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지 않는 사람들
바뀌지 않는 사람들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1.12.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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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깊다. 둘레로 집을 지은 분들은 지난밤 불던 바람소리를 어찌 견디었는지. 마당에서 계곡으로 열 걸음을 내딛는다. 칼 부딪히는 소리 창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온갖 울음이 깃들어 있다. 그저 그렇게 또 집을 짓고 그 곳이 터전이 된다. 바람 없는 아침햇살에 고양이 두 마리가 깨끗한 털을 벼리고 있다. 작년 달력을 펴서 올해의 일과 비교하면 내용이나 일자가 대동소이하다. 몸살을 앓은 날까지 비슷하다. 이곳에서 변화는 무엇이고 언제 일어나는가.

글과 말을 통해 우리는 바뀐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고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이런 분들에게 말을 던지면 무심코 뱉는다. 맥주집에서 떠도는 말과 달리 그건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정당화한다. 이들은 너와 나의 구분이 안 된다. 알려져 있다. 말을 모르니 너와 내가 없는 것이고 정당화시키는 나를 개선할 여지가 없다. 유아적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진화는 구분하여 성장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 뒤에는 너와 나의 구분이 있다. 이 말은 윤리적인 규정이다. 인간 이전에 형성된 ‘윤리’이다. 그러니 변화는 구분하는 고통스런 진화의 도상에 서는 것이다.

꿈은 대단히 낯선 장소에서 벌어지는 난장이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난장판인 죽음’이다. 나의 생활 무대는 현실이다. 현실과 꿈의 경계는 층간 논리가 작동한다. 층간 논리는 상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해석이라도 부분적이고 조건 지워져있다. 단순하게 꿈에 말려든 그들의 미래는 분명하다. 이곳저곳에서 더러더러 꿈을 이야기한다. 꿈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강력하다. 다른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보이는 그대로’를 이해라고 여기니 난장판의 세계로 미끄러진다. 꿈을 그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심층심리학’이나 ‘분석심리학’이다. 장난삼아라도 말아야 할 것이 이런 해몽이다. 이런 것들이 ‘예언’처럼 떠돌아다닌다.

이해의 근본은 섹슈얼리티를 제거하고 듣고 보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뿌리를 두면 모든 것이 정해진다. 내가 맞고 너는 틀린다. 막말의 인간들은 여기에 있다. 이런 태도로 사물을 본다.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의 경기나 공연 모습에서 냉정하게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상품 이면에 이것을 깔아둔다. 제거하면 상품에서 기능이나 성능 그리고 여태 보지 못한 아름다움도 본다. 브랜드에 얽매이지 않는다. 아날로그 라디오에 깔려 있는 화이트 노이즈를 기억하는지. 닮은 섹슈얼리티는 나의 내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집중이 필요한 이유이고 집중해서 들으면 상대로부터도 나타나는 섹슈얼리티가 역시 나를 힘들게 한다. 나와 남으로부터 듣기위해 집중한다는 그 자체에 피로가 쌓이는 이유이다. 집중한 대가는 고통스런 공감이다. 그의 현재를 나의 현재가 이해하는 공감이 ‘희망’이다. 내가 나를 공감하고 내가 그를 공감하고 내가 세상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 끝은 인간 진화의 마지막일 것이다. 그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인간성이 사라진 인간을 짐승 같다고 한다. 짐승은 사과하지 않는다. 짐승에게 ‘씨’자를 붙이는가. 악마에게도 ‘씨’자를 붙이는가. 공감의 정도가 낮으니 상대를 두고 옳니 그러니 한다. 윤리기반이 무너졌으니 거짓말 모함이 아무렇지 않게 날아다닌다. 사람을 총칼로 죽인 그들이 그들을 정당화한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어야하는데. 그의 뜻이라는 게 섹슈얼리티다. 그만 옳고 그만 아름답다. 옳은 그들이니 부정한 돈은 없다. 자랑할 돈은 있어도 불의를 동원해서 축적한 돈은 없는 것이다. 광주. 그때 죽거나 다친 사람가운데 자상이 많았다. 칼로 사람을 찔렀다는 것이다. 도살에도 동물의 고통을 경감하는 장치가 구현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을 어떡하면 보다 더 고통을 줄까 생각한 그들에게 무슨 ‘대접’인가. 당한 자들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는 말들. 80년 90년 2000년 2010년 2021년 세월은 개인에게 무심한데 짐승 같은 그 행위는 이 정도의 시간에도 철이 들지 않는다. 사건을 돌이키면 그 때의 모습은 지금의 고통이다. 현실의 고통이다. 이런 것을 직시하는 것이 이해를 넓히는 것이다.

고양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양지바른 쪽이다. 역사는 당시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고 한다. 학살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바랬던 사람들. 그 때도 종교는 있었다. ‘어떤’ 종교지도자는 그 도살자를 축복하는 조찬기도회를 열었고 방송은 생중계했다. 어떤 신문은 그를 ‘인간’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대문짝하게 ‘명망 있다’는 시인의 글을 실었다. 말이 의미를 잃은 시대였다. 그들에게 자유니 정의는 ‘레토릭’에 불과했다. 레토릭의 그들은 격한 감정의 집단이었다.

이런 이들을 쉽게 알아보는 방법이다. 자기의 생각과 말을 자신과 일치 시키는 그들이다. 새처럼 날아다니는 생각에 내가 새일 수 없고 내가 새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집안의 분위기가 되고 문화가 되면 3대가 망한다는 ‘가문의 저주’가 된다. 노름꾼이 그러하고 사이비 종교가 그러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한다. ‘어떤 생각’이 ‘나’일리 없다. 실감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은 대상이다. ‘어떤 생각’이 내게 떠올랐다. 마찬가지이다. 길에서 보는 풍광이 나일 수 없다. 잠깐 고개를 돌리는 그곳에 있는 풍광이 내게 다가서더라도 그게 나 일리 없다. 나를 변화시킬지라도 ‘나’일리 없다. 순간 떠오른 이미지나 생각을 ‘대상’으로 여기는 첫 번째 단계가 내게 사라지면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된다. 벗어나면 다행이고 성장이지만 벗어나지 못하면 그건 ‘미치는 것’이다. 국가주의, 전체주의자 파시즘 나치즘은 여기에 근간을 두고 있다. 지식이 내가 되는 것이고, 그 지식이나 권위 뒤에 숨은 그들이 권위이고 지식이다. 그저 레토릭을 전면에 내건 폭력이다. 섹슈얼리티는 이렇게 레토릭을 전면에 내건 폭력이다. 그러나 지식과 생각은 냇가를 건너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이런 화이트 노이즈를 없애는 필터로서, 윤리이다. 이웃 밭둑에 자란 콩 서리 하지 말라는 말을 알아듣고 그만두는 행위에는 윤리가 있고 사실관계가 있고 논리로서 또 윤리가 있고 또 그 윤리가 나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말을 알아듣는 그 근간에는 이런 윤리가 있다. 이게 없으니 지위를 곧 나의 권력으로 착각하고 내가 권력으로 행세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감시이고 또 드문드문 스스로를 권력과 동일시하는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광주에서 죽은 자들의 눈물 앞에서 선 가족에 대한 ‘Clamp down’은 어떻게 작동했는지.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그 말보다 탐해서 만들어진 부가 자랑인 곳에서 무슨 윤리가 있는지. 윤리 없는 종교가 성립은 하는 것인지. 이런 물음은 자본이 극성인 곳에서 더 필요하다. 저기 보이는 산의 소나무는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각 위치에 있다. 좋은 자리의 큰 나무만이 소나무가 아닌데. 윤리는 층간논리를 구성한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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