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화의 미술사이렌] ③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ⅱ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③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ⅱ
  • 권용화 칼럼
  • 승인 2021.12.2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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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화의 미.술.사.이.렌 >

빛나는’
제도권 밖의 미술가, 별이 되는 사람들

 

③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ⅱ

그랜마 모지스 1편에 이어...

<오래된 눈 덮힌 다리 The Old Covered Bridge> 1941 | 나무판에 유채 | 27.9×22.8㎝
The Wadsworth Atheneum Museum of Art, 코네티컷 하트퍼드

그러나 점차 관절염이 깊어져 자수는 괴로운 일이 된다. 이 때 여동생이 자수 대신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하면서, 난로 덮개 그림 이후 휴가철이나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나눠주기만 했던 그림 활동이 76세 즈음 본격적인 창작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1938년, 이글브리지에서 남쪽으로 약 8㎞ 정도 떨어진 큰 공업도시 후식 폴의 잡화점에 그렇게 해서 그녀의 그림은 내놓아졌다.


바느질을 못하게 된 손, 붓을 들기 시작하다

루이스 J. 칼도어는 그 날 잡화점에 걸린 그림과 집에 있던 그림들을 샀을 뿐 아니라 당시 78세로 닭과 손주들을 기르던 시골 할머니를 예술가로서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전문적인 재료를 소개해 주고, 작품이 판매되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칼도어의 노력은 이듬해인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 Museum of Modern Art)이 주최한 <현대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화가들Contemporary Unknown American Painters>전에 그녀의 작품 3점이 포함되는 것으로 첫 결실을 맺었다. 특별한, 남과 구별되는 재능을 존중해주고 대중에게 노출시켜 주는 것은 훌륭한 행동이다. 그러나 “루이스 J. 칼도어처럼 예술적 재능에 대한 통찰을 갖고 진정성 있는 주목할 만한 인격을 가진 후원자는 드물다.”

좌) <맥도넬 농장 The McDonnell Farm> 1943
나무판에 유채 | 76×61㎝ | The Phillips Collection, 워싱턴 D.C.
우) <후식 폴, 뉴욕, 겨울 Hoosick Fall, New York, In Winter> 1944
나무판에 유채 | 61×51㎝ |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D.C.

칼도어는 모지스의 그림이 ‘너무 단순하다.’, ‘원시적이다’는 평을 넘어, 당대 식자들이 잭슨 폴록 등의 추상표현주의나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자들 을 지지했던 것과 흐름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군분투해야 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1940년 10월에 <시골 농부 아내가 그린 것What a Farm Wife Painted>이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첫 개인전을 여는데 성공한다. 전시의 조력자이자 주최자는 오토 칼리르Otto Kallir로, 오스트리아계 이민자로서, 갤러리 세인트 에티엔St. Etien Gallery의 경영자였다. 칼리르는 따로 수집하는 분야가 있었지만 당대 미술계의 유행이나 틀과 무관한 ‘독학 미술가Self-taught Artist’에게도 관심이 있었다. 그녀 그림의 민속적 특성과 미국 생활과 역사를 포착하는 그녀의 특성을 잘 알아 본 칼리르의 노력에 힘입어, 전시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고, 그 다음엔 미국을 넘어 해외로 이어졌다.

몇 년 안에 그녀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원화가 아니라면 복제품이라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한 회사가 1947년 계약을 맺어 크리스마스 카드 등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저녁 만찬 접시, 천, 앞치마, 벽지, 아동복 등 다양한 상품으로 대중들에게 (복제되어) 퍼져 나갔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그 이미지를 알아보게 되었고 원화에 대한 주문도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랜마 모지스는 ‘예술계Art World’를 내심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녀 작품에 대한 관심에 매우 놀라워했다.

백발의 노할머니가 살아 온 이야기에 대해서, 방송, 잡지 인터뷰에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다. 오토 칼리르의 설득으로 그녀는 자서전 <그랜마 모지스 : 나의 인생이야기Grandma Moses : My Life's History>(1952)를 썼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의 작품 설명이나 예술 세계,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푸념 속에서 흔히 듣는 말 중에, “내 이야기를 책으로 써 보고 싶다.”가 있는데, 그녀는 바로 그것을 ‘담담하게’ 실현시켰다. 그녀가 쓴 것은 자신의 고향, 출생, 자신의 가족과 자녀, 신변, 살아 온 삶과 일에 대한 것들이다.

(좌측부터)
1)그랜마 모지스 접시 시리즈. 아틀라스 차이나Atlas China 사.
2)증정받은 그랜마 모지스의 그림을 사용해 미국 백악관이 발행한 우표.
3)1953년 《타임》지의 표지에 오른 그랜마 모지스.

“1억 장의 연하장을 팔아치운 사람”으로서, 사람들 앞에 더 나아가 스타로 굴고, 더 자신을 팔아 치우기에 그녀가 보인 관심은 이것이었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기에 나는 너무 늙었다.”

“풍경, 오래된 다리, 꿈, 여름이나 겨울 풍경, 어린 시절의 추억, 하지만 항상 즐겁고 명랑한 것들…, 마음이 무얼 그려 나가건 간에, 저는 밝은 색상과 기쁜 활동을 좋아합니다.”

소박한 마을 풍경, 예스러운 건물, 마을 사람들, 가축들이라는 소재는 그녀 이전, 이후에도 있었던 흔한 소재였다. 하지만 어눌한 듯 조용히, 스스로 목재로 판을 짜 관절염에 걸린 손으로 그린 그녀의 그림에 대중들의 마음은 흔들렸다.

6년간의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이 끝나고 상대적으로 전쟁의 영향을 덜 받은 미국은 프랑스-파리에서 미술의 중심을 미국-뉴욕으로 이동시켜 오고 싶어 했다. 당대의 영향력 있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는 잭슨 폴록(1912~1956)의 액션 페인팅,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을 상징하는데 이상적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좌)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의 창작법. 이러한 작업 방식 때문에 그의 작품들 크기는 굉장히 컸다. 미술인들은 광물을 보면 갈아서 안료를 만들거나 깎을 생각을 하고, 농부들은 농기구 만들 생각을 하지만, 현대는 동굴벽화가 그려지고 내년을 위해 씨앗을 저장하는 시대가 아니다. 금속이 석탄에 불타서 총, 대포가 되어 팔려 나갔던 시기를 지나, 미국은 전세계 부의 나라 1위를 향해 달려갔다. 유럽의 많은 이들이 망명해 있었고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렸다. 벼락부자들의 고층 빌딩 붐이 일고 그 소유주들에게 빈 벽에 걸 그림이 부족했던 때, 폴록의 그림은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폴록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매너리즘에서 오는 고통에 시달렸고, 이를 알콜로 달래다 사고사로 사망한다.
우)잭슨 폴록 <가을의 리듬, No. 30 Autumn Rhythm, No. 30)> 1950
캔버스에 에나멜 | 525.8×266.7㎝ㅣ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하지만 모지스의 지지자들은 말한다. “그녀가 처음 발견된 1938년과 같은 해, 미국 현대미술관 책임자인 알프레드 바Alfred Barr(1902~1981)는 현대미술이 첫 번째, 입체파•추상화, 두 번째, 초현실주의•다다, 그리고 세 번째로 ‘독학Self-taught 혹은 대중 예술Public Art’이라는 세 갈래의 뚜렷하고도 동등한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미 선언했다.”

<빨래 거둬 들이기 Taking in Laundry> 1951 | 나무판에 유채 | 56×43㎝

독학 혹은 대중 예술가에 속하는 미술가들은 위에 앞선 두 부류처럼 해석이 난해하지도 않고, 실제 작품과 제목 사이가 매우 가깝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삶 위에 함부로 군림하지 않는다.

 

“훔칠 것이 있으면, 나는 훔친다”
“When there's anything to steal, I steal.”
- 파블로 피카소

그랜마 모지스는 그녀의 ‘팁 탑 테이블’에서 그림을 그리기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일평생을 바지런히 살았으며, 참으로 ‘윤리적으로’ 살았다. 그녀가 훔친 것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기억과 추억을 훔쳤다.

그녀의 100세 생일을 기념하여 《라이프LIFE》지가 기획한 커버스토리를 뒤로하고, 링컨이 당선된 1860년에 태어난 그녀는 케네디 대통령 재임기인 1961년 생을 마쳤다. 그녀의 붓질은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주류’이길 원했던 이들이 했던, 기존 형식을 일탈하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붓질도 아니었고, 세계 미술의 패권을 미국-뉴욕으로 가져오려는 노력들과도 무관했다. 그녀의 색감은 세련되고 신중하며, 붓질은 서툴어 보이지만 주제를 세부까지 섬세히 담되 말초적으로 재미있는 눈요기나 유희거리를 주제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랜마 모지스는 미국 국민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지역’과 함께 이름을 퍼뜨렸으며 오늘날에도 그녀의 작품이 있는 미술관은 ‘지역이 사랑하는 명소’로서 숨 쉬고 있다.

그랜마 모지스는 1961년 후식 폴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죽기 전 여전히 정정하여 그녀는 툭하면 주치의의 청진기를 숨기곤 했다.

“이글브리지로 보내주면 돌려줄 거에요.”

그녀는 앞으로 100년을 더 살 거라 확신했고, 100세 생일에는 84세 된 그녀의 담당의와 ‘그만 쉬자’고 할 때까지 춤을 췄다. 1960년 그녀의 100세 생일이 <그랜마 모지스의 날>로 선포되어 기념식 참석을 갔을 때는 “분홍과 검정이 섞인 드레스를 입고 ‘쇼킹한’ 분홍 장갑을 착용해서 마치 귀엽고 앙증맞은 암탉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폐렴과 연이은 낙상 등으로 몸이 쇠약해졌다. 의사가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화를 내며 여전히 그림 그릴 날을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이 잠자리에 들고 난 1961년 12월 3일 아침, 요양원의 닥터 쇼는 그녀의 사망진단서에 서명했다. ‘노환’. 그랜마 모지스는 그녀의 101번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좌) 그랜마 모지스 <검은 말들 Black horses> 1942
나무판에 유채 | 61×50.8㎝ | 개인 소장
우)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랜마 모지스, 1946

 

 

“그랜마 모지스의 그림을 보는 몇 분 동안 행복한 세상의 그녀의 기억을 마시는 것은, 불행한 세상에 살고 있는 매일의 사람들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종전 후 파리에서 모지스의 작품을 본 어느 미국인의 말-

그녀의 사망 소식이 크고 작게 신문에 실리자, 뉴욕의 한 신발 가게는 쇼 윈도우에서 구두를 전부 빼고, 애도의 뜻으로 그랜마 모지스의 그림 3점을 그곳에 진열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 침묵을 지킨 채 그 쇼 윈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삶과 작품은 당시 미국 대중들에게 ‘단순한 시대’를 상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순수함, 근면함, 가족 가치의 시대”.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친척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시카고의 한 칼럼니스트는 썼다.

케네디 대통령의 공식 연설은 다음과 같았다.

“그녀의 죽음은 미국인의 삶에서 사랑하는 이를 앗아갔습니다. 그녀 그림들의 직접성과 생생함은 현재 미국의 상황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에 원시적인 신선함을 회복시켰습니다. 모든 미국인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그녀의 작품과 삶은 내륙 오지부터 국경까지 모든 곳에 우리나라가 개척정신을 뿌리 내리고 새로이 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좌)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Home> 1946 | 나무판에 유채 | 58×46㎝
우) <산타클로스 기다리기 Waiting for Santa Claus> 1960 | 나무판에 유채 | 41×30㎝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세우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까지 우리는 여기 있어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 돈 때문에 얼어붙고 굶주리는 동안 그들은 우주 물건을 위해 돈을 쓰고 있어요. 어리석은 일이에요.”(1961년 케네디 재임 시절 미국•소련 간에 ‘우주 경쟁’이 벌어졌을 때.)

“(추상표현주의자들에 대해) 난 그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벽지나 카펫 디자인을 해요. 그들은 언제나 더 크고 못생기게 뱀들을 그려요. 피카소를 어떻게 생각하냐구요? 누구죠?”

<추수감사절 칠면조 잡기Catching the Thanksgiving Turkey> 1946
나무판에 유채 | 61×51㎝

그녀의 이 말 때문에, 나는 그녀의 독실함을 느낀다. 나는 무리들을 따르지 않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녀의 그림 앞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개척의 시대에 태어나 자랐지만, 자연을 개척(때로는 파괴)하기보다 자연에 순응하는, 자연을 빌리는 삶을 살았다. 또한 나는 그녀의 자존감도 사랑한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거리에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해요. 그러나 저는 말하죠. ‘왜, 전에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았나요?’ 만약 사람들이 나를 추켜세우길 원하면 그냥 내버려두지만, 나는 지금도 예전과 같은 사람이에요.”

코로나가 있는 겨울. 유난히 겨울은 춥고 지난 주말엔 눈이 왔다. 아파트 뜨락에 온 가족이 나가 보니 아이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눈을 맞으며 구르고 눕고 던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숫자의 미술인들에게서 힘든 사정을 듣고 올해 나는 몇 번 눈가를 적셨다. 도톰한 물감 두께와 거친 붓질까지 복제해 낸, ‘기계가 현대 기술로 쓸고 지나간 모작’ 앞에서, “3D 프린터가 있으니 앞으로 조각은 없을 것만 같아요.” 묻는 아이 앞에서,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곳곳에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포기하지 않게 해 주는 모습을 보여 주어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배운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그들의 창작이 그저 낙서라도 좋으며, 한 건의 행정이 그저 종이 한 장이라도 좋다.

일이 이러하니, 미술이 보다 여럿의 사람들의 삶과 같은 눈높이로 걷기를.

모두 메리(Merry, 기쁜) 크리스마스.

“나는 우리가 정말 발전하고 있는지 때로는 의문이 듭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여러모로 지금보다 느린 삶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삶을 더 즐겼고, 더 행복해 했어요. 요즘엔 다들 행복할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그랜마 모지스

<크리스마스 전날 밤Night Before Christmas> 1960
나무판에 유채 | 41×30㎝

<권용화의 미.술.사.이.렌 > 다음 편에 계속


[주요 자료 출처 및 참고 문헌]

도서
<Grandma Moses : American Modern> Skira Rizzoli Publications, Inc. | 2016
<Designs on the Heart> Karal Ann Marling | Harvard University Press | 2006

<Grandma Moses : An American Original> William C. Ketchum, JR. | Todri Publications, Inc. | 1999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류승경 편역 | 2021 | p.202

사이트
베닝턴 미술관 https://benningtonmuseum.org
셸번 미술관 https://shelburnemuseum.org
https://commons.wikimedia.org


권용화
권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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