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한 생각
생각에 대한 생각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09.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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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잎은 젖어 있다. 잎의 존재는 빗방울이나 이슬과 함께한다. 더위에 울지 않던 매미가 저녁벌레와 함께하는 소리의 아침이다. 남은 열매로 밤이 있다. 대부분의 과일은 그냥 진다. 절정의 여름을 지나면서 그냥 떨어진다. 집으로 오르는 길과 숲은 밤나무 잎과 열매가 수북이 쌓일 것이다. 또 밤을 줍는 긴 시간이다. 이런 감정은 언제 것인가. 그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백만 년도 더된 감정의 현현인지. 보이는 것을 줍는 행위도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역시 그 때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인데.

40년도 더된 LP. 지금 명성 자자한 노인네의 젊은 그때의 음반이었다. 롯시니 서곡. 그때의 소리를 듣는다. ‘바람과 나’라는 노래도 있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말이 일상이었다. 외부로 부터의 정보는 외부에 나가야만 가능했다. 그때의 부조리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느낌이다. 인간이 자기의 근원인 존재와 끊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감정이 끊어지면 타인의 고통에 냉혹하다. 임의적인 행동이 정당화된다. 왜 교회를 다니지 않느냐는 물음을 들었다. 예수가 하라는 것을 거꾸로 하면 기독교인이 되는지.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큰소리의 그들을 보면 가까이 하고 싶은 맘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일생의 많은 부분을 ‘역사적 예수’를 탐구했다. 2천 년 전 예수의 삶은 우리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을까. 물음을 던진 그들의 방식이 피라미드 영업과 닮았다. 스스로 신앙인이라는 주술 같은 행위는 백만 년도 더 된 기억의 흉내이다. 주술은 타인을 악마화한다.

이런 내용을 ‘그’는 거절했다. 거절에 대한 대응이 ‘폭력적’이었다. 거절을 분기점으로 다음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거절에 대한 태도. 빙빙 도는 이야기들. 이들에게 유머를 던지면 더욱 명확하다. 단어의 연결을 설명으로 안다. 문해력이 문제 되는 시대이지만 더욱 문제 되는 것은 문해력을 둘러싼 낯선 행위와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말과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일’에 관한 말과 행동은 방향성을 가진다. 방향성은 출발점이 있다. 의미의 성취를 향한 출발이다. 그러나 나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소리이다. 그게 백만 년도 더 된 어느 지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이다. 머물러 있으니 늘 같은 음이다.

시골의 어떤 분은 농담을 잘 알아듣는다. 유머의 반대편은 말꼬리 잡기이다. ‘동네구장질’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 관여한다. 백만 년 전이라는 것은 내가 관여하지 않았지만 나를 규정하는 행위의 샘 같은 것이다. 그것이 나를 움직인다. 척추동물인 뱀이나 도마뱀의 속성은 잘 알려져 있다. 앞으로만 나아간다. 범고래가 닮은 행위의 동물이다. 자기 행위의 원인이 이곳에서 출발한 무엇이라면 이건 깎고 갈고 닦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유 없는 직진이다. 문해력도 문제가 되지만 보다 문제가 되는 그들의 ‘아는 체’이다. 아는 체는 샘으로 추락한다. 샘의 바닥은 백만 년 전 기억의 실체이다. 심리학은 콤플렉스라고 한다. 콤플렉스는 백만 년 전 행위가 숙성되지 않고 날것으로서 발현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과거는 무엇이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디로 향하는가. 이런 물음이 시대를 가로지른다. 술꾼들의 춘정 같다. 호쾌해 보이는 이면에 보이는 어둠을 아는지. 이것을 분리할 수 있을까. 원심분리기나 크로마토그라피가 내게 있어 비슷하게나마 작동할 수 있을까. 의식이 필요한 이유이다.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나와 무관하게 벌어진 백만 년 전의 기억이라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분들이 이런 나와 백만 년 전의 나를 찾아 구별하기 위해 분투했다. 만만찮은 일이었다. 제련에는 높은 열의 용광로가 필요한 까닭이다.

물비린내 그리고 냇가 둘레에 보이는 동물들의 발자국과 새들의 배설물. 마실 물이 아니다. 관념에 대한 관념. 생각에 대한 생각. 보이는 것에 대한 생각 들리는 것에 대한 생각이 필요한 이유이다. 인간사회에 존재했던 카니발리즘의 부정. 적응하기 힘들게 짜여진 사회 그리고 잔혹성으로 인해 부정하는 백만 년의 꿈. 이성적인 사회가 만드는 평화에 대한 생각. 이해와 이해. 부족한 근육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의 성장이라면 나이에 무엇이 담겨야하는지. 물음은 보이는 그 혼융에서 현실을 구분하고 그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바닷물에서 물고기를 건져내는 것이 첫 번째 생각이고 그 물고기를 요리해서 먹는 그것이 두 번째 생각이다. 그래서 생각의 생각은 형태를 드러낸다. 그저 바다는 바다일 뿐이라는 말은 바다가 던지는 주술에 내가 사라지고 고기도 사라진다.

생각의 생각을 생각한다. 처음의 생각은 그저 보이는 무의식의 풍광이다 두 번째 생각은 무의식이나 이미지의 세계를 거쳐 온 의식이다. 그리고 마지막 생각은 그 생각을 대상으로 하고 나를 주체로 해서 전체를 따지고 따지는 생각이다. ‘내’가 따진다. 흔하게 쓰이나 생각하지 않는다. 곧 임의의 통로를 거쳐 마음으로 흘러들고 마음이 자극되어 충동성이 일어선다. 이런 생각이 사전에 이루어지면 계획이고 일의 가운데에서는 늘 긴장과 집중이다. 끝난 뒤에는 반성이고 ‘참회’다. 단순한 것 같지만 발달되지 않는 그들이다. 그저 선전문구의 도배질이다.

고양이 구출이다. 지붕 위에서 자박자박 소리를 낸다. 그들이 아침 이슬에 젖은 지붕에 올랐다. 내릴 방법이 막연한 고양이가 되었다. 높은 옆 계단에서 뛰어 내린 지붕 위이다. 고양이가 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손과 팔을 몸으로 휘감는다. 그리고 이쪽 계단에서 저쪽 지붕으로 건너는 나무다리를 만들었다. 아침에 지붕에서 쿵쾅거리는 여태 없는 소리를 듣는다. 지붕이 소리를 낸다.

잘못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다. 금언이다. 객관화는 의식의 첫번째 걸음이다. 객관화된 내가 저지른 그 행위를 돌이키는 의식이다. 의식이 희박한 그들은 불가능하다. 아니면 허구의 세계이다. 신뢰의 그들이 아니다. 짤래말이다. 세상일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바람을 잡고(무의식을 건드리고), 특정되지 않는 말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말과 현실이 다르다. 금전적인 이익에 관련되면 사기꾼이고 아니면 거짓말쟁이다. 일상이 거짓말이다.

거짓이 들통났을 때 그들의 반발. 외부에서 보이는 그들은 비참하고 거칠다. 그리고 빈정거린다. 곧 아는 체는 자기의 운명을 쓰레기로 만드는 행위이다. 개인의 운명이 없으니 일생이 흉내다. 그들에게 타인은 속임의 대상이고 전가되는 책임을 지는 자이다. 잔인하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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