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거울
엄마의 거울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10.2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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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바다를 면한 이 카페는 뒤쪽으로 계단이 돌출되었다. 전면은 유리다. 유리너머 바다다. 테이블 건너편의 여자 목소리다. 당신의 충고는 필요 없어. 평범한 옷차림의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향한 나지막한 소리였다. 암벽위에 지어진 카페다. 잘 된 방음은 바다 가까운 곳에서도 바다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물보라와 튀는 물방울이 보여도 음악소리다. 시그널 뮤직으로 자주 사용되는 그 음악이다. 누구를 ‘나’는 기다린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혼자인 나와 중년의 남녀 그리고 저쪽에서 퍼즐놀이에 열중한 한 무리가 있다. 다들 널찍이 자리 잡았다. 곧 바다의 겨울이다.

백설공주. 엄마의 거울. 엄마에게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알까. 그리고 거울에 묻는 물음은 단 하나 누가 예쁘냐는 것도 알까. 이 물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 아름다움의 죽음이다. 비교하고 그리고 음모를 꾸미고 다양한 장치와 소품을 구한다. 그리고 딸의 죽음을 요구한다. 엄마. 그녀에게 ‘예쁘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슷한 이야기가 ‘전 세계’에 흔하다. 엄마와 딸을 둘러싼 비교와 죽음이다. 거울은 단 하나의 물음에만 답하는가. 그 외의 것은 침묵인가. 거울의 답은 신빙성이 있는지. 혹 거울도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지. 우리가 흔히 던지는 물음이다. 그녀가 있고 그녀의 엄마가 있고 그리고 거울이 있고 확인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 엄마의 장치와 음모이다. 더구나 딸은 엄마 보다 아름다운 것이 비극이다.

엄마. 노래는 슬프고 아름답게 그린다. 또 많은 이들은 그 이름으로 숙연해진다. 울컥해지는 대명사이다. 그런데 물음은 추상성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개인에 따라 편차를 보이는 ‘예쁘다’가 물음이다. 왜 묻는 물음은 단 하나이고, 질투의 대상이 ‘딸’이 될까. 닮은 이야기로 신데렐라가 있다. 원시사회의 신데렐라는 역경을 건너는 여성이고 유럽의 신화에는 화덕 앞에서 재투성이가 된 어린 여자아이이다. 화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다. 조사에 따르면 엄마를 마녀처럼 여기는 딸의 ‘관념’이 30%정도라고 한다. 딸을 독살하려는 거울을 가진 엄마다. 가을 들판에 수확한 알곡을 대지의 딸이라고 한다. 세워둔 볏집이 딸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다.

카페.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삼색 고양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발목으로 왔다. 그리고 이리저리 부비적거리고는 발머리에서 자리를 잡는다. 삼색 고양이는 암컷만 존재한다고 유전학자가 단언했다. 고양이 일생. 카페 바닥으로 조용히 거니는 이 고양이는 겨울 초입의 스산함과 바다의 비린내와 흔한 생선을 멀리하고 이 폐쇄된 공간에서 털을 벼리고 있다. 나는 고양이에게서 어떤 냄새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커피냄새다.

내려서는 계단에 신나무의 낙엽이다. 아스팔트 물 위에 떨어진 잎은 붉다. 여자도 계단을 내려온다. 어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지. 모놀로그다. 그녀의 얼굴은 침울하다. 반듯한 허리와 달리 침울한 얼굴은 현대인의 특징인지. 그렇듯 그녀에게 둘레의 거짓말이 일상인 듯하다. 거리에 누구도 없는 적막이다. 고양이는 어촌에 흔했다. 사라진 여자의 공간에 바람이 분다. 아무도 없는 어촌과 고양이 그리고 뉘엇거리는 햇살이다. 아스팔트 군데군데에 물이 고여 있다. 여자는 거짓말에 실망하였고 나는 그저 물끄럼이 사라진 빈 공간에서 환청을 듣듯 또 듣는다. 여자는 어떤 부류의 직업은 거짓말로 산다는 사실에 짜증을 내는 것인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름답다는 그것인가. 나보다 아름다운 딸은 세상에서 오랫동안 흔했다. 신데렐라가 흔했다. 가을 들판의 열매는 딸이기도 하다. 대개 ‘미’는 깊고 넓다. 문화에 따라 단지 외모나 얼굴만을 말하지 않는다. 좋은 행동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고 못된 행동에 대해 밉다고 한다. 딸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풍성한 가을의 철칙이다. 하지만 죽음이 배여 있다. 들판의 알곡은 죽은 엄마 위로 피고 맺은 것이다. 봄날 어머니인 대지의 배를 갈라 어머니인 곡식을 심는 것이다. 딸은 어머니의 희생과 죽음이 근간이 된다. 엄마의 거울. 물음은 정해진 것이고 원하는 답도 정해진 것이다. 현대에서 ‘이런 물음과 답’은 대개 비극적이다.

여자가 담배연기를 날리면서 카페에서 덧붙인 말은 지겹다는 것이었다. 변함없는 거짓말은 참 지겨운 것이다, 거짓말로 일생을 사는 이를 보았다. 자기의 정당성이나 설교를 위해 사용했다. 백설공주 그리고 신데렐라. 여성의 성장을 뜻하는 ‘상징’이라면 아이는 엄마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내가 의존하는 그것이 모성이라면 떠나지 않으면 독살의 사과를 들고 찾아온다는 알듯말듯한 이야기다. 심리학은 과정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이 모성을 그레이트 마더(great moth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잎은 날리고 누구도 보이지 않는 항구에 바람이 분다. 참 사람이 없다. 남은 사람들은 울적하다. 방파제에 앉아 시름없이 피우는 담배다. 누구도 없이 바다를 보고 혼자 피우는 담배다. 그들에게 위로는 무엇이 될까. 마음의 독립을 꿈꾸기에 너무 지쳐 보인다. 가스배달차가 지나간다. 엷은 흰색의 하늘에 곧 황혼이 물들 것이다. 황혼은 황금빛이다. 먼 곳의 자동차 행렬이 호사스럽다.

비슷한 무리들이 모여 카페에 간다. 비슷하게 마시고 먹는다. 담배를 피우고 바다를 보고 담배를 피우고 차를 타고 멀리 떠난다. 카페의 그 남자는 아직도 있을까. 아니면 또 어디로 가서 지겨운 그 짓을 하고 있는가. 만나 본 거짓말의 그들은 의기양양했고 자각하지 못했다. 거짓말의 위험성은 동물에게도 보인다. 사자를 보면 낼 소리를 작은 원숭이들이 재미삼아 내면 잡혀서 혼쭐이 난다. 큰 원숭이들은 늙은 원숭이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장난의 거짓말은 작은 원숭이들이 다른 원숭이들의 죽음을 대하는 긴장을 보는 재미였다.

엄마의 거울. 화려하고 다양한 빛깔은 어둡고 깜깜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 노동자의 낡은 구두에서 아름다움을 본 화가가 있었다. 늙어 뼈만 앙상한 그 손이 아름답기도 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나 아닌 그들이 아름다운 까닭이다. 아름다움에 거짓은 없다. 더구나 흉내는 없다. 담배를 피우는 그 절망이 애처로워도 사람이 바탕인 탓에 아름답다. 거울에 비친 나만의 아름다움이 얼굴을 둘러싼 외모라면 협소하다. 운동장에서 노는 올망졸망 아이들이 그저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분도 있었다. 해질녘 거울을 꺼내 엄마의 주문 같은 말을 건네면 아마도 거울은 희미하게 뭔가를 보여 줄 것이다.

아직 밤나무 잎은 푸르다. 이 산골에 아무도 보지 못한 밤나무가 내 가까운 곳에 있다. 웅장한 그 나무가 달을 가린다. 달이 저 나무를 비켜나면 온전한 달을 볼 것이다. 날이 저문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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