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지다 삐치다 토라지다.
삐지다 삐치다 토라지다.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10.0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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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밤공기에 콜록거렸다. 창을 이르게 닫지 않으면 또 콜록거린다. 문턱을 넘은 냉기는 사람을 거슬렀다. 그렇게 기침을 했다. 잔기침이었다. 동물에게 그들의 길을 막으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이 있다. 두려워서 돌아가거나, 버티면서 넘어가면서 적의를 드러낸다. 후자는 뱀과 악어로 알려져 있다. 약간 관념적이다. 말을 던지는 그들의 반응도 만찬가지이다. 돌아가거나 공격적이다. 새들은 그들의 공간에서 방해 받지 않으니 평화스러워 보인다. 혹 매라도 나타나면 산은 시끄럽다. 낚아채는 동물과 낚이는 동물 사이는 소리로서 비명이다. 궤적은 임의적이다. 그런 둘레의 풍광이다.

 

죽음은 무엇일까. 백신을 맞지 않는 이들은 이유를 단다. 돌파감염을 던지고 가짜 뉴스 한 대목을 인용한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열어 보인다. 이들을 꾸짖거나 엉터리임이 드러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거의가 받아친다. 곧 삐친다. 높은 음으로 그저 그렇다고 한다. 적의가 들어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삐치고 토라지는 원인이 타인이라는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 CDC WHO를 찾아보기를 바란다는 말은 귓가에 흐르는 미풍이다. 사실을 거스르는 ‘감정’으로서의 버티는 ‘단순한 말과 행동’이다.

강물 같은 ‘감정’이다. 이 감정은 외부의 것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외부로 폭발하는 것이다. 폭발의 정도가 반대급부를 낳는다. 영화나 소설 음악의 감정은 내가 빠지고 그리고 내가 빠져나온다. 반면 무심한 강물은 길을 가리지 않는다. 막는 모든 것을 헤치고 나아간다. 감정분출이 ‘자기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무작정 지나간다. 부딪히면서 삐친다. 삐치는 그들은 그 감정의 세기에 곤혹을 치른다. 언제까지 이런 감정분출이고 부딪히는 토라짐인가. 돌이키면 참으로 오래전부터 있었고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런 감정폭발과 삐침은 부정적인 면만 있을까. 모든 것은 상대와 짝을 이루며 세상에 등장하는데. 어둠은 빛이 있다는 증거인데. 긍정의 측면은 무엇일까. 먼저 자신의 초라함을 일깨워준다. 준비되든 아니든 무심하든 아니든 감정폭발은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옳다’라는 것이다. 사소할 수 없다. 목매는 ‘현실’이다. 관계의 의식 수준이기도 하다. 그 것이 무엇이고 무엇인지 따지고 따지면 인간에게 현실과 닮은 평행의 세계 곧 영혼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저 삐지는 감정에 매몰되면 육신소멸의 그날까지 옳다는 자기 정당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어난 그 비틀림을 찾는 행위는 거대한 세계의 발견으로 가는 길이다.

그저 인용하는 이들. 충동적으로 말을 뱉는 자들. 생각 없이 덤벼드는 그들의 특징이 이런 감정분출과 반대급부로서의 삐침이나 자기옹호이다. 이와 다른 것은 생각을 가지고 배우는 태도이다. 일의 시작이 배우는 것이고 일의 중간이 배우는 것이고 그 마침이 쓰라리게 배우는 것이다. 아니면 그의 삶에 보이는 이런 감정에는 ‘죽음을 부르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모든 문화는 이런 감정에 대한 단호한 경고를 하고 있다. 흉노는 칼을 한자만 뽑아도 죽임을 당하고 충동적인 인간은 그저 날뛰는 동물임을 시사한다.

죽음이 사라진 붓다는 ‘생’의 대부분을 깊이 생각했다. 그러니 배우는 태도를 잃지 않았고 배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위계질서를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어이하여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적으로 그를 탐사한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아름다움은 심연에서 표층으로 조심스러운 표출이다.

그저 옳다는 그들은 흔하다. 거짓말은 상식이다. 흔쾌히 자기주장을 수정하고 자기행위를 반성하지 않는다. 종교는 반성을 토대로 삼는다. 종교를 내세우는 그들을 물끄러미 본다. 물리학에서 남겨진 방정식은 조건 지워진 것이다. 조건을 잊어버리면 세상이 그 물리학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착각이다. 착각하는 이들은 분노한다. 분노의 내용은 그저 옳다는 것이다. 고개를 숙여 자기를 볼 때이다. 충동의 세계는 닮았으나 낯선 세계이다. 단단한 자아는 이를 발견한다.

백신에 관한 가짜뉴스를 들먹이는 그에게 짜증이었다. 그 짜증에 대한 반응이 내게 빈정거림이었다. 그런 관계는 끊어진다. 내가 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병원에서 독감에 항생제를 주는 데 왜 코비드-19에는 처방하지 않는지. 요즘도 유정란으로 백신을 만드는지. mRNA 방식이 무엇인지. 대개 말은 중간에 잘려지고 말하는 상대를 향한 빈정거림이다. 참 우습다. 그런데 웃기에는 그렇다, 가짜뉴스에는 유명하다는 바이러스 학자가 어디에서 발표했다는 ‘글’도 있었다. 그런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식의 논의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으로 뿌리째 흔들릴 것이다. 병든 마음에 우울증 약을 처방받을 뿐이다.

무작정 뱉는 그 감정은 ‘나의 존재’ 같은 것이니 ‘옳다’고 뻗댄다. 감정의 부정은 ‘자기의 죽음’이다. 인간이 죽고 사는 부활이 상징적이다. 또 필요한 이유이다. 죽지 않으니 태어 날 수 없다. 반대의 모든 것을 물리친다. 독재자들의 횡포를 기억하는가. 부역의 신문을 기억하는가. 그들의 지금은 어떤가.

새들도 날고 고양이가 햇볕에 나선다. 매번 가을이 다른 이유는 지난번 가을이 죽고 봄을 지나 다시 부활한 가을이기 때문이다. 그 가을과 지금 가을은 시간격차를 두고 있다. 같은 언어이지만 다른 가을이다. 지난번 나와 지금의 나를 감정적으로 분리할 수 있을까. 분리가 가능한 삶이 모두에게 가능하지 않아도 내게 가능한지. 그러면 그 꽃과 또 그 때의 그 꽃을 분리하고 나의 행위의 그때의 감정과 그걸 되돌리는 지금 나의 감정을 객관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성찰의 전제조건이 객관화이다. 이런 성장이 아마 인간목표가 아닐는지. 인간진화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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