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인다는 것과 받아 치는 것 – 피드백 시스템
받아들인다는 것과 받아 치는 것 – 피드백 시스템
  • 광명시민신문
  • 승인 2020.09.2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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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춥다. 창으로 드나드는 햇살이 그리운 계절이다. 여름의 비와 세찬 바람이 지나면 당연한 듯 찾아오는 그리운 햇살에 대한 감정이다. 감정의 기능은 무엇인가. 비와 바람의 기억으로 가을 햇살 그리운 감정이 되었음을 나는 어떻게 알까. 내게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 햇살이 위로라면 많은 이들의 더운 탄식과 눈물을 담고 있다. 봄날 태어난 고양이들이 아름답고 깨끗하다. 곧 어미와 이별이다. 그를 잉태한 자궁과 이별이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본능에 해당된다. 짧게 자른 풀 위로 아침이슬이 그득하다. 발이 젖은 고양이와 나의 차이가 신발뿐일까. 눈동자가 아름다운 고양이다.

종교. 종교인. 내게 그들은 무엇인가. 종교인의 ‘자격증’을 가진 그들이 남 탓을 한다. 분명 원인이 그에게 있었음에도 탓을 남에게 돌린다. 그 자격증은 누가 부여한 것인가. 그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시스템공학에서 먼저 배우는 것이 ‘피드백 시스템’이다. ‘네가티브 피드백’을 배운다. 요즘 같이 컴퓨터가 발달하면 예측제어를 한다. 예측제어는 목표가 분명하다. 자연계의 생물이나 생태계를 표현할 때 피라미드 구조를 사용하는 것은 근래에 보기 힘들다. 피드백 시스템이다. ‘포지티브 시스템’은 사용하지 않는다. 폭발하거나 수축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배부르면 그만 먹는 음식이어야 하지만, 그런데 먹고 먹는다. 피드백의 계가 망가진 것이다.

‘받아들이다’의 반대말은 ‘받아 친다’이다. 대개 그러하다. ‘받아들이다’와 유사어가 ‘배우다’이다. 배운다는 것에는 범위가 있고 조건이 있다. 자연계에서 둘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배우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이 때 사용되는 것이 피드백 시스템이다. 배우는 데 조건으로서 집중력을 요구한다. 반대로 사용되는 말이 산만함이다. 산만함의 끝이 잠이다. 뭔 일이 있으면 육체의 결함이 없음에도 잔다. 피곤에 절은 애처로운 그들과 다르다. 그저 잠이다. 재미있게 놀 때와 달리 뭘 하려고 하면 잠이다. 책상에 앉으면 퍼 붓는 잠이다. 보약을 달여 먹어도 잠을 물리치지 못한다.

배우는 것은 ‘진정성’을 염두에 둔다. 곧 범위가 희미한 탓이다. 넓어서도 희미하지만 개인의 능력으로 어디까지 달성할 수 있는지도 희미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데 열성적인 운동선수들이지만 달성 정도는 다르다. 그러나 돈이나 권력이라면 이건 예측제어와 닮았다. 피드백이 없다. 그저 손에 넣기 위한 안달이다. 물건이 탐 나는 사람들의 행태와 닮았다. 금하는 윤리와 도덕은 ‘탐하는 그 손’에 피드백 되지 않는다. 배우고 그리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받아들이면 그런 것에 손대지 않는다. 열매가 달아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그 피드백 시스템이 살아 작동하는 증거이다. 자격증의 종교인이 교주가 된다. 그리고 남 탓이다. 아마 그는 인간성장의 기본인 계가 무너졌을 것이다. 귀에 대고 소리를 쳐도 듣지 않는다.

종교인의 막말. 왜 그들은 그럴까. 그런 행위의 바탕에는 이런 계의 망가짐이 있다. 명상에서 의미가 사라지고 기도가 무력해진 이유이기도하다. 그건 기도하는 자가 받아들이기 위한 윤리와 도덕의 근간인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은 삶의 닻이다. 닻이 없으니 출렁거린다. 말이 떠돌고 행동이 떠돈다. 여자의 결혼은 책임 범위를 키워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통과의례는 설명하고 있다. 근처 도시에서 온 땅 사기꾼이 있다. 자주 지목이 변한다. 때때로 면적도 변한다. 들통나면 그는 생각차이라고 한다. 말을 받아 치거나 말 꼬리를 잡거나 고함을 지르는 행위는 덤이다. 좁게 생각한 사람은 범위를 넓히면 스스로 편협함을 느낀다. 범위의 변경이다. 이 기로에서 부끄러워하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갈린다.

이런 피드백 시스템이 왜 필요할까. ‘평화와 평등’은 인류의 지향점이다. 이건 받아들이고 교정하는 시스템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인간의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공감은 서로를 변하게 한다. 그 방향으로 걷고 걷는다. 그러니 예측제어는 로켓분사실험이나 정속도의 모터제어처럼 정해진 물리적인 목표에만 사용된다. 인간 사회는 그것과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넓이와 크기와 세기가 있다. 피드백 시스템에 작동하는 방식과 방향성이 있는 이유이다.

피드백의 내용은 산자의 소리만이 아니다. 죽은 자의 한탄과 비명도 있고, 미래의 그들 소리도 있다. 이건 인간 성장과도 일치한다.

자기를 받아들이는 대상은 자신의 현재 과거 미래이다. 그리고 보이는 생각과 보이지 않는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변화하고 생각이 변화한다. 변화된 그 모습에는 죽거나 살아 있는 자들의 소리가 스며있다. 그러니 당연히 방향성을 가진다. 아는 체의 상동 행위와 언어는 인류의 오래된 밀린 숙제 같은 것이다. 스틸사진이다.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자기의 피드백 시스템은 성립하지 않는다. 계가 존재할 수 없다. 추락이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다. ‘즐겁다’는 말은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즐거움은 아니다. 낯선 광대한 세계의 발견과 그곳에 외로이 서 있는 자기발견의 고통스러움이다. 명상은 자기 객관성과 자기 책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러니 허망은 없다. 그 삶을 보기에 아름답다고 한다. 움막의 그가 집짓는 방법을 가르친다. 개체는 계통발생을 따른다는 것이 신체를 넘어 마음에도 적용되리라는 어떤 생각이다.

이곳의 일은 늘 밀려 있다는 ‘생각’이다. 문짝도 비에 비걱거리고 저 쪽 천장은 바람이 심하면 비가 센다. 냇가나 길은 복구할 양이 남았다. 그럼에도 둘레에 풀은 베어 졌고 베어진 풀의 냄새다. 버릴 것을 주워서 버린 까닭이다. 지나간 비와 그들이 당연히 버린 그 비닐봉지 조각을 줍고 줍는다. 한 조각 한 조각을 줍는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나누는 와중이었다. 초라한 행색의 젊은 여인이 아이를 안고 그 말이 듣고 싶어 나타났다. 아이는 울었다. 같이한 자들이 그 여인을 내 보내려고 했을 때 아이도 듣게 하라는 말로 대중의 소란을 앉힌 그를 기억한다. 계는 자기 객관성 위에 성립하고 계는 방향성을 가지고 진보한다. 예수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모습이 어떤지.

추운 아침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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