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0.12.2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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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처럼 떠도는 무리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한 그였다. 떠도는 이들은 먹을 것 쉴 곳도 없었다. 그들은 ‘곧’ 주려 죽을 것이다. 아니면 도적에게 붙잡혀가거나. 그들에게 무슨 말이 위로가 될까. 식사를 할 만큼의 비용은 그를 후원하는 분들로부터 나온 듯하다. 둘러앉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자이다. 이 말은 위로였다. 너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자이고 네가 안고 있는 그 어린아이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자라는 함묵이다. 곧 형제고 자매였다. 그는 계급과 계층을 만들고 군림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계급의 정점에 있는 그 신을 하찮게 여겼다. 그들은 또 물었다. 아버지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갈 것이요, 물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먼저 갈 것이다. 네 마음속에 있다. 위로였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둘이 하나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곳이다. 어떻게 갑니까. 죽어야만 갑니까. 그는 세 가지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눈 오는 전날까지 일이었다. 내리는 눈에 날은 추웠다. 눈은 혹한과 함께였다. 작은 새들은 덤불로 갈 것이다. 눈 오는 날 새들이 요란스러운 것은 왜인지. 혼자 묻는다. 앞산에 눈이 내린다. 저 들에도 쌓이는 눈이다. 먼 산의 봉우리 그리고 그 아래 무덤에도 눈은 내린다. 언덕에서 그들 무덤을 본다. 사람은 눈 오는 날 무엇이 되는가.

실망하지 마라.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대상이 무엇이었을까.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리고 냉담한 실망이다.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곳에서만 통용되는가. 아니면 가로지르기인가. 활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은 저 활엽의 갈색은 그 빛으로 겨울을 난다. 앙상한 가지는 겨울의 활엽수이다. 자연의 겨울이 인간에게 계절로서 겨울인 시대는 지나간 듯하다. 번창하고 화려한 도시는 활엽의 세계를 떠난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별이 서로 떨어져서 빛나는 밤이다.

동화에서 성격이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의인화이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극에 달한 캐릭터이다. 호프만의 고양이 무토를 고양이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바보 이반. 바보는 보는 이에 따라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이다. 그러나 바보라는 일반적인 말 뒤에는 그 사람에게 바보 같은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열등의 기능이다. 열등은 콤플렉스로 가는 징검다리다. 자기 열등의 기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바보는 바보인 줄 모른다. 이것은 인간에게 영혼이 실재한다는 증거로 사용한다. 아버지의 나라로 가는 방법으로 그는 양동이 손잡이가 깨어져 밀가루를 전부 흘리고 그걸 마침내 알아차린 여인을 예로 들고 있다. 이 여인을 칭송했다.

힘센 자를 묶어야만 그의 보물을 훔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생각을 그가 묶을 수 있을까. 빌게이츠 멀린다 재단을 가끔 생각한다. 은퇴 후 시골로 돌아간 정치인을 생각한다. 그는 그가 소유한 ‘강한 기능’을 그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까. 집안을 쓰레기로 채우는 사람들. 그 쓰레기를 모으는 ‘기능’을 묶어 놓을 수 있을까. 세상을 살면서 늘 생각하는 부분이다. 말을 조작해서 ‘현혹하는 그 기능’을 묶어 놓을 수 있겠는가. 가십을 뒤적거리는 그 근본 기능을 묶어 놓을 수 있을까. 힘센 자를 묶어야만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는 암시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진리이기도 하다는데 동의 가능한가. 아버지 나라로 가는 방법으로 또 제시한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산자들이 죽음을 논한다. 살아가야하는 방향에 서서 죽음을 논한다. 다양한 비유로 죽음을 가져다 쓴다. 대지는 죽음의 이미지라는 분도 있었고, 본디 대지는 죽음이라는 분도 있었다. 대지의 시간에서 인간의 죽음은 무엇이 될까. 죽음 너머에 있는 대지는 무엇인가. 피는 꽃은 대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는 인간에게만 해당한다. 삶을 논하기 위해 죽음은 필수임을 가르친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그는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에는 속세에서 말하는 무기고와 황금 보화는 없다. 아버지 나라에서 바라본 죽음은 어떤가. 의식의 소멸이 죽음이라면 그건 희미하다. 현상으로서의 죽음이라면 역시 희미하다. 의식은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존재한다. 지우고 싶다는 기억은 의식이 고통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죽음은 생각의 원천이기도하다.

아버지의 나라에 가는 방법으로 또 제시된 것에는 단도 찌르는 연습을 해서 마침내 그를 죽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성질 죽이라는 말을 듣는다. 가진 것들이 삶에 방해가 된다는 말도 듣는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남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듣는다. 인간을 규정하는 윤리와 도덕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이룬다. 경계 없는 통로는 중독이다. 경계를 넘어 그 나라로 가는 것은 각고가 필요하다. 경계 없이 나타나는 그 현상은 신들린 현상과 닮았고 역시 경계를 내가 넘어가는 그 현상도 비슷하다. 영혼의 표상이다. 그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인간영혼에 두었다.

계층과 계급은 정복과 피정복 그리고 지적 조작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가졌기 때문에 학식이 높기 때문에 위라고 한다. 정복한 자는 피정복자가 그들의 위치로 올라오는 것을 금한다. 카스트를 본다. 그리고 사회의 계층 사다리가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본다. 그의 행위와 말에 는 인간 위에 인간이 없다. 지적 조작으로 계층을 만드는 행위도 없다. 이천년 전의 상황이 지금에도 유효하게 느껴지는 것은 별반 진전을 이루지 못했거나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증거이다. 아니면 인간의 운명이 도상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느냐. 그저 지어낸 이야기나 떠도는 말을 퍼뜨린 것은 아닌지. 그런 의문이 있다. 떠돌이 ‘약장수’같은 이가 아닐까. 데카폴리스의 문화적 배경을 생각하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는 것과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그의 설명은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을 현대 심리학은 전한다.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그의 신뢰이다. 그 신뢰는 비밀의 의미를 아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 한 그의 단언과도 관련을 맺는다. 그의 삶의 단면이기도 한 말이었다. 현대 심리학이 바라는 바람직한 모습의 현현이기도 하다. 붓타를 생전에 ‘고타마씨’라고 불렀던 그런 정감이 그의 행위에 묻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자이고 또 아기를 안고 이번 굶주림에 죽을 지도 모르는 그 여인에게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자임을 단언하는 모습이 추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연관해서 ‘자크 데리다’의 해체와 구축을 통하면 오늘날의 윤리와 도덕도 보일법하다. 곧 그의 마음 어느 자리에서 그 당시의 상황과 운동 속에서 내던져진 그의 행위와 말의 의미이다. 내가 그와 같은 마음자리에서 이 시대에 내던져진 나의 행위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같은 진원이라도 바다와 섬과 도시와 원자력 발전소에서 느끼는 감각은 다르다. 말과 행위는 스틸사진이 아니다. 운동하는 어느 지점에 보이는 것이 스틸사진이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지금 시대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이것이 그의 윤리를 되살리는 것이고 그를 만나는 것이다. 그 때의 말이 지금의 말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묻는다. 그에게 가난과 계급과 계층은 무엇이었는가. 그가 행한 공동식사는 지금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이 운동이다. 의미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하다. 오래전 남대문 시장의 용감한 그들은 좌판을 발로 딛고 섰다. 벗어 재친 맨 몸뚱이에는 문신이 드글거렸다. 이런 모습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는 시대와 공간을 가로질러 물어 볼 수 있다. 그에게서 개인은 무엇인가. 이미테이션에 존재하지 않는 개인은 무엇이 되는가.

한 송이 들꽃을 돌보고 잡초 한 무더기를 베어 땅을 덮는 것은 산이 변하고 들이 변한다. 그건 나의 영혼이 변하는 것이다. 내가 산 아래 살고 해 아래 살지만 내가 산을 바꾸고 나의 영혼을 바꾸고 그리고 같은 해라도 해가 가지는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묻혀 살아가지만 그들도 나의 행위 둘레에 있다. 곧 나의 일상은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층위에 서 있다. 일상은 그 층에 또 한 겹을 쌓고 그 층에 문장 하나를 새기는 행위이다. 이미테이션이라면 같은 층위 같은 글자이다. 나는 다양한 문양과 다채로운 층을 하나씩 쌓고 또 허물기도 하는 것이 던져진 존재로서의 나의 일상이다.

일상의 일생기록. 자서전. 영원이 되고 싶은가. 깊은 후회가 영원한 까닭은 인생이 영원한 탓이다. 후회는 삶의 뿌리이다. 봄이면 소생하는 씨앗이기도 하다. 자서전이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환상이든지 악취미라고 한 분이 있었다. 이미테이션으로서의 자서전. 그저 이미테이션이고 픽션이다. 자서전이라는 그 말이 참 그렇다. 내게 무의미하다.

눈을 치웠다. 그리고 냇가 얼음을 깼다. 달은 그믐을 향해 나아간다. 산허리를 감도는 조용한 소리의 발자국은 고라니다. 밤은 그저 차가울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된다. 눈이 쓰리다. 봄날 다양한 꽃들이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세계에 필 것이다. 그런 꽃이 잎이 되어 죽음에 이르러 닮은 빛을 낸다. 삼태성의 밤이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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