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적 공간 그리고 분절 – 이미지의 세계
공시적 공간 그리고 분절 – 이미지의 세계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1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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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게 꽃은 핀다. 단풍이다. 같은 신갈나무라도 수령과 위치에 따라 빛은 다르다. 다른 빛깔이 모여 단풍 들었다. 단풍 아래 분주하다. 농기계를 쓰는 사람들은 들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날짐승과 들짐승의 보스락 거리는 소리다.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 무리지어 한 마리처럼 난다. 마당에 쌓여 있던 통나무는 베어지고 쪼개져 제자리에 쟁여졌다. 눈이 오고 추위가 닥칠 것이다. 벽난로는 내부를 비우고 닦아두었고 겨울 냇가 얼음을 깰 큰 쇠창과 그리고 물을 뜨기 위해 건질 얼음덩어리를 위한 채도 준비 되었다. 길은 눈으로 덮일 것이고 길은 드문드문 끊어질 것이다. 눈 아래 주검이 있다는 시인은 어느 자락에서 단풍을 보고 있을까. 다들 소원해졌다.

 

어제와 오늘의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그때와 지금의 구분은 가능한가. 구분이 가능한 공간과 구분이 가능하지 않는 공간의 차이는 또 어떠한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이 실은 있기나 한 것인지. 왜 구분하는가. 일상이면서 일상이 모인 인간의 역사는 실재하는가. 그러나 우리 둘레에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것들이 늘려 있다.

쏟아지는 말에 근거 없는 것이 허다하다. 실체 없는 말의 난무이다. 정감록이 그러하고 이천년도 더된 어떤 책을 지금도 글자 그대로 읽는 괴이함이다. 미래를 예언하고 지금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는다. 그의 ‘과학적 설명’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만 땅에서도 내리고 지구는 평면이며 지구 내부는 비워 있다. ‘분명하다’는 증거를 댄다. 그 때의 미학이고 그 때의 이야기가 시간을 넘나든다.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약속을 지킨다’는 그들이다. 이들에게 시간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논문집을 늘어놓고 그가 옳고 정확하다는 증명 이면에는 시간이 사라진 공간이 있다. 분열의 사람을 만나거나 지나치게 똑똑한 그들이나 확신에 찬 말의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말에는 시간이 사라졌음’을 발견한다. 시간이 없는 공간 곧 공시적공간은 본디 마음이나 신화와 꿈과 같은 것을 대상으로 삼을 때 사용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미학은 공시적 공간에서 현실로 ’과정‘을 거친 분출이다. 그런데 ’임의적‘인 인용은 이미지의 공간에 그저 머물러 있다는 증빙이다. 이미지는 강렬하다. 이미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인간 신체가 주는 감각도 상실케 한다. 이 공간은 단단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탐구하는 영역으로 되어있다. 그저 말이다. 그들은 그저 말이고 그저 말은 정신과에서만 환영한다.

약속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이다. 시간과 장소가 특정되고 내용이 특정된다. 시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 그것이다. 물리적인 엄밀성과 다르고 달력의 명목적인 구분과도 다르다. 의식이 흐릿하거나 의식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분들의 말은 시간이 사라진 옛터에서 들리는 늑대소리 같은 것이다. 보는 자와 듣는 자에게 허잡스럽고 초라하고 비굴해 보이는 그런 말과 행동의 본인은 분노와 정의이다. 이들에게 사실과 사실관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공시적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접어드는 나이가 소년소녀 때이다. 갓난아이에게 시간은 없다.

예수는 옳다. 부처의 말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장소와 대상을 잘 살펴서 읽어라, 두말은 완연히 다르다. 오래전 글이라 따져도 모를 내용이 태반이다. 말 그대로 옳다고 우기는 것은 현실에서 공시적 공간으로 이동이다. 이들과는 사는 공간이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사과를 보면 사과의 면이 있고 면에는 상대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다. 사과의 속도 상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 단언적이고 사실관계에 의한 뒷받침이 없는 ‘그들의 말과 분노’가 그의 개인적인 공간에 머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고 오는 이가 가끔 있다. 그들에게 개인은 속임수의 대상인가. 주인공 둘레의 그저 무엇인지. 인간은 이런 약속을 과정으로 성장한다.

공시적 공간의 그들이 픽션의 모습을 띄고 등장한다. 픽션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이 야기한 것이 이웃나라의 ’지하철 사린사건‘이다. 공시적 인물로 지금도 떠도는 ’방황하는 유대인‘ ‘생제르만 백작’이 있다. 풍광으로 ’푸른꽃‘이다. 신화화한다는 것은 역시 그런 공간으로 이동이다.

방황하는 유대인. 생제르망 백작. 푸른 꽃. 이렇게 사회화된 그들과, 공시적 공간은 감정의 샘이고 판타지 그 자체이다. 일상의 시니피에로서 공시적 공간이다. 곧 의미론이다. 의미론의 마지막은 시간붕괴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이런 시간붕괴는 ‘현실의 종언’이다. 미학을 하는 분들이 특히 조심해야할 일이다. 아름다움은 저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층을 거치면서 왜곡된다. 많은 돈은 추한 것도 아름다움으로 둔갑시킨다. 시간의 구분은 객관성 곧 그 시대를 가로지르는 윤리이고 도덕이다. 시간이 윤리와 도덕을 축으로 삼는다. 그 시간은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는 사람을 만든다. 코페르니쿠스의 사람이다. 각각이 행성이다. 너와 나의 탄생이다. 분절을 통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움직이는 ‘거대함’이다.

시간은 곧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의 중요성은 무의식적인 사람이 더 이상 무의식에 머물지 않고 빛으로 나오는 장치이다. 단언의 그들은 빛이 필요한 이들에게 내리는 저주이다. 그들에게 타인은 저주받고 무지하고 죽어야하는 대상이다. 그들은 질투한다. 그들에게 소통은 없다. 지식여부를 떠나서 생기는 현상이다.

현실 아래 감정으로서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공시적 세계이다. 그러니 두 세계를 조화롭게 사는 내가 ‘삶의 핵심’이고 ‘삶’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내 안에 그런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당에 나가 톱밥을 쓸어 밭으로 간다. 밀림 같은 공시적 공간의 탐험을 위해서 현실에서 사전 준비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냥 밀림에 발을 디디면 물리고 뜯기고 짜증나고 그곳의 귀신이 된다. 그저 흉내인 과학적인 언어의 재탕으로는 접근 가능하지 않다.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이 말도 역시 그곳의 언어이다.

어른의 생각은 현실을 생각하고 시간이 사라진 그 공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 현실로 탄생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어른은 이런 것이다. 그저 속임수의 대상으로만 타인을 여기고 있는지. 약속이 그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노름판이나 사기꾼에게 대상은 그저 그렇다. 일전에 약속을 그가 그의 아내와 함께 했다. 이쪽에서는 날을 맞추려고 이것저것을 다하고 연락했더니 나를 타박했다. 그렇게 놀러가고 싶으냐고. 이후로 그와 만난 적이 없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이런 공간에 사는 ‘카피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두 세계를 걸쳐 있는 것을 메타라고 한다. 공시적 공간에서 현실로의 이행을 분절이라고 한다.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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