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화의 미술사이렌] ② 세라핀 루이 Séraphine Louis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② 세라핀 루이 Séraphine Louis
  • 권용화 칼럼
  • 승인 2021.11.15 1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

빛나는’
제도권 밖의 미술가, 별이 되는 사람들

 

② 세라핀 루이 Séraphine Louis

들풀은 꽃을 피우면 안 되는가
들풀은 열매를 맺으면 죄가 되는가
들풀은 들판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가

어디 한군데 다쳤다고 시름시름 시들어버리는 정원의 꽃들에 비하여,
풀들은 얼마나 수많은 고된 숙명을 받아들이며
후손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는 게 아니라 꺾여 왔는지

 

“나는 기도하듯이 그립니다.”
“간특하지 않음, 잘난 체하지 않음, 순수함”
- 이자벨 스파크Isabelle Spaak | 저널리스트

헨리 다거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세라핀 루이’는 그녀가 살던 지명을 따라 ‘상리스의 세라핀 Séraphine de Senlis’으로 불리기도 한다.

1864년 9월 3일 태어난 세라핀은 7세 이전 부모를 모두 잃고, 큰 언니 손에 자라며 일찍부터 어린 손으로 양치기 등의 노동을 했다. 10세 때 성당 신부의 배려로 들어간 학교에서 문 뒤에 숨어 미술 수업을 몰래 엿들었다는 일설이 있지만, 아버지가 마을을 떠돌며 시계를 고치는 장인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녀가 물려받았을지 모를 손재주가 짐작될 뿐, 그녀가 가진 어떤 것도 예술적 환경, 혹은 어린이가 받아야 할 돌봄과 거리가 멀었다. 13세가 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의 집이면서도 남에게 밀어내는 일들 – 마룻바닥 박박 문질러 닦기, 주기적으로 창틀과 창문 닦기, 세탁물을 삶아 비틀어 짜기, 놋 제품 광내기, 손에 선지를 묻혀가며 소시지 혹은 순대 만들기 같은 온갖 허드레 일이었다.

 

‘행복하고 일이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수녀원에서 20년간 머물다.

세라핀을 고용한 가정 혹은 수녀원에서 그녀는 이상한 외양과 행동으로 조롱거리였다. 길을 걸으며 내내 혼잣말을 했고 옷차림이 칙칙하고 단정하지 않았으며, 산만하고 변덕스러웠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좋지 않은 평판 때문에 20년간 일한 수녀원에서 나와 홀로 마을의 다락방에서 살게 된 이후였다.

그것은 1905년의 일로, 세라핀의 말에 따르면 “천사가 성모 마리아를 위해 그림을 그리라는 사명을 전달해 주었다.”고 했다. 그날로 그녀는 종이뿐만 아니라 각종 병, 도자기, 널빤지, 가구 위에조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먹을 것, 입을 것, 땔감 살 돈과 집세까지 밀려가며 주로 흰색 물감을 사들였다.

꽃과 나뭇잎의 즙액, 이끼, 흙, 가축의 피, 성유, 성당의 촛농까지 – 그녀에게는 ‘영감에 의지해 만들어내는’ 어떻게 해도 변색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안료 제작 노하우가 있었는데, 그런 그녀도 흰색은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세라핀은 산업용 도료인 ‘리폴린 도료’를 이용해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아직도 그 배합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다.)

세라핀 루이 〈크림항아리 Pot a creme〉 1915년 경 | 테라코타 도자기에 리폴린 도료
높이 14㎝, 직경 10㎝ | Musée d'Art et d'Archéologie

은총은 1912년 세라핀이 50세가 다 되어 찾아왔다. 피카소를 발굴한 미술사가이자 미술품 감식가 빌헬름 우데 Wilhelm Uhde가 주말 휴식 차 상리스의 전원 주택을 빌림으로써, 그녀 인생에 비로소 이변이라는 것이 생겼다.

우데는 막 파리에서 역시 예술적 배경이 취약한 세관원 출신 화가–앙리 루소 Henri Rousseau를 소박화가(Naïve artist, 素朴畵家)로서 성공적으로 주목받게 하고 온 직후였다. 그런 우데는 모임에 초대 받아 갔다가 판자에 그려진 한 신비스러운 사과 그림을 보았고, 그것이 자기의 전원주택 허드레 일을 하러 오는 하녀 세라핀의 그림임을 알고 전율했다. 우데는 망설임 없이 전격적인 후원을 시작한다. 세라핀은 더 이상 일을 나가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했으며, 작품들은 족족 우데가 사들였다.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세요.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요.”

세라핀은 우데의 표현대로 “아름다우며 살아있는 것 같은”, “보석 같은”, “이 세상에 최초로 존재한 것 같은” 열매와 나무와 꽃들을 화폭에 구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세 시대의 깊은 신앙심을 지닌” 그녀 영혼의 체현이었고 그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농밀한 과일이 가득 익어가는 천국의 정원이었다.

(좌) 세라핀의 면모는 빌헬름 우데의 기록에 힘입어 다수 남아 있지만, 그녀의 예술 활동은 전쟁으로 인해 희생됐다. 우데는 세라핀이 1934년 사망했다고 썼지만 의료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942년까지 분명히 생존했다. 그녀는 세계대전 와중 굶주림 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말년에 유방암으로 고통 받았다. 영화 《세라핀》(2008, 프랑스)에서 욜랭드 모로와 울리히 터커가 세라핀 루이와 빌헬름 우데를 연기하고 있다.

(우) 세라핀 루이 <까막까치밥 나무열매 Les cassis> 1915
캔버스에 리폴린 도료 | 24.5 × 19.4㎝ | Musée d'Art et d'Archéologie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찬양한 신은 너무나 빨리 구원의 손길을 멈추었다. 그녀의 남은 생애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얼룩졌다. 1914년 8월, 독일인이었던 우데는 쫓기듯 한밤중에 프랑스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고, 상리스 마을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망쳤다. 오직 세라핀만이 마을에 혼자 남았다. 영화 《세라핀》에는 전쟁 와중 가게 유리창을 박살내어 흰색 물감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1924년 작 <들꽃 Fleurs des champs>과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한 세라핀 루이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늙고,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비참함을 버텨내며, 1927년 우데가 세라핀을 찾아 상리스로 갔을 때 감격할 만큼 성장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그러나 두 예술적 동지의 행복은 다시 꽃피지 못했다. 더 큰 캔버스에 더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세라핀과 대조적으로, 후원자 우데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세라핀의 무아지경과 정신적 망상은 통제될 수 없는 방향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감당도 못할 큰 저택을 작업실로 계약해 버리는가하면, “전쟁터에서 자신의 약혼자가 살아 돌아왔다”는 망상에 빠져 값 비싼 웨딩드레스와 신혼집을 장식할 소품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러던 1932년의 어느 날 정신이상자 수용소의 하얀 차에 실려, 세라핀은 짧았던 예술 인생을 마쳤다. 그녀는 병원에 갇혀 2차 대전 중에 다른 정신이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돌봄을 받지 못하며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1942년 사망했다.

(좌) 세라핀 루이 <풍성한 마거리트 꽃 Les grandes marguerites> 1929~1930년
캔버스에 리폴린 도료 | 130.5 X 195.5cm | Musée d'Art et d'Archéologie

(우) 세라핀 루이 <붉은 나무 Arbre rouge> 1928~1930년
캔버스에 유채 | 130 X 193cm | Centre Pompidou

우데와 대화에서 그녀는 자신은 일찍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숲과 들판과 강가를 헤매며 씨앗의 발아를 관찰하고 흐드러지고 엉킨 꽃들, 열매들, 나무들과 이야기며 어린 시절은 보냈노라고 술회한 바 있다. 20여년 간의 수녀원 생활 역시, 노동 아니면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었으리라. ‘고립과 소외’는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고립 중의 행동 – 비록 망상(천사)이 시켜서 시작했다는 그녀의 그 모든 창작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얼마만큼이나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했는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날 보세요, 날 봐 주세요!” 그녀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대천사 세라핀 처럼 사람들 앞에서 날개를 펼쳐 날고 싶지 않았을까? 물론 내 자의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안네의 일기》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도대체 열세 살 먹은 소녀의 고백에 흥미를 가질 사람이 누가 있겠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야. 나는 쓰고 싶고,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어.
‘종이는 사람보다 참을성이 있다’는 말이 있지.…이제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어. 그것은 내게 참된 친구가 없기 때문이야.” - 1942년 6월 20일(토), 안네 프랑크의 일기 중에서

세라핀의 작품들 속 나무는 그녀가 갖지 못했던 아이를 대신하듯, 한 생명으로 움트고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지에 또 가지를 뻗어 공중으로 퍼져 나가며 그녀와 그녀의 후손을 대신하여 번성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인류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번성의 열망과 비밀을 품은 생명의 나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체현해 낸다.

세라핀 루이 <생명의 나무 L'Arbre de vie>
1928 | 캔버스에 리폴린 도료 | 112×144㎝ | Musée d'Art et d'Archéologie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미술 제도권 밖에서 창작하는 것

오늘날, 미술가들은 여전히 대다수 학교-아카데미에서 배출되며, 그곳에서 미술 시장에서 살아남는 자기관리법, 이를테면 석·박사 과정 진학이나 유학 혹은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 졸업 후에도 이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법’에 대해 배운다. 덴마크의 한 미디어아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작품을 하나 창작했으면 생애에 사본을 절대 4개만 만들어 한정판으로서의 가치를 높일 것”을 가르친다. 프랑스 파리 에꼴 데 보자르는 자신들의 첫 번째 사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저희 보자르 드 파리는 교육 및 예술적 실험, 역사 및 현대 컬렉션의 전시 및 보존을 위한 장소이자 출판사입니다. 17세기에 설립된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의 상속인 ‘루이 14세의 세기 이래, 프랑스 문화부 산하인 학교의 주된 소명은 높은 수준(de haut niveau)의 미술가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영어로는 high-level로 안내해 놓았다; Its first mission is to educate and train students planning to devote themselves to high-level artistic creation.)

‘de haut niveau’, 혹은 ‘high-level’의 미술가는 어떤 미술을 하는 사람을 말할까?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교수들과 남학생들의 태도, 여학생은 누드모델도 쓸 수 없는 환경에 염증을 느낀 미국 화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1844~1926)는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를 믿고 여동생을 포함한 여러 보호자들과 함께 먼 땅을 건너 왔지만, 에꼴 데 보자르는 당시 여성을 입학시키지 않았다. 드가의 화실에서 발견된, 오랫동안 드가의 그림으로 추정된 <머리를 빗는 소녀>가 사실은 메리 카사트의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 메리 카사트는 살롱전 문화에서 배격까지 당하고, 염증을 느끼다가 ‘살롱전 낙선자들의 전시 모임’에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그 모임이란, 후세에 인상파 화가들이라 불리게 되는 이들이었다)

미술인들 역시 사회의 일원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과 자세가 권장되는가? 어떤 하이-레벨의 마음 자세를 하고 비전을 보여야 미술을 할 자격이 있다는 걸까? 미술을 하는데 사교적인 활동은 왜, 얼마만큼 병행해야 하는 것일까? 미술계의 무엇이 개개인을 인사이더(Insider)와 아웃사이더(Outsider)로 만드는가?

세라핀 루이 <천국의 나무 L’arbre de paradis>
1929~1930 | 캔버스에 리폴린 도료 | 130×195㎝ | Centre Pompidou

오늘날 헨리 다거는 작품의 방대함과 그가 ‘독학한 미술가 Self-taught Artist’라는 점으로 인해 미국 ‘아웃사이더 미술가Outsider Artist’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며, 세라핀 루이 역시 ‘나이브 아트Naïve Art’ 혹은 ‘아르 브뤼Art brut’, ‘독학한 미술가 Self-taught Artist’라는 개념을 적용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brut는 가공되지 않은 거친, 날 것의 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좀 더 다루려 한다.)

그들의 그림 중에는 분위기가 기이하고 이상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므로 편안히 쉬고 싶고, 남을 초대해 자신과 가족들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그 무엇을 보여 줄 거실에 걸기엔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의 침대 머리맡에 일찌감치 조선 시대 민화 <어룡도>를 정성스럽게 걸어 놓아 효험을 봤다는 분을 보았는데, 삶에서 어떤 기복起福을 추구하고, 초대받은 다양한 취향의 사람 중 그 누가 봐도 ‘거슬리지 않을 만한’, 그런 그림이 필요하다면 그곳에 이들의 그림은 어울리지 않는다.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왈츠가 흐르는, 그런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득 찬 무도장에서 헨리 다거나 세라핀 루이 같은 이들은 영원히 ‘벽의 꽃Wall flower’(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서 춤을 추지 못하는 인기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을 위해 가시를 빼버리고 향기를 조작한 꽃과, 필요에 의해 둥글게 깎아버린 나무에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문득 우리는 우리가 방금 발로 짓이겨 뭉개버린 자리에서, 얼음을 깨고 움튼 작은 들꽃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은 헤어졌지만 진정으로 사랑했던 옛 연인의 영혼을 발견하는 기적을 경험한다.

낡은 누더기 군복, 빛바랜 하녀의 작업복을 걸친 그들이 우리의 진정한 연인이며, 땅의 보석이 아닌 하늘의 별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 다음 달에 계속


[주요 자료 출처 및 참고 문헌]

논문
•"A self-taught naive painter prodigy's tormented ascent to fame" Isabelle Spaak, 2013년경

사이트
Musées de Senlis www.musees.ville-senlis.fr
Centre Pompidou www.centrepompidou.fr
National Gallery of Art www.nga.gov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www.mam.paris.fr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Grand Palais www.rmngp.fr
wikipedia www.wikipedia.com


권용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