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그냥 오지 않는다
12월은 그냥 오지 않는다
  • 이경달 칼럼
  • 승인 2019.12.1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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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서 미끄러진 발에 부기가 남았다. 쉽게 낫지 않는 육체가 되었다. 무슨 꿈을 안고 희망을 안고 바라보았던 12월이다. 바라던 12월은 그냥 오지 않았다. 계단 난간을 만들고 저 쪽의 철물을 치우고 가득한 장작을 패고 무릎에 옹이가 박히고 몸에서 땀에 젖은 쉰내가 난 뒤에 다가선 것이 12월이었다. 바라던 12월은 이것만은 아니었는데 그런 후회다. 후회는 추억이다. 12월은 추억을 남기고 다가왔다. 읽을 책이 책상에 수북하다. 책은 글자도 아니고 문장도 아니다. 메모지와 함께하는 책이다.

12월 볕은 짧다. 창을 넘어 오는 그 빛이 가지는 위력이 희미하다. 창틈과 벽장 책장 모든 곳에 스며있던 벌레소리가 사라졌다. 열어 둔 창문을 넘나들었던 무수한 소리가 12월에는 없다. 그 공간을 까마귀가 난다. 검고 윤택한 소리를 내면서 펄럭이면서 난다. 마당 전신주에 가끔 앉아 있던 그들이다. 짝을 이루어 나타났다. 장성한 아이는 도회지 어느 곳에서 또 그곳이 세상인양 바쁠 것이다. 벌레소리 끊어진 공간에 까마귀가 날지 않아도 그는 12월임을 실감할 것이다. 그저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저 그런 그들에게도 12월은 그냥 오지 않았다. 일에 지친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잎을 떨군 나무는 무엇이 되는가. 산에 조림된 나무가 그득하다. 잎들은 떨어지고 잎들을 떨구어 내고 또 마른 잎들이 매달린 채 그들은 흔들리고 있다. 사철 잎을 가지는 그들보다 아마도 ‘관념’으로는 덜 흔들릴 것이다. 어찌 잎이 떨어지는 나무가 있고, 푸른 그 빛을 간직하는 나무에 대한 설명은 ‘사이언스’는 하고 있다. 그러나 ‘보는 내’게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감정이 나무를 보기 때문이다. 감정이 나무를 보고 감정으로 떨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는 잎을 본다. 관찰과 달리 감정으로 12월의 나무를 본다. 곧 세상은 가장 낮은 빛을 가질 것이고 계절에 부는 바람으로 흔들리면서 봄날 움텄던 작은 연두의 빛을 기억하지 못해도 12월은 그냥 오지 않는다. 나무에게 묻는다. 그러나 그는 바위같이 흔들리지 않는 감정임으로 ‘아마’ 내가 그로부터 12월에 관한 무엇도 듣지 못할 것이다.

12월에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을 목숨처럼 여기는 그를 두고 만나지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12월은 때가 되면 12월이었다. 날이 조금 따스하거나 눈이 무릎까지 내려도 12월이었다. 그는 목숨처럼 12월이었다. ‘나’는 이때면 작정했던 무엇을 ‘지금’ 머뭇거린다. 죽은 자의 무덤을 찾아가고 죽은 자의 살았던 때를 추억하고 그 추억에 울적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무디어지고 우울한 마음이 무디어진 내가 그의 무덤 앞에서 저 멀리 무덤을 두고 ‘그저’ 생각에 빠진다. 목숨처럼 여기던 그것이 감정이고 감정을 솟아나게 한 추억이었는데 희미해졌다. 그런 12월은 이렇게 왔다. 변치 않는다는 것은 ‘유아적인 감정’뿐이다. 12월은 그런 상징이기도하다.

며칠을 앓았다. 12월에 앓는다. 그때는 앓아누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앓기만 했다.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꽃피는 봄날의 꽃은, 꽃이 내린 분명한 이유이다. 여름 더위에 지친 날의 끝에서 지친 날이 근육이 되고 또 마른 땀이 되고 젖은 머리칼이 되어서 12월에 몸살을 앓는다. 침대와 이불이 땀 범벅이 된다. 방 안이 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육체의 시간은 다시 멀쩡해진다. 소생을 위한 조건은 갖추어졌다. 나무도 앓아눕고 벌레들도 사체만을 남기고 추억의 소리만 남겼다. 숲과 들은 그들이 잠든 곳이기도 하다. 사체가 모두 으스러지면 그들은 또 소생하는 쌀쌀한 봄날이다. 12월은 앓고 바스라진다. 그냥 오지 않는 소멸의 때이다. 나무의 나이테가 단단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면 받는 포장지에 싸인 선물이다. 모든 선물은 포장되어 있다. 포장지와 포장에 필요한 다양한 끈과 그리고 데코레이션이다. 포장박스가 있기도 하고 그냥 봉투에 담겨져 있거나 비닐에 둘둘 말려 있는 것도 있다. 대개는 봉투에 상자에 정중하게 넣어져 있고 잘된 포장지의 데코레이션이다. 수취인은 ‘나’이다. 보는 순간 받는 순간 설레인다. 각진 상자가 아니라도 바람은 지나가고 바람은 휘몰아친다. 포장지는 내용을 조작할 수가 있다. 다른 내용이라도 같은 포장 방법을 쓰기도 한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있거나 또는 알 수 없다.

내용에 무관하게 선물의 포장은 추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련한 기억으로 빈 들판에 혼자서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이 분다. 얇은 옷에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가로질러 흙길을 걷는 그 추억이다. 얇은 옷만큼이나 허기진 배를 안고 살던 시절에 사람들은 빈 들판이 그저 빈 들판이었던 때의 추상이다. 그 때 보이는 화사한 포장지는 내용물과 무관하고 따스하고 맛있는 먹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빠르게 강렬하게. 포장된 물건은 무엇을 담고 있었다. 내용물을 알아보기 전에 들리던 개짓는 소리와 작은 초가집들의 풍광이다. 마찬가지로 포장지는 또 다른 무엇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곳의 그들은 포장지를 뜯지 않고 선물을 보관하였다.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아보지 않고 환호하는 그들은 그저 선물은 포장지와 포장박스였다.

또 선물은 싸움을 불러 일으켰다. 내용물에 무관한 내용이나 나 아닌 그에게만 왔다는 어떤 충동성이 사람을 밀어내서 불쾌한 감정이 전면에 서게 했다. 선물은 전쟁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포장지는 그 전리품을 상상시키기도 했다. 한편 내용물과 무관하게 허허벌판이나 눈 쌓인 산촌의 고갯길을 넘어가면 무언가 있을 듯하고 산촌의 고갯길을 건너갈 수 있다는 그런 징표가 포장지에는 있었던 듯하다.

선물은 무엇인가. 12월 바람이 흔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12월 바람 아래 무엇이 ‘움직이고 있을까. 그건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벌어진 일이고 또 벌어진 일이 미래의 빛으로 따스한 온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과거가 추억이고 과거가 미래인 그런 내용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 12월은 그냥 다가 온 것이 아니다. 굶주림과 원망이 변모되어 풍성함과 따스함을 염원하는 것이 날개의 짝을 이루고 있겠지. 그러니 12월은 그냥 오지 않는다.

언어로 포장되고 규격화된 달력의 포장방법을 넘어선 12월은 그 내용으로 어떤 과거와 미래의 추억을 담고 있다. 그러면 12월은 내게 무엇이 되는가. 포장지를 뜯고 포장박스를 여는 방법은 아마도 이런 오래된 추억과 오래된 추억이 다시 미래가 되는 감정, 곧 나의 과거와 미래를 만나는 것이다. 책이 뭔지. 입고 다니는 외투가 뭔지. 그냥 오지 않는 12월은 무엇인지. 해가 일찍 떨어진 날에 누가 온다는 기대감에 스며있는 색깔은 무엇인지. 어쩌면 추억과 감정이 구체화되는 현상은 시시각각 영화의 화면과 닮았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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