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는 것- 존재하는가
아름답다는 것- 존재하는가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06.2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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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는 것- 존재하는가

 

구름이 꼈다. 하늘은 낮아져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비에 밤나무 꽃이 진다. 새로 자란 풀 위로 떨어진 꽃들이 화사하다. 비온 뒤의 습기와 어울린 탓인가. 새 소리 바라는 고요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지는 서녘 하늘을 볼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이르게 잔 탓인가. 거리에는 사람들이고 산에는 새들이다. 산에는 나무가 그득하고 들에는 푸른 잎들이 촘촘했다. 왜 그들은 여태 곡식을 심었는가. 빈 들을 본다. 연유를 가지고 봄부터 빈들이다. 논이 비고 밭이 비었다.

아름답다는 것. 미학에서 무수히 다룬다. 존재하는 것인가. 그저 말의 이런 저런 조합인가. 그림을 그리는 학생에게 미학을 가르치는 그는 경멸을 당한 적이 꽤나 많다고 전했다. 그들에게 풍성하게 인용되는 말은 식상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는가. 글씨나 그림을 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본질은 무엇인가.

얼어붙은 거리를 냉엄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누구도 없이 모자를 손으로 누르고 외로이 걷는 길이다. 모든 상점은 불이 꺼졌다. 어느 시인은 ‘그가 경험한 미’라고 했다. 유럽의 쇠락해가는 거리가 아니다. 어떤 까닭으로 문 닫은 스키장이 있는 마을 풍광도 아니다. 이 거리는 어디에 있고 ‘모자를 손으로 누른 자’만이 그인가. 인간의 마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를 심층이라고 부른다. 이 풍광은 아마도 그의 심층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어디에서 온 모든 것은 또 어디로 간다. 그 풍광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단지 심층의 스틸사진은 아닐 것인데.

세상일에 스틸사진은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컵의 물을 바닥에 버리면 어찌 되는가. 버린 그 물은 어디에서 왔는가. ‘전전두엽’의 기능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하는 물음은 동물과 구분되는 부분이다. 해부학의 유일한 차이가 전전두엽이기 때문이다. 전전두엽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그저 알려준다. 그러니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동역학이다. 인간마음은 흐른다. 머물지 못하는 인간마음이 어디서 왔는가. 흐르는 인간들의 당연한 물음이다. 도시도 흐르고 꿈도 흐르고 마음의 풍광도 흐르고 강과 바다도 흐른다. 죽음도 흐르고 기억도 흐른다. 마음이 흐르기 때문이다.

영혼과 더불어 사는 육체라면 영혼의 부활을 육체의 부활로 여긴 오래전의 사람들이 있었다. 과학은 영혼을 제거해 버렸으니 부활은 없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 사람이 있었다. 윤회는 재탄생이다. 죽음이 있고 탄생이 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걷는 것과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 나오는 것은 괴롭다. 인간의 재탄생은 인격의 현현한 확장이다. 넓이와 깊이로서 확장이다. 청소년기의 경험과 노년을 맞는 것은 인간의 재탄생이다. 이 재탄생을 정신분열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재탄생을 천 번이나 했다는 것은 그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준다. 그 괴로운 성장 과정을 포기하는 ‘윤회와의 결별’이다. 가장 낮은 언어는 상징성을 제거해버리고 말의 표피만을 따른다. 모든 말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미가 탈락된 언어가 표피의 언어다. 언어가 상징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육체와 벗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폐장한 스키장 둘레와 같은 풍광은 어디로 가는가. 이 풍광은 어디서 왔는가. 눈 내리는 산에서 묻히는 시신을 보았는가. 무덤가에 흩날리던 소주를 기억하는가. 바닷물에 흩어지는 흰 뼛가루는 어떠하였는가. 불어오는 냉엄한 바람의 거리는 죽음과 가까운 풍광이다. 고요한 죽음과 달리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모자를 움켜잡은 것은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자발적인 생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다.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의 생명이다. 현현하는 생명이 죽음의 거리에서 모자를 움켜잡고 있다. 죽음은 스틸사진이다. 병상에 누워 본 풍광은 주마등처럼 흘렀다. 움직이고 작동하고 사람을 흔든다. 꿈에 본 풍광이 괴로웠고, 갑자기 떠오르는 이미지에 나는 흔들린다. 풍광에는 인간을 흔드는 에너지가 충만하다.

스틸사진이 될 수 없는 풍광은, 어디서 왔고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명화라고 부르는 그림에는 사창가를 모델로 한 것이 꽤 된다. 전쟁의 둘레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시의 대상으로 소설의 소재로 곧잘 등장한다. 고대 성전에서의 매춘. 생명의 샘이라고 부르는 화가도 있었다. 죽음 가까운 곳에서 최초로 보이는 풍광이 이것인 듯하다. 항구의 불빛과 거친 노동에 지친 육체를 누이는 곳이고 도회지 변두리를 장식했던 곳이다. 기약 없는 미래 거친 육체노동 그리고 꿈도 사라지는 삶에 ‘생명의 탄생’을 희미하게 느끼게 한 공간이다. 그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가는 곳에서 만났다. 그러나 생명보다 죽음이 조금 더 가까운 곳이다. 부활하여 생명으로 향하는 그 곳이 인적이 끊어진 곳의 풍광이고 그 풍광의 첫 장면이 ‘미학’의 근거일 것이다. 그러니 ‘미’는 존재하는 것이다. ‘본질’은 생명의 역동성이다. 말의 풍성한 잔치는 그저 스틸사진이다. 미는 움직이고 미는 역동적이며 미는 부활의 공간에서 처음 생명을 실감한다. 추하다는 것이 아름다움의 역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좀 했다던 그들의 그림을 본다. 너무나 익숙하나 완전히 다른 것이고 기억하나 애매한 것이다. 그 곳에서 몰아치는 생명에 흉내는 없다. 나의 부활이고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아우라. 원작이 가지는 위력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생명을 향한 나의 배경’과 ‘나’라는 의식의 행보다. 그 곳은 향락으로 보이기도 하고 향락의 거리 뒤편의 오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닳아빠진 운동화가 되기도 하고 광기이기도 하고 또 한 없는 절망이기도 하다. 미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가끔 스치는 항구는 그런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고 무덤덤하다. 항구가 가지는 생명의 역동성이 그런 풍광과 무덤덤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내가 죽어서 화가로 부활하거나 시인으로 환생하는 자들의 전유물이기도 한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지상에서 중산층의 삶을 윤리적 모델로 삼지 않았다. 임사체험은 인간을 변하게 한다.

빈사의 백조. 폭력과 성이 가미된 영화. 불타오는 밤의 빛들. 모략과 모함과 음모. 죽어서 일어서는 부활과 달리 오로지 죽음으로 밀어 넣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본다. 산도 살아 있고 빈들도 생명을 품고 있다. 새들이 내게 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살아있다. 그러나 단지 인간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된 그들을 본다. 그들은 사람이 아름다워야 할 이유를 망각했다. 망각해서는 안될 것을 망각한 것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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