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잎
갈잎
  • 이경달 칼럼
  • 승인 2019.11.19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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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리다. 갈잎은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고 떨어지면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보면 우수수 잎이 진다. 갈색 잎이다. 하늘은 잿빛이다. 저녁 어스름에 조금 이르게 벽난로에 장작을 지핀다. 다채로운 붉은 빛과 나무 타는 소리와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피고 진다. 장작이 타는 소리는 빛과 더불어 위로다. 위로를 지핀 것이다. 계절이 진다.

사람들은 자기 나이를 어떻게 인식할까. 그런 내게 젊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참 많은 시간을 일한다는 느낌이다. 잿빛하늘은 그저 객관적인 빛의 세기와 강도만이 아니었다. 그 빛에 투영된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이다. 지금 청년들의 꿈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쉬고 싶고 어떤 이는 자기 일을 찾고 싶을 것이다. 복잡한 전문성을 더 요구하는 시대에 복잡한 전문성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곳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그 때 공장지대의 밤은 밝았다. 다들 가난했던 탓에 고만고만하고 변두리의 집들도 고만고만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자산’이 위력을 보다 더 발휘하는 시대인 듯하다. 청년들은 무슨 의미를 두고 시대를 바라보는가.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가. 산길이나 강변로를 두어 시간 걸으면서 생각할 주제가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다.

11월의 비다. 눈으로 내릴 갈잎의 자리에 비가 내린다. 산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깊어간다. 둘레로 사는 사람이 바뀌어도 변화와 무관한 듯하다. 세월을 저 멀리 둔 어느 신석기 시대의 마을 같다는 느낌이다. 오래된 그들의 무지를 닮아 사는 듯하고 오래된 그들의 고집을 닮고 오래된 그들의 단면을 닮는 듯하다. 빠른 속도의 스마트폰을 들고 그리 지낸다. 이곳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오랜 된 그들에게 진보는 문명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지배하여 움직임이 둔하고 생각이 둔한 듯하다. 여기서 변함없는 것은 무엇이고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 추운 날 따뜻하게 지내면 된다는 이상한 말의 현실인 듯하다.

책임이 사라진 정치인이 구현하고픈 사회가 ‘전체주의’인가. 그러면 책임이 사라진 개인은 무엇이 되는가. 자기 발전은 책임을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것을 도외시한 듯하다. 책임이 사라진 그들을 앞에 두고 관찰해보면 ‘날이 서고 낯선 것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보고 지나기에 껄끄럽다. 이들에게 자연이 거저 제공하는 자기의 치유능력이 작동할까. 책임이 사라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를 공정하게 밀어 올렸던 동력의 흔적이라도 있을까. 이유 없는 두려움이 이면에 깔린 것이다. 책임이 사라진 과정을 보면 보이는 ‘현실’이다. 어디로 가는 지 혼자 반문한다.

말을 아예 듣지 않는 그에게 묻는다. 예수 주검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 세미나의 ‘도미니크 크로산’이라는 신학자의 상상력을 가지고 내가 묻는다. AD30년 전후의 로마와 그들 관할지의 역사에 무관하니 단 한발도 나서지 못한다. 어떻게 되었을까. 기도하면서 뭘 달라고 하는 ‘사고의 원형’은 시베리아 샤먼에게서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예수 주검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물음이 온당하려면,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불어 그들이 말하는 경전의 진실이라는 표현 아래 숨겨져 있는 것을 성찰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애시당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무엇을 의미할까. 묻는 내가 섬뜩하다.

꽝꽝 언 나무는 도끼가 잘 먹힌다. 잘 갈라진다. 추운 날이 괴로운데 장작 팰 날만 받아 놓는다. 일이 머리에 있으면 그것만 생각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나머지는 다 사라진다. 그건 내 머리에서 그런 것이고 세상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어디 장작 패는 일뿐일까.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앞만 보고 운전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겨울은 귀가 어는 것과 장작을 패는 맛과 또 지치는 근육의 기묘한 조합이기도 하다. 여름날 조그만 장작을 쪼개는 일이 있다. 겨울은 어쩌면 장작을 패는 일이 마약 같은 ‘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힘든 일의 이면이 이렇게 구성된 것이 아닐는지 갈잎은 지고 갈잎 위에 비오는 날의 생각이다.

사과 한 알과 사과 한 알은 범주에서 두 알이 된다. 한사람과 또 한사람이 두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엄격한 범주이다. 1%의 부자 한사람과 1%의 하위 한사람의 평균을 낸 소득에서 각기 한사람씩 두 사람은 존재한다.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인가. 한 컵의 설탕과 한 컵의 소금과 한 컵의 물이 섞이면 어떻게 될까. 농약 한 컵과 제초제 한 컵은 어떤가. 사랑을 케미라 부르고 우정과 화합도 케미라 부른다. 케미는 케미칼 곧 화학의 약칭이다. 물리적인 특성을 넘어선 어떤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다. 삶은 케미칼이다. 단순한 더하기 빼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물의 대한 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르다. 한편 같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분노를 그냥 분노라는 단어로서 사용된다면 그러하다. 이건 그저 말이다. 왜곡과 과장이 깃들어 있다. 이런 말이 범람하는 듯하다. 범람은 통제를 넘어설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에 책임이 사라지는 현상을 보는 요즘이다.

사기꾼을 만나서 말을 나눈 적이 있는가. ‘그는’ 그 유치하고 졸렬한 그 말이 상대에게 통한다고 생각하고 말을 ‘퍼 나르고’ 있었다. 내린 비가 장독 위에 남아 내일이면 얼어 있을 것이다. 계절의 상식이다. 마음에 평화를 담고 힘든 현실을 즐거이 걸을 수 있을까. 그런 그들이 권하는 것은 ‘진정성의 인간’이다. 도마복음. 마음속에 아버지의 나라를 담고 세상의 변방에서 공동 식사를 했던 그를 기억한다. 현대 심리학의 궁극의 ‘그’라는 생각이다.

영화의 날씨가 일상이 될 것이다. 잎은 떨어지고 계절의 우울이 찾아 올 것이다. 겨울은 반드시 춥거나 늘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밤은 깊어지고 먼 곳의 가로등은 더욱 길게 켜질 것이다. 산돼지를 향하던 대포소리는 끊어 질 것이다. 그리고 안도의 긴 휴식과 또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신석기 시대의 마을이 되고 사람들은 그 때의 마음으로 돌아 갈 것이다. 그때 눈이 내리면 큰 눈이 내리면 눈을 쓸기 위해 뻘뻘 거릴 것이고 그 감정도 신석기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마도 ‘혼자’ 골똘히 생각할 것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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