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빛의 낮에도 어둠의 밤에도 자란다
나무는 빛의 낮에도 어둠의 밤에도 자란다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04.28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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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빛의 낮에도 어둠의 밤에도 자란다

 

나무의 봄은 자란다. 나무의 겨울도 자란다. 나무는 빛에도 자라지만 어둠에도 자란다. 어둠 속에서 나무는 다른 나무가 된다. 나무는 빛에서도 자라 다른 나무가 된다. 도회지의 그늘에도 화분은 있고 산동네 계단에도 작은 풀은 자란다. 빛이 있음으로 자라고 빛이 있음으로 어둠이 있다. 꽃은 어둠에도 핀다.

코비드-19로 움추렸던 이들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일상은 무엇이고 일상의 일탈은 무엇이 되는가. 이번 기간을 그냥 귀찮은 것으로 흘러버리지 않는 ‘개인’은 무엇이 될까. 이탈하고픈 내용이, 현실이 아닌 ‘어떤 사건’이 지평처럼 깔려 있는 낯설지만 결코 낯설 수 없는 풍광인가. 인간의 꿈이고 또 인간은 꿈이다. 코비드-19 결과물이 개인에게는 무엇인지 물어 볼 때이다. 격리와 거리두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또한 병실을 오갔던 사람들은 무엇을 배울까. 안도의 뒤편에 서서 다시 그 병실로 돌아가고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실이 가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그 못지않기 때문이다. 그 병실을 나와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걷는 사회가 ‘어쩌면’ 눈에 들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통에 피는 꽃’이라는 말은 인간 성장의 상징이기도 하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말과 행위와 둘레의 풍광은 그 사람이 나아갈 길의 빛이 될 수 있다. 잊고 싶다. 그러니 그 현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공포가 어른거리고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상황을 생각하면 나의 죽음을 느낄까. 인간은 이런 일로써 진보한다.

0416-추모. 역사는 마음에 쌓이고 인간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뭔지 의식하기가 당사자로서는 ‘참’ 어려운 일이다. 사건은 쓰나미가 해변을 쓸고 가듯이 인간 ‘마음’을 휩쓸고 간 탓이다. 그걸 조금이라도 객관화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분노와 짝을 이루어 절망하기 때문이다. 일어선다는 것은 ‘내’가 절망한 것과 그리고 절망한 ‘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다시 현실에 까칠한 현실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저녁 종소리.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소음이 되고 짜증이 되었다. 저녁 종소리 그런 노래가 있다. 노래에는 그리워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종교는 고통에 피는 꽃이라 하였으니 그 병상의 그들과 지금 자가 격리한 그들이 꽃이 된다. 그 꽃은 쓴 향기를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나 결코 떨어지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있으나 가냘프지 않다. 스스로 피는 꽃이 될 것 같은 예감이기도 하다. 바람 많은 언덕 집에서 예감에 젖는다.

풍경소리 요란하다. 많은 수의 풍경이 집 둘레의 바람의 존재를 전해준다. 밤에 울던 소쩍새 저녁에 들리던 뻐꾸기 아침의 휘파람새. 새들은 봄이다. 우리 안에 새들이 산다. 우리 안에 꽃이 피고 우리안의 그 낙원에 안착하고 싶다. 새들은 뜬금없이 소리를 낸다. 새들은 뜬금없이 소리를 내고 부스럭 거린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 소리다. 꽃다지가 땅바닥을 물들인다. 하얀 민들레는 망울이 졌다. 분홍의 도화와 흰 배꽃이 호사스럽다. 마당의 빈틈에는 녹색이다. 그런 봄날 저 먼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한다. 거리두기가 해제되면 가족을 만나겠다는 연락이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4월이다. 거친 황무지. 불모의 땅. 이웃한 도로는 동해로 간다. 휴일이면 도로의 풍광을 지나 동해로 타인들이 간다. 바다의 동해다. 가는 길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좋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해제가 풀리는 어느 날 나도 그 바다가 보고 싶다. 아마 그 바다는 내 마음의 바다와 닮아 있을 것이다. 그 바다에서 무엇을 할까. 많은 이들은 바다를 보고 그저 감탄한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회를 생각하고 낚시를 생각하고 그리고 난데없는 고향을 떠 올린다. 즐겨 가던 곳에 해맞이 공원이 있었다. 그 곳에서 바다를 보고 저녁별이 떠도 그곳에서 바다를 본다. 젊은 그 때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나이를 먹지 않고 바다를 본 자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바다는 마음의 시작이고 바다는 마음에서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이 출렁이면 바다도 출렁인다.

만남이 뜸하다. 그와도 뜸하고 그녀와도 뜸하다. 다들 코로나가 끝나거든 보자는 말이다. 약속이다. 뜸해진 공간에서 일의 틈에서 소리를 듣는다.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잎이 부딪히는 소리다. 고양이 형제는 마당에서 바쁘게 뛰어논다. 말을 알아듣는 체를 하는 것은 무언가 부탁이 있을 때이다. 배가 고프면 야옹이고 심심하면 야옹이고 털을 빗겨달라고 야옹이다. 그리고는 약간 알은 체로 그들은 적당히 근처의 자리를 차지한다. 발밑에서 부비는 그들이 위험해 비키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위험하다는 말은 모른다. 놀라면 피한다. 아직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이유는 ‘추위’에 저항력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봄은 낯선 코로나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봄. 아마도 봄을 걸식하는 무엇이 내게 있는 듯하다. 밥을 빌어먹듯 거저 얻으려는 이 걸식성은 나와 나무 사이에 있고 나와 바다 사이에 있고 나와 계곡의 바람 사이에 있다. 무엇이 내게 봄이 그리운 것인지. 상군(湘君)의 임 같은 것인지. 사랑도 걸식이고 무엇을 바라는 것도 걸식성의 단면인지. 구름이 흘러간다. 구속 같은 둘레를 털어버리고 무언가 억압하는 듯한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를 털어버리는 그런 봄을 아마도 ‘술’에 취하고 ‘춤’에 취하는 그런 봄으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뭔가를 원하고 있는 코비드-19의 어떤 날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을 것이다. 거리를 두면 객관성을 조금 더 획득할 수 있다. 자기에게 거리를 두면 어떨지 봄바람처럼 휘날리는 희망이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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