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화의 미술사이렌] ③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ⅰ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③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ⅰ
  • 권용화 칼럼
  • 승인 2021.12.1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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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화의 미.술.사.이.렌 >

빛나는’
제도권 밖의 미술가, 별이 되는 사람들

 

③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ⅰ


2013년 광명에서, 나는 한 수묵화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년째 되었을 때, 동아리 언니들은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충 이랬다.

“너는 작가야, 우리는 핫바지고!"

심지어 그림 실력이 정체되어 있던 한 언니는 한쪽에서 울기 시작했다. 그해 우리 동아리는 공공예술프로젝트를 맡아 전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림을 내지 않겠다고 까지 했다.

난처한 일이었다. 나는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앙리 루소는 직업이 세관원이었어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일요일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일요화가’라고 불렸어요. 제가 오히려 입문자이고, 언니들은 여기서 2~3년 이상 그림을 그리셨어요. 나는 언니들이 좀 더 자존감을 가졌으면 해요. 금요일에 나와 그림을 그리는 우리는 ‘금요화가’에요.”

하지만 반응은 차가왔다.

어찌어찌해서 그림을 안 내겠다는 언니까지 설득해서 전시회를 열고, 친정어머니를 초대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어머니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화장에, 몸에는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엄마, 이렇게 긴장하고 오실 필요 없는데. 이건 그냥 마을 동아리에서 그린 들꽃 그림을 복도에서 전시하는 거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언니들은 너는 대학에서 조각도 했으니까 낙관도 만들 줄 알 테니 내 것도 좀 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 때는 적당한 말이 안 떠올랐지만, 지금은 대답할 수 있다. 조소과에서는 낙관 만드는 수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도 수업은 대개 한 학기 15시수, 1시수는 많아봐야 4시간이다. 15×4는 60시간이 나오고, 이를 하루 24시간에 끼워 맞추면 자는 시간을 6시간으로 치고 60÷18시간 하면 고작 한 과목 당 한 학기에 3~4일을 배우는 시간표인 것이다. 4일×2학기×4년을 배워본들, 32일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지금 뉴욕에 가면 한 달 만에 현지 기업 입사에 합격할 수 있는가? 아니면 혹은, 외국인이 한 달간 한국에 체류한다고 우리나라 말을 통달할 수 있는가?

물론 개인적 차이도 있고 각별히 조형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창작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얼마나 시간과 열정을 할애 해가며 창작에 몰입하는가, 또 얼마나 ‘배움’에 열려있는가 닫혀있는가의 문제이지, 소위 ‘학문의 전당에 가서 하이 레벨의 교육’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감히 던지는 내 생각이다.


1938년, 뉴욕 주 후식 폴Hoosick Falls. ‘토마스 잡화점’ 쇼 윈도우에 관절염으로 손이 아파 자수를 놓기 힘들어진 할머니가 자수 대신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뉴욕의 토목기사이자 미술 수집가 루이스 J. 칼도어Louis J. Caldor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림들을 누가 그렸는지 물었다.

〈크림항아리 Pot a creme〉  루이스 밀러Louis Miller 미술관(뉴욕 주 후식 폴) 소장
〈토마스 잡화점〉 루이스 밀러Louis Miller 미술관(뉴욕 주 후식 폴) 소장

“그랜마(할머니) 모지스요”

루이스 J. 칼도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구매력을 생면부지의 할머니를 위해 썼다. 그림들은 크기에 따라 3달러에서 5달러 사이였다. 그는 그림이 더 있는지 궁금해서 그 길로 그랜마 모지스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후식 폴에서 조금 떨어진 그리니치의 한 농장에서 살고 있었다. 모지스 할머니-본명,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가 발견(be discovered)되는 순간이었다.

 

링컨이 당선된 해에 태어나 
케네디 재임 시절까지 장수한 행운의 할머니
“달리 말하면, 그녀의 그림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건강함이 있었다.”
- Karal Ann Marling

모지스Moses는 남편의 성으로,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미국식 발음 맞다. 이 부부는 1905년 뉴욕 주 이글브리지에 정착했는데, 이들의 성이 모지스-모세였기에 이들이 정착하는 터마다 성경의 모세가 120세에 사라졌다는 ‘네보 산Mount Nebo’이라는 이름이 붙어 따라 다녔다.

이름을 하사 받은 터가 내린 축복인지 그랜마 모지스는 101세까지 장수하여,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정말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일을 잘 하고, 솜씨가 좋았으며, 생활력과 독립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앞서 소개한 헨리 다거와 세라핀 루이가 고독한 내향형 인물이자 심리적으로 약간 병을 앓고 있었다면, 그랜마 모지스는 대중들의 마음에 편하게 다가가는 작품과 입담을 지닌, 관계 지향적이고 외향적인 인물이었다. 짧은 인생을 불행하게 살다 간, 그리고 그것이 후세에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대중에게 소개되는 그런 예들과 달리(나 역시 헨리 다거와 세라핀 루이를 좀 낭만적으로 포장했다.), 그녀는 좀 더 우리 생활과 가까우며, 이미지도 위인이나 기인, 천재라기보다 친근한 이웃으로 남는다.

공간을 초월하면, 그녀가 살았던 101년의 시간은 우리나라의 불행한 시절과 겹쳐 있다. 이 점은 나를 신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가 살았던 삶은, 주어진 현실에 억척스럽게 적응해 낸 우리네 어머니나 할머니와 닮아있다.

(좌) 그랜마 모지스가 유명한 팁-업 테이블에서 작업을 하는 모습 | 1948년 6월 | 사진•오토 칼리르 Otto Kallir
(우/위) 그랜마 모지스가 맨처음 그린 유화 그림 <벽난로 덮개FireBoard> 1918  98.4×82㎝
(우/아래) 직접 그림을 그려 1920년경 장식하여 작업할 때 쓴 팁-업 접이식 탁자  114.3×68.6×80㎝ | 베닝턴 미술관

“예술가들이 개인적인 역사의 저장고에서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격언이 타당하다면, 아카데미 기법의 경험, 당대 유행 스타일에 대한 노출이 적은 독학 예술가는 부패하지 않은 마음으로 창작해야 할 것이다.”
-
William C. Ketchum. Jr.

그랜마 모지스-애나 메리 로버스튼은 1860년 9월 7일, 미국 동부인 뉴욕 주 워싱턴 카운티 그리니치에서 약1.6km ᄄᅠᆯ어진 자작농의 집에서 10남매 중의 셋째로 태어났다. 딸 중에서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동생들의 요람을 흔들어주고 일찍부터 부모의 노동을 거들며, 구속이나 걱정 따위 없이 성장했다.

아버지 쪽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그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보기 흉한 집 벽을 보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은 가족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오늘날 그랜마 모지스의 그림 연구와 보전에 가장 헌신하고 있는 미술관은 버몬트 주의 셸번 미술관과 베닝턴 미술관인데, 베닝턴 미술관에 아버지가 그린 유화 한 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화풍은 19세기 토마스 챔버스(Thomas Chambers, 1808~1869)라는 화가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스타일로 소개되어 있다.

(좌) 1864년, 4세 때의 안나 마리 로버트슨(그랜마 모지스). 어릴 때는 ‘씨씨’라고 불렸다.
(우) 그랜마 모지스 <1853년의 옛 체커드 하우스 The Old Checkered House, 1853> 1944 메이소나이트(미국 상표의 목재 건축 자재) 나무판에 유채 | 72 × 52.7㎝

이 체크무늬의 건물은 1777년 영국군이 여관을 개조하여 지은 병원이다.(미국은 1783년 영국에서 독립했다.) 빨간색과 흰 색 체크무늬의 독특한 외관에 2마일마다 말을 바꾸는 장소여서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이 태어난 병원으로 190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자료와 기억을 참조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부모님과 다른 남매들과 살았던 생애 첫 12년을 가장 행복한 시절로 술회했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바느질을 배우고, 남자형제들과 뛰어 놀고, 뗏목을 만들어 방앗간 연못 위를 떠다니고 숲을 돌아다니며 꽃을 모으며 놀았다.

하지만 교실이 한 칸 뿐인 작은 학교에 다닌 후, 그녀는 12살 무렵인 1872년, 집을 떠나 식모hired-girl가 되어야 했다. 물론 그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특정 개인만 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대가족에게는 많은 입이 먹고 살 부수입이 필요했다. 우리말로 하자면 그녀는 남들처럼 ‘제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된 것 뿐이었다.

그랜마 모지스가 유년기(1870년대)에 다닌 교실 한 칸짜리 학교. 1972년 베닝턴 미술관이 인수,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베닝턴 미술관과 함께 그랜마 모지스의 그림과 컬렉션을 이해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좌) 오래된 엽서 인쇄물 상의 옛 모습의 학교 | 엽서 크기. 약14cm×8.9㎝ | 베닝턴 미술관
(우) 현재의 모습. ‘Grandma Moses School House Museum’이라고 전면에 새겨져 있다.
(아래) 그랜마 모지스 <이글 브리지 학교 Eagle Bridge School> 1959 나무판에 유채 | 41×30㎝ | 베닝턴 미술관
그랜마 모지스가 그려낸 자신이 다닌 학교. 문맹을 면할 정도로 짧게 교육을 받은 후, 애나 메리 로버스튼은 12세 때부터 남의 집에서 일해야 했다.

 

“나는 늘 내 힘으로 살고 싶었지요.”

1887년 11월 9일, 그녀 나이 27세 때 토마스 새먼 모지스와 결혼하면서 15년의 타향 생활은 끝났다. 결혼할 당시 토마스는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일꾼들 중 하나였다.

그랜마 모지스 <시골 결혼식 A Country Wedding> 1951
나무판에 유채 | 54.6 × 42㎝ | 베닝턴 미술관

미국은 1849년의 골드러시, 이후의 남북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는데, 전쟁 후에는 서부 땅의 개방이 이루어져 서부가 새로운 농업지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모지스 신혼부부는 의논 끝에 서부가 아닌 산을 개간하여 농사와 낙농업을 하는 동부, 그 중 남쪽인 버지니아 셰넌도어 계곡에서 여태껏 살아왔던 대로 살기로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소작농으로 일한다.

그랜마 모지스 <사과 버터 만들기 Apple Butter Making> 1944~1947
나무판에 유채 | 74×58㎝ | 베닝턴 미술관

사진 속 집은 가족이 셰넌도어 계곡에서 소작인으로 거주했던 농장 중 하나인 더들리 플레이스이다. “늦여름은 사과 버터를 만들 때였죠. 사과 버터는 필수품으로 여겨졌어요. 만들려면 두통의 사과즙이 필요하죠.(일단 사과들을 갈아서 달콤한 즙을 먼저 만들어요.) 그리고 과수원의 불 위에 있는 큰 놋쇠 주전자에 넣고 끓이기 시작합니다. 4등분한 사과 3배럴(약 477ℓ)을 넣고, 저어주고, 저어주고,…그 다음엔 아이들이 와서 저을 테였죠.….”

토마스도 그랬지만, 애나 메리 로버스튼-그랜마 모지스는 손재주가 좋고 살림 수완이 좋았다. 직접 가축을 키워 만든 버터는 ‘모지스’라는 이름까지 새겨져 마을 사람들에게 팔렸다. 고된 일상이었지만 그녀는 일을 즐기고 살림을 불려가며 행복해했다. 아이들도 태어났다. 하지만 1887년에서 1905년 사이 낳은 10명의 아이 가운데 넷은 사산되고 한 명은 일찍 죽었다. 이 정도 영아 사망률은 당시로선 평균이었으나 남몰래 슬픔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던 1905년, 남편 토마스의 향수병으로 이 가족은 뉴욕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애나 메리가 자란 곳과도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애나 메리 모지스가 45세 때, 부부는 그리니치에서 남서쪽으로 약 24㎞ 떨어진 렌 셀러 카운티의 이글브리지에 있는 농장을 매입했다.

이른바 후식 강 계곡의 이 곳에서 1949년 좀 더 현대적인 집으로 옮길 때까지, 모지스 부부는 생애의 가장 많은 시간을 이 농장에서 보냈다(이 곳 역시 ‘마운트 네보’라 불린다.) 부부는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은 개구지게 자랐다.

1918년, 그녀는 난로를 사용하지 않는 몇 개월 동안 그곳을 덮어 놓는 가리개 널빤지에 페인트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다행히도 여러 겹의 벽지 아래에서 재발견된 이 작품-<벽난로 덮개FireBoard, 1918>는 그녀 아버지의 작품과 화풍 상 유사함을 보여준다. 1920년경 그녀는 후에 그림 그릴 때 사용하게 되는 ‘팁-업 탁자(판을 접었다 폈다 하는 간이 탁자)’에 그림을 그려 장식을 했다.

그러나 가족 문제가 더 시급했다. 1909년에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떴고, 1927년에는 남편 토마스가 갑작스러운 협심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2년에서 1935년 사이에는 버몬트 베닝턴에서 아픈 딸과 손주들을 돌봤다.

그녀는 어느새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에서 그랜마 모지스가 되어 있었다.

애나 메리는 이글 브리지로 돌아와 자수 그림에 매달렸다. 남편이 죽자 70이 가까워 온 그녀 나이로는 농장 일이 버거워, 그녀는 자수 작품들을 만들어 소일거리 삼았다. 워싱턴 카운티와 렌 셀러 카운티 페어, 교회 바자회 등, 그녀는 작품을 가능한 어디든지 내놓았다.

<오래된 후식 강 다리 Old Hoosick Bridge> 1939 | 36×30㎝
후식 강의 오래된 다리를 자수로 묘사한 작품. ‘1818’ 숫자는 다리가 세워진 해를 의미한다.
북동부에서 흔했던 이러한 다리는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다.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 다음 주에 계속


권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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