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귀신이 끌어당겨 언젠가는 빠져 죽는다. 물이 있는 동네에 흔했다. 빠져 죽은 자들의 ‘한’을 가진 ‘가족’들이 전하기도 했다. 물귀신을 본 적이 그들은 있었다. 귀신백과에 나오는 사오정과 닮은 모습이 아니었다. 씌었어도 살아남은 자들은 황홀함을 ‘누누이’ 전했다. 백수광부만이 아니었다. 물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그들을 물에서 건진 자도 비슷한 말이었다. 넋이 나간 모습이 아마도 흰 머리칼의 미친 남정네 모습과 닮았을 것이다. 남자를 호리는 물귀신이니 절세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 때 아이들은 물가에서 놀았다. 산은 깊고 멀었다. 마을은 물을 두고 형성되었으니 당연히 물가에 아이들은 놀고 볕에 그을리고 또 물이니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깨끗했다. 그들은 호주머니를 열고 내용물을 자랑했다. 나뭇조각, 죽은 작은 물고기, 단추 부러진 것, 조약돌 그리고 죽은 개구리 뒷다리도 있었다.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방바닥에 풀어 놓으면 등짝을 맞았다. 내다 버리라는 단호한 말에 아이들은 억울했다. 감나무 아래 고이 숨겨 두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가져온 사실 등짝을 맞은 것과 숨겨둔 일체의 것에 대한 망각이었다.
물아래로 자맥질해서 가져온 그것은 그냥의 돌이나 부서진 단추가 아니었다. 물아래로 비친 햇살은 황홀이었다. 황홀한 빛이 바닥에 닿아 도드라진 돌과 단추 부서진 것이었다. 그것을 줍기 위해 들어낸 물아래 돌 아래의 ‘무엇’이었다. 다시 물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비치는 거대한 햇살은 출렁거렸다. 빛이 무게를 가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아래에서 비틀거릴 만큼의 아름다움을 담은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 개구리에 대한 끌림은 또 어떠했는지. 물고기는 호주머니에서 죽고 개구리는 친구와 나누어 가졌다.
장년이 되어 다시 보는 강은 초라했다. 언덕에서 해를 등지고 강을 본다. 수초와 단단하고 커진 강둑이었다. 둑 건너 호사한 현대식 주택의 열과 먼 산위로 떠다니는 구름이었다. 빛은 그저 강물에 떨어지고 눈은 시렸다. 봄날 개구리 소리 가득했을 것이다. 물아래 관념으로 물고기가 있을 뿐이다. 나이는 황홀을 버리고 통속이 되었는지. 여기서 수영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단어로서 물고기이다. 강변 저녁 햇살에 ‘세월’이 서있다.
코로나 위드. 먼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더불어 마시는 술자리이다. 쓰린 속과 두통 오늘 일에 대한 걱정을 벗어나는 장치로서 먹고 마시고 떠드는 자리이다. 선명한 것보다 희미해진 사실과 내용이 그립다. 낯선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위로 받는다. 현상으로 이걸 그리워한다. 등짝을 맞아도 그리워했던 물아래 풍광과 닮았다. 후덥지근했고 왁작지근했던 말과 그리고 쏘아부치던 기세와 웃던 허세의 공간이었다. 부어내리던 전등 불빛. 끈적거리지만 그립다. 그 곳에서 위장을 타고 흘러내리던 술은 한층 또렷하고 몽롱했다. 또렷한 것은 더욱 또렷했다. 어제 술이 낮술 같고 오늘의 아침은 어제의 연속이다.
물 아래 유혹은 강렬했다. 그들이 말을 나눈다. 인간이 그러면 되냐고 따진다. 그들에게 그가 누구냐는 물음 이전에 그가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전제이다. 강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부서진 단추는 누가 던졌는지 아니면 흘러들었는지. 강 위에서 물아래로 왔다. 흐르는 강심의 세기가 그 자리에 있게 했을까. 붙잡으려는 노력 곧 사실관계를 놓치면 물아래 귀신이 나를 부르고 물 아래로 나 스스로 걸어간다. 불행한 결혼의 그녀가 말을 건넸다. 말의 대상은 다른 여자의 남자였다. 세상 남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냉엄한 논리’에 원인의 그녀는 없었다. 바닥에 머물 것이다. 무게를 가진 것들이 물에 던져지면 물아래로 간다. 개구리가 왜 강에 있었는지. 물에 둥둥 떠다닌 나무 조각을 나는 왜 공중에 떠다닌 신기로서 보았는지. 나는 물과 공기를 구분하지 못했다. 구분하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익관계에 내가 놓였던 탓인가. 그 때 어린아이가 자랑한 잡동사니가 가장 큰 나의 이익이었을까. 그런 황홀이 나의 이익이고 즐거움이 이익이었는지. 흐릿하다.
현실을 구분할 능력, 현실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마음에 담아 둘 수 없거든 말하지 말라’는 그의 조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것을 담아두는 그릇은 어디에 있는가. 치열한 경쟁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물아래에서 느꼈던 평안함은 빛나는 이야기 거리였든가. 삶은 물아래에서 일어나는가. 대개 물아래에서 보는 빛과 물아래에서 느끼는 고독과 물아래에서 느끼는 공포가 그저 말과 행위로서 쏟아진다. 폭력적이다. 이 폭력은 가짜뉴스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폭력은 가짜뉴스를 주문 삼아 스스로 더욱 깊은 심연으로 미끄러져간다. 저녁 황혼을 등에 기대고 보는 그런 풍광과 대단히 닮았으나 보다 강렬한 빛이고 흔들림이다. 그건 심연이다. 심연에서 나는 또 다른 나이다. 나를 ‘내가’ 의식하지 못한다. 부정을 통한 나의 성장은 그저 꿈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아래쪽 사람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보이는 이미지에 갇혀 사고한다. 지구에 작동하는 중력이라는 생각은 없다. 생각이 없으니 이해는 애시당초 불가능이다. 천장에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걸을 수 없듯이 남극에서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다. 사고의 확장이 필요한 이유이다.
양자역학은 인간이 가진 감각을 무시하고 세상을 수치인 행렬방정식이나 확률방정식으로 대체한다. 세계가 지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오만’이고 우리 일상의 감각이 원자 덩어리이고 측정되는 에너지로 대체될 수 있다는 엄밀한 수학의 그들이다. 인간에게는 감각 이전에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양자가 보이는 ‘점핑현상’은 일상 행위에도 있다. 인간이 같이 있는 사람에 따라 달리 행동한다. 둘레와 둘레의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 행위다. 감정도 다르다. 곧 둘레가 다른 나를 만든다. 아버지가 나를 볼 때와 연인이 나를 볼 때의 행위가 다르다. 긴장이 다른 사람을 만들 듯이 보는 자에 따라 다른 인간이 된다. 운동 경기는 보다 명확하다.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은 보는 자에 따라 달리 움직인다. 행위에는 임계치가 작동한다.
변화. 그곳에는 인간으로서 한정 지워진 사고와 창조성이 내재되어 있다. 물아래의 것이 물위의 것에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강을 앞에 둔 언덕의 집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사는 감동이다. 그곳에 강이 있음에 우리는 강에서 무엇인가를 건진다. 강의 존재가 집을 결정한다. 강은 언덕에 사는 그들을 한편 노예로 만들기도 한다. 강이 집안으로 밀려든 탓이다. 물아래와 강둑과 강가의 집은 복잡한 층위를 구성한다. 물소리는 밤잠을 설치게 하고 강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는 강에 관한 또 다른 추억을 만든다. 강은 추억이다. 픽션의 샘이다.
내가 물고기가 아닌지. 죽은 개구리 뒷다리는 아닌지. 조약돌이나 깨진 단추조각은 아닌지. 아니면 그것들의 합이 아닌지. 이런 증명이나 반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는 자에 따라 달라지는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구분하는 것, 그러니 배우는 데 익숙한 사람인가. 사고의 기본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고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이다. 이런 사고과정에 따라 의미를 밝힌다. 이 과정은 나를 파악하고 나의 다음은 예상된다. 생각이 깃든 관찰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왜 필요할까. 이정표를 발견하고 싶은가. 물음은 사회와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묻는 것이고 관계를 통한 의미발견이다. 이런 물음형태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뇌에 심어진 것이다. 전전두엽의 특징이다.
물아래 신비의 왕국.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이야기는 곳곳에 전해져 왔다. 나를 위로하던 그곳이었다. 그러나 용궁에서 가져온 것들은 대개 나부랭이였다. 그 용궁에서 나를 시대가 알아보지 못한다고 탄식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시대에 사람에 나는 억울했다. 나부랭이는 ‘참을성 없는 것’과 ‘어린이 같은 행동’이다. 종이에 굴러다니는 돌을 포장하고 표면에 ‘이것은 금이다’라고 쓰여 있는 그것을 사고과정을 통해 열어 확인하는 일이다. 포장지와 포장지의 글씨가 내용을 보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연하고 억울하고 반복적으로 옳다는 것은 물아래로 내려가는 행위이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천년 전의 백수광부만이 아니다. 물의 이미지는 죽음이다. 죽음은 탄생의 전조이기도 한다,
-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