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 그리고 R0와 수리적 모델
사이비 종교 그리고 R0와 수리적 모델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03.24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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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 그리고 R0와 수리적 모델

죽음이 없다고 한다. 죽음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의 생각의 방향과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 말의 패치다. 분열이다. 상식의 눈은 허망함 몰상식함 그리고 무지와 일상에서 동떨어진 무엇을 ‘섬뜩하게’ 본다. 그들은 의기양양이다. 그들이 분열이다. 현실과 분열되는 것이다. 치매의 과학적 증거는 희미하다. 의식이 이렇게 멀어져 가는 현상은 흔하다. 곧 과학적 이유 없이 나타나는 이 분열이 어쩌면 치매로 여겨진다는 것과 치매로 여겨지는 많은 것이 분열로부터 출발된 것일 수 있다. 자기를 부정하고 나에게 존재할 수 없는 그것을 ‘믿음’이라는 말 아래 숨는 것이다. 현실에서 새가 먼저 날아 갈 그런 천국은 없다.

R0. 전염병 전파속도를 나타내는 수치이다. 지리 교통망 사람의 이동수 공간의 구성등을 고려해서 ‘계산’하고 ‘계산’한다. 같은 전염병이라도 인구밀도와 교통망이 덜 발달된 곳은 낮은 수치이다. 빅데이터는 신뢰도를 높인다. 도시와 상가와 인구밀도를 두고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서 비슷한 수치가 나타났을 것이다. 사용되는 모델은 이미 개발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의 R0’는 초기 방역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더불어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수리적 모델이다. ‘어떤 전염병’은 3차원 공간에서 시간추이에 따라 나타나는 ’어떤 그래프‘이다. 이것을 알기 쉽게 여러 개의 2차원으로 변환한다. 2차원 평면으로부터 조치할 이런저런 정책들도 보일 것이다. 수많은 시뮬레에션이다. 이런 바탕에서 보이는 ‘말’은 드물다. 이와 무관하게 그저 ‘말’의 패치이다.

수리모델.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분들의 컴퓨터에 그런 프로그램들이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결론을 내린다. 한두 곳의 데이터나 한두 곳의 연구소의 검증을 통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현실은 유한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국가전략이나 외교관계를 정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책’은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실제의 경우는 오차가 가지는 의미와 정책의 유용성 때문에 보다 더 복잡하고 보다 다층적인 확인을 거칠 것이다. 그러니 질병본부의 내용을 넘어서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덤으로 PCR검사법은 1,980년대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 바이러스 관련 책은 설명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대충 이해된다. 아이디아가 무척 풍부한 방법이다. 뜬금없는 항체는 ‘말’이 가지는 공격성이다. 의도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시작된 내용일까. 내용이 유령 같다.

약한 증상의 확진자를 위한 의료서비스는 어떻게 제공되는가. 연수원은 소유가 각각이다. 아마 정부와 민간간의 협의를 거친 듯하다. 더구나 의료의 거점이 되는 병원에 대한 적당한 ‘대가’의 지불은 반드시 약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메르스 때를 보면 안다.

R0와 수학적 모델은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어떤 국가는 관광이 가지는 ‘돈과 생활’을 분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책의 한계다. 더구나 낙관했을 수도 있다. 무엇을 낙관했을까. 현실에서 존재하는 죽음을 ‘없는 죽음’으로 만드는 ‘육신의 부활’이라는 기묘한 논리가 비뚤어지게 작동한 것이 아닌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죽음이 현실에 드러나면 아마도 패닉일 것이다. 분명 지워버린 것이고 쫒아버린 악마 같은 죽음인데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보지 않는다. 주검도 보지 않는다. 죽음과 주검을 보지 않는 자들이 칸막이 건너편의 죽음과 주검을 생각한다. 그러니 더 패닉이다. 상담의나 상담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러저런 사정을 생각하면 질병본부에 다양하게 협력해야한다. 그들이 객관성의 담보이기 때문이다. 투명성은 정부와 국민과의 신뢰이기도하다. 그래도 ‘그들’은 말을 만들 것이다. 사이비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와 닮았다. 책임이 없고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이 참 조용해졌다. 새들과 그 때처럼 날아다니는 비행기. 불조심을 방송하는 트럭과 햇빛을 즐기는 고양이들. 가지는 물이 오르고 연해졌다. 버들의 솜털과 봄이면 칼바람 소리를 내는 계곡. 그러나 다니던 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소리 들리지 않던 산에 그리고 작은 들에 어른들 소리도 아련하다. 그 가운데 일어서는 소리다. 이건 봄싹만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마스크. 건강한 보균자. 상대에 대한 예의이다. 건강한 보균자의 가능성이 사회에 잠재되어 있다. 이들이 마스크를 착용한다. 그라인더로 나무나 돌을 갈아내는 내게 마스크는 일상이다. 건강한 분들이 마스크를 끼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일상으로 흐르는 첫발을 디디는 단계이다. 사회적 진화다.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곧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자신의 어둠을 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사회적 긴장이 요구되는 곳에서 무심한 모습이나 과학적 사실과 무관한 황당한 치료법에 의존하는 자기를 보고 ‘무엇’이 내 안에 있는가를 숙고하고 숙고할 때이다. 모색할 때 나타나는 황당함의 뒷면에 ‘무엇’이 작동하는지 묻는 것이다. 긴장을 잘 견디지 못하는 ‘자기 불안’을 ‘말’의 성벽 안에 숨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의 벽 뒤에 숨는 존재가 아닌지. 숨는다면 ‘무엇’이 숨게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행위를 인정’하는 초보단계를 거쳐야한다.

사이비 종교의 그들이 정상생활로 돌아올까. 곧 죽음이 존재하는 삶이 가능할까. 살아 있는 자에게 영원한 숙제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절망하고 우울하고 그리고 한발 내딛는 ‘안도’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을까. ‘내’가 종교적 교리에 의해 부풀려진 그것은 망상임을 알 수 있을까. 현실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이 주마등처럼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을 감내해야한다. 할 수 있을까. 쇠퇴해 버린 전전두엽이 살아나고 부풀려진 편도체가 줄어들고 작고 조그마한 일에 즐거움을 찾는 행위가 가능할까. 아이들의 전래동화책이라도 다시 손에 들 수 있을까. 자기결단이 필요하고 자기 결단이 내려져도 ‘옛적 팽개쳐 두었던 불안’을 등에 업고 한발 내디딜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서 해보는 삶이다. 바람처럼 시간이 흐르고 호사한 거리의 차와 잘생긴 남녀의 거리를 무심히 걸을 수 있을까. 벼랑의 끝에서 낯선 자의 움직임에 편성해서 내가 여기에 서 있다는 절망감에서 결단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결단해야한다.

하늘이 맑았다. 맑은 하늘아래서 일한다. 일은 허무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보면 손질되어진 말끔한 모습이다. 봄날은 시간의 기점이다. 상실된 시간이 다시 그 바퀴를 돌린다. 죽음을 산자의 시각이 아니라 죽음의 시각에서 보지 않으면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영혼의 발견이다. 내가 있기 전부터 있어 온 그 영혼을 발견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의 시각이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이 관련을 맺고 있다. 죽음과 삶이 연결되고 너와 내가 연결되고 봄날과 산비둘기가 연결되는 그런 집중의 시각이다. 극복에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봄날은 그런 긴 시간의 시작이다. 인간의 늙음이 당연한 이유이기도하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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