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와 마리
마리와 마리
  • 이경달 칼럼
  • 승인 2019.07.0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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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와 마리

흐린 날에 비가 내렸다. 피고 난 뒤에 꽃임을 알고 지고난 뒤에 꽃임을 안다고 했다. 비에 꽃잎이 진다. 징조를 알지 못했고 그저 그러려니 한다. 꽃은 피고 지는데 저 곳은 구들을 지피고 누워 있을 것이다. 여름장마를 앞두고 다들 골병이나 몸살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미리 벌린 일 때문에 꽃이 피고 꽃이 지듯 아픈 육체를 두고 타박질이다. 미련한 인생이라는 그 말이 적운처럼 층위를 가진다. 그 때도 미련했고 지금도 미련하다. 그만두지 못하는 관성이다.

그 때 길 옆 높은 곳에 2층 석조 주택이 있었다. 연못의 마당에 지프가 드나들었다. 확장된 길을 지나갈 때 그 곳을 보았지만 흔적도 없었다. 같은 반 아이들과 말도 나누지 않는 큰 키에 드물게 흰 피부는 까맣게 그을린 아이들과 달랐다. 달리기 때 선수로 나왔다. 선생과 말을 나눌 뿐이었다. 썩 공부를 잘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한반에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 초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여부도 모른다. 우리와 다른 아이였다. 많은 아이들은 육성회비도 힘들어 했다. 이름이 마리였다.

학교 도서관은 초라했다. 교실이 부족하여 2부제 수업을 했다. 야간학교와 다른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부족한 시기에 보이지 않는 것도 부족했다. 교회나 성당은 바닥이 마루였다. 염보돈을 낼 수 없는 아이에게는 그것도 먼 이야기였다. 어느 가수가 점심때, 물로 배 채웠다는 말.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비만의 배는 사장님 배로 숭앙받았다. 강이나 들이 아니면 놀 곳은 공터였다. 해가 지면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쫓아냈다. 신작로 둘레로 풀은 자라고, 겨울을 나는 아이들의 손은 얼어 터졌다. 아마도 우리들 마음 어디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걸 겪은 세대나 겪지 않는 세대나. 그 때 일상생활에 흔하게 일본어를 들었다. 그곳을 이루고 있던 철공소 목공소 새끼 꼬던 집과 구멍가게들. 높은 곳의 목장. 굶주리고 방황하고 공간에서 배척당하고 또 부러웠던 것은 무엇이 되었을까.

사실 배열의 조작. 늙은 거짓말쟁이. 괴펠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으로 보다 큰 ‘효과’를 낸다고 믿었던 사람. 상대가 누구였던가. 보이는 풍광과 달리 보이지 않는 ‘마음’ 밭은 어찌 되었는가. 침탈과 전쟁의 흔적 그리고 이어져 오던 멸시와 천대의 황무지. 그까짓 것이라는 식으로 팽개쳐지는 대상인가. 노래 잘하는 그가 가수가 되고 싶지 않는 것도 상식이다. 상식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종교다. 나의 종교는 무엇인가. 들에서 숲에서 강에서 기원하는 시대가 아닌, 우리는 무엇을 염원하는가. 누구에게 무엇을 염원하는가. 염원이 ‘평화’인가. 그러나 마음이 평화롭기를 바란 흔적을 가진 이들에게 갈등을 부추긴다. 지루한 진실의 갈등은 절로 봉합된다. 차이는 크기와 깊이를 키운다. 반면 거짓말은 하나의 방향으로 끊임없는 재생산이다.

보이는 것이 풍성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풍성하지 못하면 그건 비었다. 비어 있으니 흔들리고 중심을 잡기위해 보이는 것에 더 격정적이다. 현실은 한계이다. 흔들리고 기울어지면 홍수와 같다. 홍수는 피해자를 만든다. 언덕으로 산위로 피하지 않는 그들이 희생자다. 낙오한 자와 버려진 자를 또 버리는 행위이다. 거짓말의 반작용은 의식의 아포칼립스이다. 사고하고 판단하는 그 기능의 상실이다. 소설 ‘섬그네’를 떠오른다. 이런 짓을 일삼는 이들이 누구인지. 안식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일본에는 유리라던가 마리라는 이름이 흔했다. 군국주의 후예. 일급전범이 정치를 재개한 나라. 선동의 정치인들. 마음의 상처는 외면하면 할수록 자란다. 파시즘의 도구를 명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는 괴펠스가 아직도 유효한가. 마음이 없으니 가책이 없다. 이것을 실력이나 기술로 여긴다.

감정. 방향성을 가진다. 모든 힘은 방향성을 가진다. 내부로 향하거나 외부로 향하거나. 내부로 향하는 그 감정이 공감을 불러온다. 꽃의 빛깔과 모양을 보고 흔들리는 마음이다. 연예인들의 데코레이션은 보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향을 가진다. 늘 걸치는 작업복은 육체를 보호하는 역할이 먼저다. 내부로 향한 감정은 인간의 깊이를 키운다. 내부로 향한 이 감정이 사실과 논리로 결합하면 완성을 위한 문을 여는 것이다. 조작질. 인간의 역사이고 본성이라는 분도 있었다. 이익을 앞에 두고 조작질을 그만두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니 평화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다. 평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마음문은 이렇게 여는 것이다.

요즘 탁발승은 없다. 아파트 문을 두드려 쌀을 시주받는 탁발은 없다. 탁발이 없으니 탁발승의 마음도 없다. 마음을 찾기 위한 것으로 종교의 상징이 필요한 이유다. 상징이 사라진 종교에서 마음이 분수이다. 솟구치는 분수다. 분수를 가로질러 물탱크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이다. 감정(Emotion)만이 존재하는 두려움이다. 문을 찾지 못하고 ‘성’ 둘레만 뱅뱅 도는 그런 꿈같은 감정이다.

공감은 우울 절망 비참함이 먼저다. 이걸 좋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분수와 같은 감정은 자신이 정당하고 평온하고 정의의 실현인 듯하다. 단순한 동정이기도하다. 분수 같은 감정이 물의 통로로서 내게 남기는 흔적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구성하는 관에 녹과 찌꺼기를 남긴다. 성찰이 없으니 망가지는 그날까지 녹과 찌꺼기는 쌓여간다.

마음은 물과 같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다. 사해는 어떻게 되고 흑해는 어떻게 되었는가. 소금벌판을 본 적이 있는가. 도감에서 보는 꽃에는 시간이 없다. 공간에 머물러 있다. 시간이 상실되었다. 도감에 시간을 밀어 넣으면 꽃은 자라고 시든다. 나의 의식의 공간에서.

산이 푸르다. 냇가에서 손을 씻는다. 작은 물고기는 어디에서 왔는지. 보는 내내 경이로웠다. 그녀가 내목이 까맣다고 한다. 잠자리는 어느새 둥둥 떠다니고 물가의 돌에도 앉는다. 버릇이 되어 힘들다는 말을 한다. 무심코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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