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눈 위로 비는 내린다.
쌓인 눈 위로 비는 내린다.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01.2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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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눈 위로 비는 내린다.

처마 앞 쌓인 눈 위로 낙수다. 날렵한 까치도 깨끗한 털의 고양이도 보이지 않는다. 비가 귀찮을 것이다. 매달린 마른 잎 위로 비는 내리고 명암은 짙어진다. 마음이 출렁거린다. 예감이다. 봄의 예감으로 창을 닦을 것이다. 비는 내리고 하늘은 우울이다.

빈곤의 악순환. 빈부 격차. 낙수효과. 이 둘레를 형성하는 논리에는 거짓말이 많다. 거짓말의 대상은 누구일까. 돌이키면 짐작한다. 사실이 드러나도 무슨 말이다. 사기꾼을 친구로 두지 말라는 실감이다. 거짓말의 레토릭이 시대를 지나면서 닮았고 대상이 비슷하지만 여전하다. 모든 것을 거짓말의 레토릭 수단으로 삼는다. 통계를 인용하는 그들은 하지 말라는 행위가 일반이다. 구간조작부터 행한다.

거짓말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내재된 공격성이다. 그들을 유아 같다거나 초딩이라고 부른다.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빈정거림이다. 장난삼아라도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한다. 내재된 공격성의 발로가 궁극적으로 그 방향은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거짓말 없이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정도의 지나침과 유치함이다.

진동과 빛만 있어도 반응한다. 피리소리에 바구니에서 모습을 드러내 춤추는 듯 한 인도의 코브라다. 뱀은 귀가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진동을 느낄 뿐이다. 일상의 거짓말은 ‘타인의 말’을 듣지 못한다. 그러니 이해는 없다. 진동에 반응하는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빛은 시간을 두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실체를 가진다. 사물을 명확히 보는 습관이 없으니 관찰은 없다. 그저 이미테이션이다. 매체를 통한 이미지 조작도 마찬가지이다. 거짓말이라고 판단되었을 때의 비참함을 거짓말의 공격성으로 그들은 버틴다.

어떤 아주머니의 단호한 소리였다. 저 놈의 영감쟁이들 또 뒤에서 말 만드네. 어슬렁거리는 그들을 향했다. 옳다고 박박 우기는 공격성. 자기자랑과 가십을 만들고 퍼뜨리는 그들. 사람을 거듭 평가하는 초라함. 이것저것을 섞는 기술. 시간의 조작 장소의 조작. 말의 조작. 조작의 조작. 참으로 다양하다. ‘동물학자 콘래드 로렌츠의 공격성’이라는 책제목이 무색할 지경이다. 돈과 권력이 미끼로 사용된다면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느낌이다. 거짓말을 정의로 탈바꿈 시킨다. 말을 만드는 그들은 어슬렁거리면서 ‘잘 되라고 했다’는 것은 ‘덤’이다. 공격성은 샘이 난다. 샘이 난 그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인간적이라고 한다. 그저 말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신용.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신뢰 가능하지 않는 집단과 정치인들은 어떤 대륙의 어느 시대의 유물일까. 거짓말은 끝이 없었다. 그러니 공격성이 끝이 없는 것이다. 거짓말의 그들을 이십년 삼십년을 지켜보면서 느낀 소감은 거짓말의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의 함정이나 마음의 동굴에 사는 그들이다. 동굴이니 깜깜하다. 동굴에 미끌어져 들어가는 것은 가능해도 나오기는 쉽지 않다. 자칫 일생을 그곳에서 보내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이면에 이런 공격성이 깔려 있다. 공격성은 섹슈얼리티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민주주의에서 참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권리를 말한 ‘한나 아렌트’를 떠 올린다.

거짓말 구분은 쉽지 않다. 가십과 결부된 따옴표의 인용은 일단 거짓말로 치부한다. 외신의 번역이라도 그저 보내는 신뢰는 없다. 외신의 출처를 찾고 내용을 찾는 귀찮고 지루한 과정이 사물을 명쾌하게 보는 즐거움을 준다. 이 즐거움에는 거짓말에 대항하는 분노가 스며있다.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이나 논평을 구분한다. 이것을 따옴표와 연결해서 보면 드러나는 명쾌함에 역시 분노가 스민다. 대체 이들이 왜 이 짓을 하는가하는 의문과 이걸 2차 3차 4차 퍼 나르는 그들은 누구인지 하는 참담함이다. 진화의 동력으로 작동되는 분노이다. 또 그들은 자주 개심한다. 그들의 개심은 그저 새로운 부도수표를 남발하기 위한 장치이다.

맥락으로 읽는 연습과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 끝없는 말꼬리에 대해서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 미국의 어떤 정치인을 기억한다. 문맥으로 파악하면 거짓말은 구분된다. 그들 입장에서 그들 내용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입장이 선행되고 먼저 결론을 맺는다. 내가 빠지는 거짓말이다. 각기 다른 입장의 그들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내가 행하는 거짓말을 막는 방법이다.

나의 전제조건이다. 내가 나의 생각과 분리하는 상식과 내가 배운 것과 내가 가진 것을 나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습관과 듣고 보고 배운 것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의 분명한 태도이다. 가능한 범위에서 이들을 객관화 시킨다. 보다 더 객관성을 확보하는 사고의 전환에서 강화로 한 발자국씩 딛는 일상이 필요하다.

거짓말은 무엇을 만들까. 거짓말은 타인에게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 ‘ ... 내가 사람을 둘러 보아 눈 코 입 어디서도 이 사람이 그 사람과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동물과 사람의 다름은 알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다름을 알지 못한다. 인간에게 차별을 만드는 것은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말로 차별을 만든다.’ 존재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은 토끼의 뿔과 거북이 등에 난 털과 같은 것이다. 거짓말은 차별을 만든다. 그는 차별 상단에 있고 대상인 그들은 그들 아래에 있다. 초기 경전에서 발견된 붓타의 말이다. 카스트 제도와 피부에 따른 차별 그리고 성별에 따른 차별은 철저하게 잘못 되었음을 지적했던 붓타의 어록이다. 상층의 그들은 거짓말에 협박을 일삼고 저주를 퍼 붓곤 했다.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이 사는 길이다. 인간은 출생이나 피부가 아닌 그 행위로 평가 받아야한다는 청정한 어록을 또 남겼다. 거짓말의 그는 그 행위로 평가 받을 것이다 거짓말쟁이라고. 거짓말쟁이는 거짓말쟁이를 낳고 거짓말쟁이는 거짓말쟁이를 낳는다. 이것을 거짓말쟁이는 모른다. 곧 집안의 저주로서 거짓말이 상존하게 된다. 책임은 거짓말을 거스르는 간단한 행위이다. 사기꾼과 동체인 그들과 거리를 두라는 충고였다.

겨울이 지난다. 봄이 온다는 기적의 현실이다. 아마 이 봄에도 형용사나 부사를 붙인 거짓말의 무리가 나타날 것이다. 어제의 거짓말이 오늘의 거짓말이 되고 내일의 거짓말이 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눈을 들면 사방이 보이는 다원화된 사회를 막는 외길이 거짓말이다. 생물의 다양성과 닮은 다원화된 사회에 신분과 피부에 따른 차별이 사라진 사회가 그래도 살기 괜찮은 사회이다. 인간이 세상에 나온 최소한의 의미라도 되새길 수 있는 바탕이다.

날이 흐리다. 보슬비가 위로다. 그 때 여자아이와 우산 속에서 손잡고 걸었다. 천사보다 아름답고 별보다 빛나는 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방해하였고 놀렸다. 그리고 우리는 우산 아래 해 아래에서도 손잡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아이와 도시락이 없는 아이. 그 아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공장으로 갔다. 수업시간에 기성회비가 없는 아이들이 쫓겨나 화장실 뒤편에서 서성거렸다. 집에 가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화사한 그 여자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뻔뻔한 거짓말로 사랑한다고 또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혹 낯선 나라로 이민을 떠나 짝하여 나와 손잡던 추상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 이름도 모른다. 혹 광야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지. 광야에서 외로운 물음을 던지고 있을까. 언덕에서 바람소리 듣는 공간은 따스하다. 책상에는 인쇄된 메모가 널려 있다. 봄은 이것과의 이별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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