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귀신과 산토제비
물귀신과 산토제비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02.2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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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늙은 그들이 산 둘레에서 내게 들려준 말에는 산토제비가 있었다. 토제비가 도깨비인지를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그놈은 사람에게 흙을 퍼붓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소리를 낸다고 하는 분도 계셨다. 산이 깊으면 물도 깊다. 냇가의 그 분은 물귀신을 늘 이야기했다.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과 더불어 갑자기 물이 깊어지고 그리고 물아래에서 다리를 잡아 당겨 장정 몇이 끌어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는 말의 반복이었다. 산토제비는 술이 거나해져 해질녘 밭두렁에서 잠이 들면 나타난다고 했다. 모두들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천명했다. 이런 말의 그들은 내게 모두가 늙어 보였다.

‘이것 집어세요’라는 말을 듣고 내가 그 말이 의미하는 ‘집는 행위’를 할 수 있을까. 해 뜨는 쪽이 아닌 방향으로 지시하면 알아듣고 그리고 지시를 행할까. 무심코 물어보라 오른쪽과 왼쪽을. 오른팔 들어 보라는 말을 왼팔 들어 보라는 말을 알아듣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가지는 명령적이고 지시적인 일은 대개 일과 관련이 있다. 일을 ‘잘’할 수가 없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진행도 없고 속도도 없고 내용도 없다.

생각하면 어떤가. 먼저 괴롭다. 그리고 오랜 생각의 경과는 딱딱한 현실을 인지하게 되는 서글픔과 자기의 어리석음 그리고 허망함과 부끄러움이다. 생각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실마리는 제공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상태인가. 공시적 공간에 머문다. 꿈이고 환상이다. 그리고 두려움과 모험이 즐비하다. 생각은 무엇일까.

그 오래전에 물귀신과 토제비가 설치던 때에 술이 없어도 화투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점수와 돈 계산이 밝은 그들이 글자와 숫자체계를 모른다면 아마도 고개를 갸웃거릴 터이다. 왜 그렇게 그게 재미있었을까. 듣기로는 작은 판돈도 아니었다. 그때의 직장인들도 카드나 화투를 침목도모나 담합대회로 여기는 듯했다. 무료한 시간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물에 가지마라는 그분에게 물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위로였다. 후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아들이 보이는 저 물에 빠져 죽은 기억을 평생가지고 있었다. 수십년전의 기억이 지금이니 그저 말로서는 트라우마가 된다=. 토제비라고 부르는 이유를 들었다. 사람에게 흙을 퍼붓는다는 것과 다음 날 그 자리에 가면 말끔하다는 것이었다. 농담으로 치부하면 화를 냈다. 나도 보여 달라고 했지만 흐지부지 되었다. 운명을 달리한 분들이다.

생각은 무엇일까. ‘... 그녀는 있는 그대로 깊이 생각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천오백년 전이었다. 죽은 딸에 슬피 울던 여인이 붓다에게 도움을 청하자 농가에서 겨자씨를 얻어오라. 단 죽은 자가 없는 집이어야 한다. 이를 둘러 싼 내용이었다. 있는 그대로는 무엇이고 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녀에게 깨달음은 무엇인가. 아마도 생각의 근간이 이 근처일 것이다.

화투를 치는 그들은 정치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고 이웃을 타박하고 타인을 가십거리로 삼는 일상이었다. 원인은 알려져 있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부추기는 책임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희한한 것은 가십거리를 만드는 중심에 있는 그들이 남의 평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동언어이고 단문이니 대개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광화문 언저리에서 격한 고함으로 지르는 소리의 현지화였다.

여인에게 딸의 죽음은 당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젊어서든 늙어서든 병들어서든 사고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병듦이나 죽음은 인간을 흔든다. 곧 생각과 무관한 마음의 어느 골방에 머물게 한다. 인간이 하는 생각은 마음의 골방에서는 없다. 죽음은 인간으로서 보이는 현상이다. 그녀에게 딸은 무엇인가. 딸의 죽음에 따른 슬픔은 그녀 내부에서 일어났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깊은 생각은 다양한 관점을 요구한다. 인연으로 맺어진 딸과 감정에 치우친 그녀의 삶이 그녀가 보기에 어떠했을까. 그녀는 아마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 가르침을 따지고 따진 이해의 결과를 깨달음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비구니승의 노래를 모은 데리카터(therighata)에 남겨져 있다.

현대는 개인공간과 공동공간이 공존한다. 공동공간에서 ‘나로서의 조건’이 자기반성 위에서 행한 자기결단이다. 자기반성은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생각이다. 생각은 인간만이 한다. 생각한다는 언어범주는 인간이다. 무엇이 인간이냐고 묻는, 처음 물음의 근간이 인간성이다. 그건 내게도 그에게도 해당한다. 물귀신의 그는 나를 배려의 대상으로 삼았고 말에 조심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니 일상의 걱정과 이것저것이었다. 카드와 화투가 돌아가는 곳에서 타인은 뭘까. 정치인의 정쟁거리가 정책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범위를 한정시킨다. 그럼에도 황색저널이 팔리는 이유이다. 화투판을 둘러싼 속임수와 호방함 그리고 증오와 인생무상. 간단한 물음과 답인 ‘딴 놈이 최고다’라는 발상. 여기에 나 아닌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과 내가 탐하는 돈을 가진 그만이 있다. 그들은 늘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자라는 자찬하는 뒤에는 ‘생각하지 않는 나’가 깔려있다.

이 공간은 기갈의 공간이고 갈애의 공간이다. 스스로 그만두는 자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화투 한모 넣어주라는 것을 덕담으로 던진다. 생각 없는 그들이 보이는 증오와 또 무력함은 산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삶이 고통스러웠고 힘들었다. 근래를 제외하고 굶주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인간을 속이는 자 인간을 고문하는 자 인간을 그저 물건으로 보는 자들은 인간의 생각 곧 자신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이 일상에서 일을 잘 한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일상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이 천사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천사라고 믿으면 안된다. 장난감이 흉기가 되는 탓이다. 그들은 생각이 없다. 주인이 있을 때 아기를 돌보는 개가 주인이 없을 때에도 그렇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명상은 깊은 생각을 뜻하는데 어떤 집단을 보면 아닌 듯하다.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집단의 그들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다. 토제비의 그들은, 말과 행동이 물귀신의 그분과 화투패의 그분들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출세라는 것이 노름판의 실력으로 여기는가. 할 일이 그득하고 생각의 동력인 책임이 보다 막중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권력은 당연히 통제 받는 것이다. 지켜지지 않는 당위다. 희망이다. 희망은 현재를 생각하게 하는 미래로 향하는 다리이다.

이 생각은 윤리와 도덕을 부르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한다. 마찬가지로 말로 일을 시키면 알아듣지 못하는 분들이 허다함을 만난다. 문해능과 닮았다. 그래도 오십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진보해왔구나 그런 안도감이다. 역사는 인간마음에 층을 쌓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니 생각하는 그들에게 의미를 가진다. 생각이 고통스러운 것은 망상의 동굴에서 벗어나는 그 의식적인 행위가 괴로운 탓이다. 의식은 바탕이 현실이다. 그런 의식적인 행위의 바탕인 책임이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진 사람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망상의 특징, 환상의 특징이라고 한다. 확인할 때의 놀라움은 만만찮다. 그게 회복의 길이고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다. 삶을 즐기는 방법이다. 하찮은 인간이 되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몇 날이 따스했다. 토제비같은 두더쥐가 흔적을 남기고 또 고양이가 뜰에 쥐를 물어 놓는다. 밤새 각기 그들은 그들의 길을 걷는 동물들이다. 인간이 두려워 밤의 동물이 되었다는 설명은 현재의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자기를 생각하고 그런 타인을 생각한다. 밤은 인간 진화의 흔적을 되집는 행위인 꿈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친 육신이 도회지든 산골이든 평화롭기를. 그러나 꿈은 그런 평화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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