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아침 매미는 운다
흐린 아침 매미는 운다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08.2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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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은 무척 더웠다. 뿌연 하늘을 두고 아침 매미는 운다. 오래된 기억으로 지금의 매미소리가 되었다. 아침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을 채울 벌레소리의 가을을 꿈꾼다. 이즘 해가 있을 동안 일을 한다는 것은 내게 불가능하다. 숨이 막힌다. 마당에서 작은 고양이들이 장난질이다. 제법 구색을 갖추었다. 공간을 가로지는 새소리가 매미소리를 잠재운 것인가. 이 공간은 그들을 담기에 충분히 크다.

본디 있었던 것에 인간이 손을 대서 만든 것들이 있다. 돈 그리고 권력이다. 단지 돈을 향하거나 절제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대개 유치하다. ‘내 말 들으라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다친다’라는 반복이다. 종교단체에서도 보았다. 그런 종교인. 상식적이지 않는 행동과 야릇한 그 모습을 본인은 의식하고 있을까. ‘의식’은 보고 듣고 그리고 생각하고 그것에 덧붙인 리플렉션으로 형성된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다. 거울은 세상이다. 리플렉션은 회개 반성 자기성찰로 읽힌다. 그래서 거울에 가득 찬 즐거움과 짝을 이루는 허망함을 발견한다. 가득찼으니 더 이상 채울 수 없다. 허망하니 아무리 채워도 갈증이고 허기이다. 돈은 대지의 본성과 인간의 의도와 편리성이 교묘하게 결합된 장치이다. 통제되지 않으면 누구도 몰락시킬 수 있고 또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무리 야비해도 자기 위안이 된다. 돈은 둘레에 여러 흔적을 남긴다. 흔적뿐만 아니라 환상문학이 보여주는 괴기함이 있다. 의식할 수 있을까. 돈을 객관화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객관화의 결과로서 부분을 기능으로 환산 가능할까.

‘새들아 잘 가라’라는 인사를 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죽음은 공포로 미지로 완성과 허망을 층층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여기에 보는 자의 충동성이 결합되어 알기 ‘참’ 힘들다. 그 때 사람들은 죽음을 그저 노래처럼 불렀다. 이 노래가 풍성하고 허망하였다. 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걸러 등목하던 그 풍광과 마찬가지로 새들이 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죽음을 내가 알 수 있을까. 짝한 그 남자의 등짝에 찬 물을 붓던 그 아름다운 여자의 마음만큼이나 복잡하고 또 다양한 층위를 가진 여기에 ‘인위’가 결합되면 이것은 낯선 무엇이 된다. 사랑이 돈 때문에 헤어진다. 권력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 탄식이다.

사람을 만날 때 ‘야수’구나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십년도 훨씬 전에 장터를 지나면 듣던 소리에 묻어 있었고, 이웃을 절단하는 그들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그들은 생각할까. 아마도 생각이라는 그 자체를 모를 것이다. 그저 심연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알거나 알지 못한 채 휘둘리고 있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라는 과정이 내포된 체계가 차이이다. 이 체계는 현실에 뿌리를 둔다. 현실이라는 거울을 통해 언어는 이해된다. 그러니 거울을 통해 보는 ‘내가 존재’하는 그 언어가 의식의 언어다. 희미한 거울이라도 눈여겨 볼 이유다. 언어는 생각의 종점이고 시작이기도 하다.

자기를 보는 거울이 전혀 없는 상태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폭력이 물들어 있는 섹슈얼리티다. 이 곳의 접근은 쉽게 이루어진다. 잘난 체를 하니 잘 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책임을 남한테 덤탱이다. 그러니 내가 옳으니 잘못된 것은 그의 책임이다. 심리학은 금하고 있고, 그들을 만나지도 말 것을 또 권하고 있다. 물들기 때문이다. 유유상종의 그들이다. 다양성은 없다. 자기 객관성이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체’. 광기로 가는 지름길이고 모든 관계를 끊는 무겁고 예리한 칼이다. 원치 않으나 소외되는 길이다. 그러니 그들끼리만 즐거운 그 내용이 섹슈얼리티이다. 나를 관찰하고 나의 말과 행위를 따져 보는가. 그럴 여력은 가지고 있는가. 일기는 아이들만이 쓰는 것이라고 그저 치부하지 않는지. 말이 저주가 아닌지 따지고 따질 일이다. 사실도 따져 볼 일이다.

‘의미를 임의적으로 붙이거나 나름의 해석을 하는 행위’가 콤플렉스를 불러 온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아이들에게 함부로 칭찬하지 말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된다. 콤플렉스는 광기의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행위다. 일상적인 콤플렉스는 인간을 유아에 머물게 한다. 고집피우는 덩치 큰 유아가 된다. 곧 자기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분열의 치매로 간다. 이걸 되돌리기는 참 어렵다. 치매나 정신분열이 일상으로 돌아 온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퇴행을 자처하지 않아도 성찰에 게으런 이들에게 어둠처럼 찾아온다. 언어와 행동이 작은 원을 그리며 뱅뱅 돌고 있다. 우리는 뻔한 말과 행동이라고 한다.

슬픈 작가가 있었다. 맹자의 측은지심을 늘 이야기했다. 측은지심이 왜 그에게 영감을 주었는가.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안팎을 구분한다. 내안에서 발생한 것이 측은의 감정임을 알고 또한 그 방향성을 안다. 그리고 그건 내안에서 나를 흔드는 근본이라는 것에 ‘감탄’한다. 이것은 의식발달의 순서이다. 그는 괴로운 나그네이다. 그리고 흔들리며 걷는다. 세상을 향한 다양한 내부의 감정을 자기성장의 생명력으로 삼은 듯하다. 상식적이다. 그러나 드물다. 그러니 그는 모욕을 무심히 감내한다. 그를 보고 콤플렉스의 인간은 샘을 낸다. 인간의 신비이기도 하지만 초라하기도 하다. 의식을 빛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골동품에서 위작은 다양한 장치를 통해 ‘속이는 것’ 그러니 진짜인 체를 한다. 이면에 작동하는 돈이다. 진짜인 척을 위한 감정서이다. 누가 어떤 말을 했다고 덧붙인다. 가짜의 바지런함이다. 믿으면 천당 가는가. 말의 우상이 만들어 진다. 우상은 심층에서 만들어진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결론은 내려졌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판단은 내려진다.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해서 천천히 결단하라는 말이 무색하다. 말이 우상이 되어 거리를 휩쓴다.

가을을 느낀다. 피부에 닿는 선선한 공기가 해뜰 때와 해질녘에 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그 감촉이 가을이다. 가을이라는 말에 이런 감촉과 감각과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과학적인 가을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 받는다. 그런데 말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소수에게만 해당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일치감치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오늘도 더울 듯하다. 냇가는 그 맑은 소리를 내고 차츰 비온 흔적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돌 하나 자갈 하나도 비를 맞았던 흔적을 갖고 있다. 냇가는 지나간 비의 소리를 내고 있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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