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 - 이미테이션
흉내 - 이미테이션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05.26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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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 이미테이션

 

무엇에 바빴는가. 백만 송이의 꽃들이 순식간에 졌다. 흰 꽃들이 땅에 떨어져 노란 빛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비가 와서 떠내려갔다. 더러는 밟혔다. 연약한 탓이라 흔적이 없다. 다시 송화다. 노란 그 빛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몰라도 이때쯤이면 나이에 맞게 기침을 한다. 코비드-19. 계절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수십만 송이의 노란 꽃을 보면서 겨울이 모진만큼 꽃은 끈질기게 피는 것을 실감한다. 분홍의 산 벚꽃을 보았다. 어디에서 왔듯이 그리로 갔다. 봄은 죽음을 대적한 흔적으로 모질게 꽃을 피우고 그리고 진다. 그러나 필 꽃은 아직도 무수하다.

어린아이들이 흉내를 내면 어른은 대개 꾸짖는다. 흉내의 대상이 마땅찮기 때문이다. 무엇이 흉내 짓는가. 금기의 저편 윤리의 저편이다. 나이든 사람이 흉내를 낸다. 말을 건네기가 어렵다. 내게 그 흉내가 섬뜩하기 때문이다. 유행이 거리를 지날 때 비슷한 모습의 그들이 아마도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메르헨의 베르메르’. 흉내의 미술도록을 보는 이들은 그들에게 경멸이다. 흉내는 급작스럽게 무엇을 얻기 바라는 ‘본능’이다. 사회와 윤리는 금하기 때문이다. 조작이 흉내로 흉내가 흉내로 그리고 흉내가 진품인양 티를 낸다. 흉내의 티는 뻔뻔함이다. 티를 내는 그들은 뻔뻔하다.

내가 태평양을 보았다. 내가 태평양이 되는가. 내가 미술관에서 천년을 지나온 수목형의 금관을 보았다. 내가 금관이 되는가. 내가 유명한 누구를 본다고 내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폐쇄된 유럽의 관광지를 본 것이 내가 그곳을 건설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나친 감정의 그들은 본 것과 일체가 된 듯하다. 심지어 그들의 숭배자도 생긴다. 그저 즐거운 볼거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그들은 본 것과 어떤 일체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에는 황금 성전이 있다. 그 황금 성전을 본다고 내가 ‘위대’해 지는가. 명상이라는 것이 흉내를 넘어 ‘스스로’ 위대해지는 일도 벌어진다. 흉내는 배우는 것과 다르다. 배우는 것은 길고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흉내는 충동적이고 빠르다. 내용이 흉내니 설명이 없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타인이 채운다. 흉내는 나를 타인으로 채우는 행위다. 힘들었던 과정은 안도이다. 흉내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

무한한 흉내의 대상. 흉내의 끝은 분명하다.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옷을 흉내 내고 그림을 흉내 내고 음악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서 어떤 종교 교주를 만난 것을 자랑과 흉내다. 같이 종교단체에 다니던 그들을 흉내 낸다. 이미테이션의 삶은 경멸의 대상이지만 흉내의 출발은 스스로 괜찮은 듯한 감정이다. ‘흉내의 대상’은 거저 징검다리이거나 참조물이다. 흉내 내던 그들을 돌아보라. 섹슈얼리티다. 흉내는 정신의 하강을 가져온다. 정신의 하강은 한편 즐겁다. 물론 즐거운 체도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는 말과 달리 형태의 흉내는 내용의 몰락이다. 없는 내용이니 불안이 채워진다. 흉내를 낸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흉내는 의존이다. 배워서 자기 그림을 그리거나 집을 짓는 사람들은 과정의 불안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혼자 걷는 외로움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짝을 이룬다.

생각은 어떠한가. 아는 체와 흉내는 사촌이다. 섹슈얼리티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물의 접근 방법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생각이다. 이 생각도 흉내다.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요렇게 된다는 흉내다. 굴곡진 세상에서 범주를 넓히면 그런 일은 없다. 배우는 과정은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걸어가니 미완이고 늘 걱정이다. 종교가 자기마음의 탐구라면 흉내는 타인의 마음을 획득한 체하는 것이다. 흉내는 타인을 향한다. 길을 걷다가 본 아름다운 풍광은 거저 흘러가는 것이다. 흉내로서의 풍광을 보면 본 내가 위대해지고 운이 좋은 대표적인 은혜의 사례가 된다. 흉내는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의식의 세계가 아닌 낯선 곳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니 흉내의 삶에서 일어서서 다시 성장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참’ 꿈같은 일이다. 무의식에서 일어서는 데 필요한 긴 시간과 노력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흉내를 벗어나는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득하다. 흉내의 시간이 긴 탓이다. 흉내는 자기 함정이 된다.

자기에게 물어보고, 물어 볼 일은 ‘삶은 무엇이고’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내가 흉내 짓는가. 물어보고 물어 본다. 그들이 가진 창의성을 나는 가지고 있는지 물어 볼 일이다. 물어 보면 내안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좋은 약재를 모두 넣고 달이면 어찌 될까. 이건 세상의 것을 흉내 내면 어찌 될 것인가와 닮아 있다. 좋아 보이는 향신료를 듬뿍 넣고 끓인 스프는 어떨까. 종교를 흉내 내고, 책을 흉내 내고, 교주를 흉내 내고, 스타일을 흉내 내고, 그림을 흉내 내고, 인테리어를 흉내 낸다. 인생도 흉내이다. 아마도 흉내의 예언자와 흉내의 착한 사마리아 인이 세상에 좋은 것을 모으려고 노력한 흉내의 공간에서 삶을 마치는 것이겠지. 삶의 하이어라키 정상에는 창조성과 도덕성이 자리 잡고 있다.

고양이 두 마리가 기와지붕에 올랐다. 한 마리를 따라 한 마리가 오른 것이다. 곧 한 마리만 오를 것이고 어느 날 두 마리 누구도 오르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의 자율성이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아니다. 한 마리는 재주를 피워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지만 한 마리는 어림없다. 고양이도 흉내를 내다가 그만둔다. 이유는 야생의 그놈들에게 물어 볼일이다. 아마 재미없는 탓과 별 소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떠나갈 그들이다. 요즘 마당 그늘에서 잠을 잔다. 잠을 자는 곁을 지나면 목을 돌려 유심한 관찰이다. 흉내의 이들은 이런 관찰력은 없다. 분명한 것은 흉내의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을 흉내 낼 뿐이다. 흉내의 그들에게 사실과 대면할 진실의 용기는 없다.

아이들은 흉내를 내고 자란다. 그리고 자기의 삶을 찾는 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도 있다. 말을 배우는 과정은 단어로 부터 단문으로 그리고 문장으로 문맥으로 건너간다. 성장하면 방대한 것을 통합한다. 이때는 책 한두 권이 문제가 아니다. 방대한 내용을 두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래도 책보다 큰 인생이기에 의문에 답은 없다. 아이들의 참고서에 요점정리가 있다. 요점도 정리되는 것인지.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단어’ ‘짧은 문장’ 그리고 ‘비뚤어진 결론’을 본다. 흉내는 지루하다. 흉내는 반복이다. 흉내는 공격성을 내포하고 스스로 대단한 듯한 ‘체’를 가지고 있다. 질병본부의 발표를 들어보라. 지루한 무엇을 넘는 전문지식이나 행정이 어떤지 조금은 상상이 되고 감탄도 있다. 반면 흉내의 그들은 어떤지. 흉내는 타인의 삶을 빼앗고 나의 삶도 빼앗아 간다. 흉내에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흉내는 자기 삶을 도려내는 것으로 끝날까. 그들은 현명한 것과 성실한 것을 빈정거린다. 흉내는 곧 도달할 것 같은 착각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동력으로서 좋은 시스템의 무력화를 노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흉내는 머무는 공간이 동일하다. 그러니 부패한다. 사회의 건강성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향할 때이다. 자기 삶을 거짓으로 채우지 않을 터이니 사회가 진실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코비드-19를 둘러싼 나의 태도는 어찌 했는지 물어 볼 일이다. 유월에도 꽃은 필 것이다. 죽은 자와의 갈등에서 꽃은 핀다. 꽃은 다양한 색을 가진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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