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조작
상징조작
  • 이경달 칼럼
  • 승인 2019.08.12 0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징조작

한국인은 누구인가. 낯설게 출발하여 초원의 길을 따라서 또는 대륙의 어느 길을 따라서 머뭇거리다가 다가온 곳이 이 땅이다. 추운 곳에서 바라본 한반도는 낙원이었다. 이동은 비극이었고 또 발견이었다. ‘신라보검’은 다양한 경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 마음에는 대륙의 추억이 있다. 시베리아 초원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추억으로 어떤 형태의 기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그런 추억위에 이곳의 여름새들. 사방팔방 열린 문으로 그들이 즐겁다. 문 넘어 숲에서 아침 새들이다. 섞여 있는 매미소리다. 드높은 바람소리다.

상징조작. 대중조작. 말로 글로서 사람을 속인다. 자기가 낳은 여섯 명의 아이를 독살하고, 자살하고 그 남편도 자살했다. ‘마그다 괴펠스’이다. 불타서 그을린 그들 시체 사진을 대중조작의 마지막 상징물로 여긴다. 가토 고이치와 노나카 히로무. 그들이 나오던 방송과 신문을 기억한다. 무라야마 담화의 숨은 주역이라는 기사를 여기저기서 보았다. 고이즈미의 선택을 받은 아베의 정치란 별게 없다. 현 일본극우 그 자체이다. 생각이니 미래니 그런 것이 없다. 과거 메이지 시대로의 회귀라는 섬뜩함이다. 인간은 진보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은 퇴행한다.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행동한다.

상징. 이미지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다. 안다는 것은 의식의 과정을 거침으로 형성된다. 그러니 지식은 바탕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아는 체는 동물을 잡기위한 덫 같은 것으로 어떤 추락을 목표로 한다. 그들과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깜깜하고 익숙한 감정으로 추락한 까닭이다. 흔히 산만하고 부주의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의 위험성과 같다. 어떤 말을 할 때 실체가 있는지를 ‘나’는 따진다. 실체가 빠진 그 상태로 인간을 개 잡듯이 ‘행해지는 대중조작’으로서 상징조작이다. 무의식적인 이미지에 말과 글의 의식적인 조작을 행한 ‘악의적인 덧칠’이다.

‘때가 되면’ 스스로를 평가하는 그를 안다. 그러니 그가 ‘조작에 흔들릴 일’은 없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니 하는 그 말은 ’현실에서‘ 그저 조작이다. 상징성에 바탕을 둔 개인의 의미가 아닌 실체가 있는 듯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염치나 예절이 있기를 바라는가. 이들은 그럴 듯하게 인종주의와 결합한다. 유대인 혐오.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혐한발언. 아시아인을 얕잡아 보는 그 행위와 결합한다. 여기에 내부적으로 발생한 일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면 대중조작으로서 상징조작은 완성된다. 과거에 매달려 산다. 너무나 오래된 그때는 신들의 세계였다.

원인은 인간의 성장에 있다. 배우지 않고 생각 하지 않으니 요원하다. 성장. 집중해서 배우고 집중해서 배우는 것이다. 집중하지 않으니 내 안의 타인이 유령처럼 나타나서, 그들 상징조작의 희생물이 된다. 어른들은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 그건 희생물이 아니다. 그저 낚시에 걸린 지렁이에 홀린 물고기다. 인간은 이런 유혹에 약하다. 동물보다 약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역사가 길지 않는 탓이다.

아베정권의 바탕인 일본회의. 일본회의의 한축인 신도. 이들을 찬양하는 한국교회는 일본 신사와 같은 곳인가. 그러면 그들에게 신사참배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2013년과 그 후에 발간된 일본회의에 관련된 서적은 하나같이 일본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나간 정권에서 보인 행태가 책에는 예언처럼 기술되어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혐한집회. 일본청년회. 연호제정. 근대에 생성된 종교집단 출신들. 신도라는 종교단체와 결합. 그들이 무엇인지.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아베정권과 추종자를 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보고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성장하기를 포기한 양철북의 아이 같은 모습이 그저 만족스러운가. 우리도 익숙한 감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지 묻고 묻는다.

도마복음. 읽기가 만만찮다. 읽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이 꽤나 된다. 관련서적이 수십권이다. 한글로 나온 책도 몇 종류가 있다. ‘흔한 신들의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읽지 않는 이들은 읽는 이들에게 그저 같은 말이다. 희한한 것은 여기나 거기 이때나 그 때 내게 던지는 말은 같았다. 그들이 ‘상징조작’을 일삼거나 상징조작의 희생물이다. 말의 그들은 ‘아는 데’에 나태했다. 도마복음의 가치는 여러 곳에서 논의되었다. ‘노고’가 필요한 예수의 어록이다. 오래된 나의 심장을 도려내면 새로운 심장이 돋는다는 말과 같이, 부패한 종교 개혁의 텍스트로 여기는 분들로 있다. 종교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들을 수 있다. 둘레에 읽는 이가 ‘참’ 드물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내용과 실체가 사라진 ‘물화된 종교’이다. 그런 그들이 통제를 떠나 그저 신사참배를 설계한 그들에게 동조하는가.

전체주의 나치즘 군국주의에서 ‘절대’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조작이다. 그런데 조작이 황금보검이다. 부분을 확대하고, 순서를 바꾸고, 임의로 작문하고 스스로를 구세주로 여긴다. 진보하는 사회는 콤플렉스의 인간을 만든다. 조작은 콤플렉스의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면만을 드러내고 있다. 콤플렉스가 마음으로 가는 문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음은 약한 빛과 깜깜한 어둠이다. 극복에 보다 강한 자아가 필요한 이유다. 어둠을 견디는 인내력은 먼저 강한 자아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 인간을 모색한다. 인간이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진화가 역사적이고 문화가 역사적이다. 이것의 부정은 무엇일까. 우민화이다. 대상이 내 앞의 그들이다. 우민화의 사건들이 층위를 이룬다. 중층은 위상을 가진 구조이다. 이런 우민화가 자기 아이들에게 청산가리를 먹이고 독살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아마 생각이 없으니 ‘뭔지 모를 승리’ 같은 환희만이 절로 떠올랐으리라. 외교를 거부한 일본의 침략전쟁은 처음순간에 결정이 났다. 방어하고 모색하는 ‘그 사고력’과 ‘과정의 괴로움’을 가진 측이 승리한다. 정해진 도식이다. 예수의 이야기를 덮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었어도 ‘도마 복음’은 살아 남았다. 온전하게 살아 남아 그 생생한 목소리를 ‘나의 창조력’ 위에 얹혀 준다. 종교가 완전히 바뀌어야 할 때임을 내포하는 듯하다.

이 의미를 생각하고 한발씩 걷는다. 실체없는 허망한 상징조작에 휘둘리지 않는 기본이다. 그리고 나는 무엇인지 탐구한다. 자기 탐구. 자기 피를 자신의 손에 묻힌다. 탐구된 내가 그 짓거리가 뭔지를 알고 인내하고 걷는다. 이럴 때 분명히 보이는 것은 조작을 일삼는 그들의 실체다. 그들과 결별할 좋은 때이다. 거짓말쟁이나 사기꾼과 단호히 갈라서야 할 때이다.

 

- 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