을 관찰한다. 브레이크가 없고 핸들이 없는 삶을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폭주한다. 폭주의 즐거움은 폭주족들이 보여준다. 무아경의 춤과 현실을 잊고픈 폭음. 성서의 연구방법으로 양식사학이 있다. 궁극적으로 그가 처한 현실에서 의미와 목적을 묻는다. 곧 문장을 세밀하게 분류하고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 그리고 전승과 편집의 역사를 보고 그 파편의 의도와 목적을 발견하고자 한다. 스스로 외재화하는 것은 어떤 윤리를 내재화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징표이다. 이건 인간의 성장이다. 성장은 고통스럽다. 품안의 어린아이는 귀여웠지만 자란 아이들의 생각에는 양면성이 있다. 양면성의 한 면은 불안이다. 그런 무논리의 그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목적과 의도는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들의 보편적인 의도와 목적. 늦게 발달하는 아이들에게 보이는 그것이고 그저 늙어버린 분들에게 보이는 그것이다. 생존에 절대적인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곧 배가 불러도 먹는 것과 입지도 않을 옷을 사는 그것이다. 이념과 종교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그것이다. 불안은 공격성의 또 다른 면이다. 교훈은 이런 충동성 제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잎에 묻은 물기는 곧 햇볕에 사라진다. 열의 세기가 시간과 적분이 되어 물을 휘발시킨다. 작은 새소리가 봄이다. 밝은 날의 소리다. 여러 마리가 소리를 낸다. 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사냥감이 되어 쫒기거나 사냥감이 되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는 경우이다. 밤의 새는 아침에 울지 않는다. 소리조차 없다. 밝고 즐거운 그들이 울지 않는다. 분홍의 복숭아꽃과 흰빛의 살구다. 산벚꽃은 옅은 분홍이다. 봄에 아픈 분들이 저 아랫길을 지나간다.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는 분, 아들이나 며느리가 모는 차를 타고 가시는 분들이다. 오래전 그들은 건강해서 아름다웠는데 다들 허리가 아픈듯하다. 건강은 미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했다.

논리의 붕괴. 갓난아이와 같고 이유 없이 방황하는 아이와 같다. 애증의 그들. 방황은 성장의 열쇠고 밑거름이기도 하다. 밑거름에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내내 이런 분들이 있다. 어른이 되는 법. 나이가 들면 저절로 되는 것이 어른이 아니다. 인격을 염두에 두고 심리학에서 일컫는 말이다. 설날 떡국 먹듯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는 이해도와 인내를 상징한다. 긴 시간의 노동과 괴로움이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일등 개와 무관하다. 삶은 방랑자이다.

밤이 즐거운 때이다. 해가 지면 창으로 들리는 소쩍새다. 내가 듣는 것을 소쩍새는 ‘인지’하고 있을까. 언어로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추론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능으로 그 듣는 자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해 아래 인간은 걷는다. 봄날은 그 시작의 상징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방황하는 그들은 돌아온다. 잎과 꽃이 새롭다. 새로운 날에도 육체는 고단하다. 또 뜰에 내리는 비다. 비를 보는 외재화는 살아 있는 동안에 가능한 일이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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