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19의 추억
코비드-19의 추억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11.2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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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진다. 바람 없는 밤 창을 통해 그 소리를 듣는다. 지는 잎은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질까. 내게 무슨 의미를 남기는가. 갈잎이 진다. 갈잎과 닮은 밤나무 잎이 진다.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 떨어지는 그 공간에 내가 섰다. 아, 잎이 진다. 지는 잎들이 익숙하거나 낯선 감정을 불러 온다. 이 감정은 단지 화학적인 반응인가. 어디서 바람처럼 또 바람 없이 지는 잎처럼 날라 온 ‘짧은 순간’인가. 기억이고 추억이고 그리고 추상화되어가는 막연함인가. 추상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꿈을 꾼다. 그리고 뭍한 이미지를 본다. 이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왜 지난 밤의 어떤 꿈은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 창밖의 풍광은 나를 흔드는가. 개구리 때의 추억. 진화과정에서 보았거나 보였던 풍광과 들었거나 들렸던 소리의 추억은 내게 무엇으로 남았는가. 현재의 DNA를 구성하는 단백질이고 생성된 신경세포 다발인가. 개인으로서 내게 남은 그것은 아마도 파편의 이미지와 소리일 것이다. 살아 온 과정의 추상이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곧 낯모른 풍광과 또는 낯선 소리에 놀라는 투영을 불러온다. 감정의 많은 부분은 이런 기억의 추상이 마음을 만드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나이라는 것이 망각과 부서진 기억이라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마음의 여행은 이런 이미지 세계로의 여행이다. 명상에서 먼저 보이는 풍광도 여기의 것이다. 다만 그곳은 그곳의 법칙이 있다. 지금 이 세계에 무작정 적용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부감논리나 경계논리가 작동한다.

지는 잎들의 모습과 소리를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무심코 흘러드는 저것을 나는 갈잎 지는 소리라 하였다. 밝은 달에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나는 저 소리와 저 소리에 적합한 단어를 어이 발견했는가. 바람 없는 날 지는 갈잎의 소리. 어떤 경로를 통한 까닭에 내가 한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문을 연 나는 ‘그 소리’에 잠깐 놀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우수수의 잎들이 바닥에 수북한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의식과 무의식이 혼용하여 보고 듣고 그리고 생각하고 또 그 생각에 오래 전 추상이 불러온 감정일 것이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것이고 개구리의 것이고 나의 것인지 참 애매하다. 이런 추상은 ‘나의 마음’이고 나의 결정에 관여한다. 그러니 일상이 나를 관여한다. 일상의 풍광이 나를 관여하고 일상의 소리가 나를 관여한다. 코비드-19 이후. 변화되었고 흔들린 사회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근간이 되는 기억과 추억의 추상인 마음에 새로운 것이 축적되어 세계를 흔들 것이다. 그러니 코비드-19 이후는 보다 달라진 진행선상의 세상에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코비드-19의 발생과 방역의 과정이다.

봄날 코비드-19. 여름의 바람과 그리고 비. 아직 복구되지 않고 남은 상처들. 갈잎 진 언덕과 길. 막연하게 바라보았던 녹색. 이르게 팬 장작과 더미. 일상과 그녀와 고양이와 새. 작은 새와 좀 큰 새. 바람소리. 잎이 떨어지는 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포크레인 소리 비행기 소리. 긴장의 추억들. 대부분 용해되어 인간의 마음 곳곳으로 스며든다. 의지로 계획하거나 마지못해 했던 일의 틈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허리를 펴는 고단함. 뜨거운 술과 차를 마시는 한정. 무의식적으로 나를 침범한 것은 또 주마등처럼 떠오를 것이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후회는 이것이고 회상은 샘에서 길어온 물처럼 차갑고 냉정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이가 시리다. 그러니 생각하고 따진다. 그래도 본래의 샘에는 내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물’의 내용이 있다. 그럼에도 하는 생각이다. 생각에서 신뢰는 중력과 같다.

일상은 마음을 짓는 행위다. 마음은 추상이다. 살아 추억이고 기억이지만 일상의 현재였다. 추억이 기억이 추상을 거쳐 마음이 된다. 코비드-19의 종식선언이 이루어지는 날 해방감에서 하는 행동은 예측 가능하다. 육체에 가까운 행위와 말의 넘실거림이다. 해방의 페스티벌이다. 그리고 달라진 일상에로의 복귀다. 사회제도나 문화적 관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니 새로운 답답함을 또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또 다른 해방이 필요하다. 그러나 코비드-19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그저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러면 지금은 악몽이고 해방감은 짧은 순간이다. 위축되는 자아가 역시 지루하고 힘든 일상에 함몰되는 것이다. 전쟁으로부터의 해방. 그 해방이 간단히 평화로 연결되지 못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야할 무엇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시기이다. 인류가 진화할 수 있는 기회이다. 책을 이리 저리 끌어 모으면 로켓을 만들 수 있을까. 또 Ai용 프로세서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은 보다 더 복잡하고 보다 더 고려해야할 것이 많다. 평화가 지향점인 이유이다.

짧은 햇살에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따스한 곳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곤 밤에 그들은 조용히 다닌다. 밤의 동물이 된 이유는 두려운 인간의 낮 때문이라고 한다. 산마루를 지나는 햇살과 며칠 전 나무둥치를 흔들던 바람이 조용하다. 차갑다. 작은 새들의 집이 될 덤불이 저 언덕에 무성하다. 가을이면 그리워하던 정체가 무엇인지. 누가 무엇을 그리워한다. 벌레와 벌도 보이지 않는 산이 되었다. 그 기슭에 모두가 저물어간다.

추억은 추상화되는 물질에 불과한가. 아니면 추상화가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인가. 전자라면 그저 잊을 수 있지만, 후자라면 이건 아마도 사회를 그리고 개인을 바꿀 것이다. 매일의 생활이 잊을 거리나 즐길 거리만은 아닌 까닭이다. 인간을 형성하는 개인의 무의식에 층을 쌓는 것이라면 하루의 삶은 영혼이고 마음이다. 그러니 감히 ‘그런 말과 행동’은 하지 않을 터인데.

오래 전에 추상화된 그것과 지금의 저 산이 교묘하게 오버랩되는 것이 아닌지. 산을 보면 그저 산이라는 안도와 안도의 이면에 밀려드는 감정이 있다. 이게 생명력이고 또 인간을 괴롭히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저 외진 곳의 노인네는 그저 외롭기만 한 것이고 힘들었던 노동과 거친 음식과 지치고 추운 날의 겨울이 평생에 계속되는 느낌이 아닐런지. 그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머물러 있는가.

또 해는 지고 어둠이 오면 난로에 장작을 지필 것이다. 나를 ‘소설제목’처럼 ‘독짓는 늙은이’라는 분으로부터 음반을 받았다. 바람소리와 갈잎의 늦가을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달리 또 소리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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