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가 점집을 열면
셜록 홈즈가 점집을 열면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03.2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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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있었다. 본 지 오래다. 그 때 바닷가에서 사람들은 굿을 올리고 있었다. 굿은 굿의 영역에서 굿으로의 역할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서 위로한다. 보이지 않는 공유된 ‘괴로운 기억’을 새로운 활력으로 돌리는 행위였다. 방파제를 두고 울리는 징소리였다. 멀리 흰 물결을 남기는 호사한 배가 있었다. 활력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행위였다. 현실의 바다가 내게 환영으로 보일 때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바다에서 그 망상에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할 일은 중력의 공간에 있다.

점치는 행위. 점술에 대해서 연구한 융 심리학자 ‘루이제 폰 프란츠’란 분이 남긴 내용이다. 눈치로 아는 것이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적당히 섞어서 ‘예언’을 행한다. 또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타인에게 쏟는 행위였다. 상식이다. 손바닥 모양이나 태어난 날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보다 환경이나 태도나 예절이 더 많은 것을 결정한다. 인도 빈민층에서 최하층 계급인 그가 바라문의 상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선말 한 집 건너 풍수가 득실거렸다는 기록을 보았다. 풍수지리에 의한 횡재를 기대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조선시대 관상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시대를 달리하는 그 때 이야기다.

비슷하게 어떤 종교단체에서 하느님을 들먹거리며 그리고 건물신축이 그의 뜻임을 내걸고는 ‘헌금’에 대한 단호한 말의 단상을 본다. 그들이 하느님의 정의와 관련이 있고 더구나 지금 이곳에서 세우려는 새 건물이 신의 정의실현인지. 이처럼 닻을 내리고 확증편향을 걸면 어떤 부류의 사람은 말려든다. 행동주의심리학은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사기행위와 관련이 있다. ‘제임스 랜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의 저작물에 나오는 사진이나 실험결과는 초라한 나를 보여준다. ‘콜드리딩’은 속임수에서 상식이다. Y자 모양의 나뭇가지나 쇠막대기를 통한 수맥 찾기의 허구성도 그의 책에서 논구되어 있다.

점술에 의미를 부여하는 분들의 특징은 현대사회에서 불필요한 충동성을 가지고 있다. 충동성의 그들은 그의 내부와 그의 외부 곧 주관과 객관의 경계가 희미하다. 임의적인 인간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특징이다. 사회의 쇠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의 어거지가 일상이 되었다는 증빙이다. 인간성장은 책임이 근간이다. 멍청했던 아이히만을 기억할 것이다. 반면 루카스 프란츠(Lucas Franz)라는 분도 있었다. 그 차이는 고해(苦海)에 홀로 선 인간으로서 책임에 대한 자각이었다. 점술은 위로가 되는 반면 나의 약점이나 나의 턱없는 허망함을 드러낸다. 재현성을 근간으로 하는 과학과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들은 어떤 부류일까. 유아나 갓난아기이다. 억지를 부리는데 당할 방도가 없다. 생물학적 인간을 떠나 그들은 누구인가. 맥락이나 줄거리로 그리고 환경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징징거린다. 성인에게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콤플렉스라고 하는데 이건 다르다. 아직 설익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꽃봉오리도 맺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간이 보이는 특징은 가능한 넒은 범위에서 보고 듣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간 중간 잘라서 옳다거나 틀리다고 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는 교회에 내가 다닌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생각의 근간이다. 달리 하느님이 옳잖아 그래서 내가 다니는 교회도 옳잖아 따라서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는 황당함이다. 당사자는 모른다. 그곳에 근무하는 그들의 면면은 어떤지. 그런 곳에 발을 딛는 내가 무엇인지. 이런 사고는 다음에 대한 예측을 낳는다. 이런 상식적인 생각이 그들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점술. 말년이 잘된다든가 운수 대통할 때를 기다리면 된다든가. 무덤자리를 들먹거리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는 유아나 갓난아기가 답답한 이유이다. 아이는 자란다. 뇌를 사용하고 그리고 영혼의 인간이 된다. 그러니 ‘자라지 않으면’이라는 물음은 섬뜩하다. 그들은 유아취급받기를 좋아한다. 사는 공간이 ‘유아’와 같기 때문이다. 야비한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나온다. 곰이 인간이 되느냐. 인간이 된다. 호랑이가 인간이 되느냐. 아니다. 이는 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다. 곰의 마음에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참고 참는다. 인간 성장의 열쇠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다. 책임의 실감은 생각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생각을 참고 보이는 충동성을 참고 견디면 발생하는 의식이다. 쓴맛 매운맛을 참는 그 과정이 인간성장이다. 성장의 첫 번째 조건이다. 들로 산으로 뛰쳐나간 호랑이는 사냥꾼의 표적이다. 신화가 주는 교훈이다. 아이들에게 참고 생각하는 교육은 일생을 여는 첫걸음이다. 부유해진 사회에서 사라진 느낌이다. 의식의 탄생이 인간의 시작이다. 의식이 날뛰는 무의식을 제어하지 못하면 불안한 사회다. 개인의 불안이 사회로 투사된다.

정성은 의식의 조건이다. 정성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성 들인 냇가가 깨끗하다. 푸른빛이다. 자랑이 될까. 생각하면 자랑은 초라하다. 과거가 자랑스러운 것은 진화하지 않는 인간특성이다. 퇴행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곰으로 되돌아가는가. 곰 다음은 어디인가. 뱀이나 악어인가.

탐정으로 남지 않고 점치는 사람으로 ‘직업전환을 했다’라는 가정은 재미다. 상대를 읽는 방법. 이런 기법이나 수법이 초능력이나 예언으로 둔갑한다. 개인적인 이득을 목표로 삼는다. 개인적 이득을 목표로 두지 않는 것이 어디 이것뿐이냐는 반론이다. 딱히 할 말은 없다. 속임수와 거짓이 계제되어 나타나는 행위가 얼버무려지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있어 온 수법이다. 책임이 결여된 곳에서 흔했다.

생각은 무엇을 근간으로 하는가. 현실이다. 현실은 사실과 다르다. 망상도 사실이다.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망상을 현실로 여겨 산 위에서 뛰어내리면 추락한다. 중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산꼭대기는 지구 중심부와 멀기 때문에 중력이 없다고 하는 그는 추락한다. 환상의 공간에서 중력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환상과 현실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인간이 진화한다. 천천히 등산하면 고산병은 없다는 그는 위험하다. 진화는 적응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망상의 공간에 중력과 시간은 없다.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이득을 구하는 자를 무수히 보아왔다. 장난삼아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자기의 감정이나 행위가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 탓이다. 망상은 진화의 찌끼기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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