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산 자와 죽은 자
  • 이경달 칼럼
  • 승인 2019.09.1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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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구릉. 낮은 산에 언덕. 저기 큰 소나무와 여기 작은 소나무. 다르다. 작은 소나무는 큰 소나무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다른 나무이고 달리 간섭하지 않는다. 언덕의 죽은 자를 만나러 오는 산자들. 그들은 죽음과 삶을 어떻게 분리하는가.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 누가 분류하였고 어느 곳에서 언제부터 그런 분류가 시작되었는가. 그저 높은 산 낮은 산의 큰 나무이고 작은 나무이다. ‘산자’들은 삶과 죽음을 분리한다. 내게 ‘생명’은 언제 시작되었고 생명은 언제 마치는가. 생명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장성한 자식들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분들이 있다. 부모가 사과한다. 성인이 된 그들을 별개의 인격으로 여기지 않는다. DNA의 부모만이 그들의 모든 부모인양 ‘혹’ 책임을 묻는다. 그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 불법이나 직업윤리를 훼손한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른이 된 자식의 모든 것은 ‘부모’가 관련되어 있다는 발생은 유아적이다. 그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관여된 수많은 요소와 더불어 DNA 페노타입, 그걸 넘어선 문화로서 또 마음이나 영혼을 가진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까닭이다. 진화를 생각하면 인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인원에게 돌려야 하는지. 세상에 떨어진 그 씨앗은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한다. 그래서 경쟁에는 분배라는 장치를 날개의 한쪽으로 갖추고 있다.

백년 후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사회에서 묻는 ‘도덕’이 ‘조금 더’ 체화된 인간의 탄생일까. 종교는 거짓말을 엄단한다. 거짓말한 자기를 돌아보라. 혹 거짓말한 행위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 ‘자신’을 돌이키면 ‘어떤 인간’은 괴롭다. 그건 단단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오소리가 사냥한 그 동물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에서 보는 진화다. 생각하는 인간의 내부에 생긴 의식과 자아, 그곳을 형성해온 역사이다. 마음은 윤리와 도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이 존재한다. 이게 인간의 미래일까. 또 반대의 인간을 본다. 그 뻔뻔한 거짓말과 그 거짓말을 ‘자기의 이익’으로 삼는 부류를. 그저 보기만 해도 양심은 일어나고 양심 없는 그들에게 투사되고 투영되는 괴로움은 어떤 부류에게만 있다.

평등한 사회의 범주. 달리 그들의 특권이 얄궂게 작동하는 현상에 흔들린다. 경쟁사회다. 그런 경쟁을 견딘 우수한 인간이 있다. 똑똑한 인간이 있다. 그래서 우수하고 똑똑한 부분을 배우는 것이고 또 그게 마음의 층위를 형성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만 배운다. 더러운 것은 버리고 아름다운 것을 취하는 것이다. 그게 마음에 형성된다. 배우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지. 답 없는 물음을 한다.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꿈과 기업의 CEO가 되는 것은 다르다. 방향도 다르고 도달하는 곳도 다르다. 부자가 되는 꿈과 평화의 인간이 되는 꿈은 다르다. 현실의 꿈과 또 도달할 수 없는 꿈은 새의 양 날개다. 크고 높이 나는 새가 대륙을 지난다. 알바트로스가 대륙을 지난다. 한 쪽 날개 무게도 엄청나다. 그런 무개를 양쪽 날개에 지니고 새는 난다.

육체를 넘어선 ‘아버지’는 누가 될까. 문화. 어디에서 온 것이고 나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가. 인간 모두에게 있는 ‘살기’는 짐승에게서 받은 본능이라면 문화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나의 부모가 되는가. 자연은 이런 ‘살기’뿐만 아니라 거짓말하지 말 것과 살인하지 말 것을 어디에 담아서 내게 전해 준다. 양심의 가책. 죄의식을 느끼는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느껴서’ 괴로운 것을 남겨준 그가 아마도 ‘아버지’일 것이다. 영혼의 아버지이다. 반면 어머니에게 Great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그건 대지가 된다. 대지로 출발하여 무엇에 ‘죄의식’을 느끼고 빛으로 한 걸음씩 내딛게 한 그들이 아마 나의 ‘부모’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내안에는 머물려고 하는 것과 되돌아 갈려는 하는 것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혼융이다. 인간의 진보는 숱한 모색으로부터 선택된다. 분명한 의식으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 인간이다.

대지로 돌아간 인간은 평안함을 느낀다. 나아가는 인간은 불안하다. 대지에는 죽음이 없다. 뭍 동물이 죽고 뭍 나무가 자라고 또 태어난다. 그건 자연현상의 일부이다. 그러나 개체는 죽는다. 자연에서 태어난 것은 유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괴롭게 세계를 떠돈다. 굶주림에 지치고 낯선 이미지를 두려워한다. 현실과 멀어지면 행복하지만 미친다. 죽음은 의식의 유무이다. 의식에서 도래한 자아를 인간은 가진다. 의식하는 각기 다른 자아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동일성이다. 인간으로서 같고 전체주의자들이 같다. 군국주의자들이 같다.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이 없고 나와 남의 구분이 없다. 같은 말과 같은 행동이다. 그들 모두는 위대하다. 같은 말이다. 그들 중 그만이 위대하다. 그 곳에서 탄생하는 나는 흔들린다. 갈대다.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는 그 뿌리를 자르고 싶다. 그런데 대지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죽음은 의식이 죽고 사는 것이고 의식은 무의식과 분리되지 않는 부분이다. 의식의 죽음은 내가 ‘뭘’하는 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다.

대지 위에 인간이 서 있다. 대지를 부정한다. 과거를 부정한다. 역사를 왜곡한다. 지진이고 물난리고 세상이 뒤집힌다. 인간의 내부에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의식은 무의식과 짝을 이룬다. 의식은 전진하고 무의식은 바탕이다. 이 둘의 관계가 인간의 논리를 넘어선다. 세상에 나와 밝은 빛 아래서 나 아닌 타인의 발견은 경이롭지만 두렵다. 인간의 시작이다. 그리고 수많은 타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 배우기를 버리면 평안이다. 눈을 감고 또는 외면하면 없을 것 같지만 세상에는 나와 다른 숱한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내안으로 깊이 빠져들면 이런 괴로움은 사라진다. 가장 편안한 공간이 자궁이다. 자궁으로 퇴행이 그립다. 현실에서 자기 죽음을 직시해야하는 까닭이다. 용도가 사라진 물건은 걸리적거린다. 그럼에도 물건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깜깜한 숲에서 넘어지고 다치면 돌부리 탓이고 부딪히는 나무 탓이다. 밝은 대낮에 부딪히면 그건 내 탓이다. 캠핑장에서 룰을 지키지 않는 아이를 단호하게 꾸짖으면 사고가 줄어든다. 편들면 같은 사고의 반복이다. 반면 시설이 나쁘고 잘못 선택된 장소를 내 탓으로 돌리면 강가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넘치는 물에 집은 떠내려간다. 인간이 매일 자기 삶을 반추하는 이유이다. 반추하는 동물은 먹고 반추하지 않는 동물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추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류의 지혜다. 걸어야 되는 이유이고 죽음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게 삶을 준 ‘그의’ 이유는 나의 범위를 넘어선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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