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4> 생생한 죽음의 실감, 살아있는 약한 이들의 공포
이라크통신4> 생생한 죽음의 실감, 살아있는 약한 이들의 공포
  • 박기범
  • 승인 2003.03.2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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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죽음의 실감, 살아있는 약한 이들의 공포


가뜩이나 피곤한 일정인데 한국으로 일지와 통신문을 써 보내는 일을 맡으니 늘 잠이 모자라다. 오전 오후야 관광 일정에 팀의 일정을 따라야 하니 일지를 정리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새벽으로 넘어간다. 피곤하다. 한 나절만이라도 깊이 잠을 잘 수 있다면……

겨우 두어 시간 눈을 붙였을 뿐인데도 아침에는 절로 눈이 떠진다. 아침에도 좀 더 서둘러야 전체 일정이 시작하기 전 정부 요원들 눈을 피해 잠깐이라도 인터넷을 쓸 수 있다. 대충 씻고 어제 쓴 일지와 한겨레 기자님이 부탁한 디스켓을 챙겨 인천방송의 김피디님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이곳 바그다드는 암만과 달리 피씨방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은 두 블록쯤 떨어진 팔레스타인 호텔. 한 시간 내에 다녀와야 하니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길가에 한 떼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우리 나라 인력 시장하고 비슷한 델까요?'하고 피디님께 물으니 김피디님 대답이 '징병검사소 같은 데가 아닐까요?' 한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을 자세히 살피니 손에 무언가 종이 하나를 말아 쥐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전시 상황, 징병검사, 군인…….

팔레스타인 호텔 2층에 있는 피씨방에 들어갔다. 당장 한겨레 기사를 마감 전에 보내야 하니 이메일부터 바쁘게 여는데 도무지 열리지가 않는다. 폐쇄된 사회, 통제된 사회. 마치 북한이 그러하듯 이라크는 인터넷 접속에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겨우 피씨방 주인의 도움을 얻어 그 사람의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이용해 메일 전송을 했다. 겨우 메일 두 통을 보내는 데만 한 시간이 다 지났다. 열한 시까지는 어서 돌아가야 한다, 걸음을 재촉했다. 뛰며 걸으며 숙소로 돌아오는데 아까 보았던 젊은이들 가운데 몇은 벌써 군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또 몇은 주사를 맞았는지, 피를 뽑았는지 팔뚝을 솜으로 문질렀다. 전쟁의 징후는 이렇게 하나 둘 다가왔다.

11시, 숙소 앞에서 모여 관광 일정을 시작했다. 어느 박물관을 가는 거라 하는데 또 무슨 사정이라도 생겨 스케줄이 취소됐으면 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문명의 발생지니 바빌론이니 하는 고대 문명의 유적 같은 걸 모아 논 박물관이겠거니 했다. 버스를 타고 한 삼십 분쯤 갔을까? 들머리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내가 머리에 그리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앞서 걸어가는 가이드의 뒤를 따라 흔히 보던 박물관 건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웬걸. 그 안에는 유리벽 같은 것으로 골목을 만들어 유물 같은 것을 전시해 놓은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운데에 놓고 둘러쌌고, 그 너머에서는 울림이 큰 아랍어가 들려나왔다.

연극!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한 사내가 절규했다. 그 사내와 또 다른 사람들. 그이들은 하늘을 보며 신을 찾기도 했고, 그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호소하는 듯 했다. 갑자기 커다란 흰 천이 내려와 그이들을 다 덮었고, 그이들은 흰 천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몸부림 속에 흰 천을 뚫고 나왔다 들어가는 누군가의 팔, 누군가의 다리. 하얀 천막 아래의 사람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고, 한 사람만이 남았다. 그이의 한쪽 얼굴에는 분장 가면을 붙였는지 아주 일그러져 있다. 그이가 무어라 절규했다. 계속 절규했다. 왔쯔 히? 왔쯔 히! 하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으며 묻는 것도 같다. 그리고 내가 더 깜짝 놀란 건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음소리. 그 울음소리는 가히 앞에 있는 배우의 절규만큼이나 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중년의 여인이 코를 감싸쥐고 울었다. 또 내 왼편에 있는 사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그러쥐며 울었따. 눈물이 맺히는 사람도 많았다. 속으로 참지 못하고 흐느끼는 사람도 많았다. 이게 무얼까? 도대체 저 연극이 대신 말해주고 있는 이 사람들의 한은 얼마나 깊은 것일까? 연극이 삼 십 분 계속 되는 동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나처럼 말 한 마디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사람도 그 어떤 절규와 그 어떤 안타까움으로 배우의 얼굴짓, 몸짓 하나 하나에 깊이 빠져들었다.

연극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관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인터뷰가 오갔다. 몇 사람은 아까 배우가 연기하던 무대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대가 있는 곳의 머리 위 천장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기가 진짜로 포탄이 떨어진 방공호라나 봐요."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혜란이가 일러주었다. "이 자리에서만 사백 명인가 되는 사람이 죽었대요." 아아, 그랬구나. 이곳이 방공호라면 그야말로 어둠뿐이었을 텐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리고 폭격이 된 뒤에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흰 색 커다란 천막 속에서 아우성치던 배우들의 모습은 바로 폭격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살고자 몸부림치는 거였구나. 흰 천 안에서 누군가의 팔이, 누군가의 다리가 천을 찢고 나오던 장면이 되살았다. 살이 터지고, 피가 솟고, 몸이 녹아 내렸을 아비규환. 그걸 보며 울던 사람들. 어쩌면 그이들도 몇 해 전 이 땅을 훑고간 전쟁으로 사랑하는 식구를 잃었는지 모른다. 아니, 거기에 있던 이라크관객 가운데 그 동안 일어난 전쟁과 무관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안은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두렵고 참혹한 마음. 더 있기가 어려워 혁 선배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둘 다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혁 선배가 꺼낸 말, "기범 씨는 공포라는 걸 느껴본 적이 있어요?" …… 공포? 아마 다른 자리에서 물어보았다면 나는 할 말이 많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까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공포라는 것, 그것도 어느 편의 인간이 또 다른 어느 편의 죄 없는 인간들에게 무차별로 가하는 공포. 이 사람들은 어제 그것을 겪고 살아남아 다시 또 오늘 그것 앞에 처해있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야 아무리 평화 활동가로 와 있다 해도 순간 순간 갈등하며 고민한다. 끝까지 남을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면 언제가 그 때인가를. 하지만 이들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진실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일 다시 그것을 맞이할 것이다.

건물 바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무대에서 연기하던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모두 문 밖에 서 있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중 기자로 보이는 여인 둘이 혁 선배와 나에게도 그 버스를 같이 타지 않겠느냐 권했는데, 아마도 그이들은 바그다드 곳곳을 옮겨다니며 공연을 하는 모양이었다. 따라가고 싶었다. 중간부터 밖에 보지 못한 연극을 처음부터 새로 보고 싶었고, 그이들 사이에 섞여 함께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따로 행동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 건물에서 나와 버스에 올라타는 그이들과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차례로 버스에 오르는 어른들 가운데 아이가 넷 있다. 하나는 무대에서 연기를 한 꼬마이고, 나머지 셋은 그 아이의 형제로 보였다. 연기를 한 아이는 일곱 살쯤 되었을까? 무대에서는 애타게 "왔쯔 히!"를 찾더니 바깥에 나오니 금세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가 되었다. 아이를 꼭 끌어안고 눈을 맞추었다. 장난기와 호기심이 섞여 반짝이는 눈동자는 참 맑고 순했다. '아이야,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 너희의 동무가 될 수 있을까?'

연극을 한 건물, 수년 전 공습 당한 자리를 그대로 보존해 놓은 건물에서 다 나와 그 뒷편 건물로 걸어갔다. 건물 둘레에 웬 조각 장식이 저리도 많은가 하고 보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묘비였다. 바로 이 자리에서 폭격을 맞아 죽어 떠난 이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묘비. 우리는 언제 또다시 공습이 시작될지 모르는 도시 한 가운데에서 지난 공습으로 죽어간 이들의 묘비 앞에 서 있었다. 이 자리에, 그리고 도시 곳곳에 또 얼마나 많은 묘비가 세워질 것인가. 잠시 멍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우연히 보게 된 것은 묘비 사이로 피어 있는 키 작은 코스모스. 노랗고 분홍빛의 코스모스는 우리가 어린 시절 꽃잎을 떼며 장난하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무엇을 역설하려는 건지 코스모스는 참 예뻤다. 나 또한 숙연함은 잠시 "와아, 여기 코스모스도 우리 나라에서 나는 거랑 똑같아요." 하고 웃으며 거기에 눈을 빼앗겼다.

묘비가 둘러서 있는 건물을 들어서니 그 안은 여느 박물관과 같은 꼴을 갖추고 있었다. 차례로 지나며 보게 되어 있는 유리벽과 유리 상자의 골목.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다시 온몸에 전기 같은 게 올랐다. 그날 죽은 사람들의 얼굴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 그림 아래에는 그이가 마지막 남겼을 법한 유품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아이, 그리고 여인. 내가 처음 본 아이의 유품은 빨간색 책가방과 자동차 장난감, 그리고 엄마 아빠와 함께 찍은 가족 사진. 그 다음 칸에는 더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 그림 아래 무늬와 레이스가 알록달록한 원피스 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사람이 죽은 것이다. 아이가 죽은 것이다. 장난감 선물을 받으면 신나 하고, 예쁜 옷을 입었다고 깜찍한 웃음을 지었을 아이들이 죽은 것이다. 때로는 엄마에게 혼이 나 울다가 얼굴에 땟자국을 남겼을, 때로는 아빠 품에 안겨 한껏 재롱을 피웠을 아이들이 죽은 것이다. 그 앞에 선 순간 죽음은 내게 아주 구체적인 것이 되어 다가왔다. 전쟁이니 폭격이니 평화니 하는 말을 놓고 고민할 때는 자칫 잃었던, 죽음의 생생한 실감. 그 유리 상자들 앞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수첩을 꺼내어 그 안의 것들을 하나 하나 적었다. 갓난아기가 물고 있었을 우윳병이 있고, 갓 혼례를 올린 신부가 입었음직한 드레스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가지고 놀고 있을 축구공, 구슬, 소꿉놀이세트, 마블인형. 나도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우표 모으는 걸 참 좋아했는데 저 아이가 남긴 것은 우표앨범이구나. 아이가 남긴 교과서, 마지막으로 아이가 몸에 걸쳤을 불에 타다 남은 옷, 그리고 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과 글씨를 연습한 공책.

무거운 마음으로 알 라미르 박물관을 나올 때,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빗방울은 무엇을 더 말해주고 싶은 거였을까? 나는, 듣지 못했다.

버스에 올라 다음 관광지인 구리 공예 시장으로 가는 길. 저마다 무겁게 눌리는 마음인지 알 라미르에 다녀온 느낌을 한두 마디씩 얘기했다. 사실은 누구도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본 어제의 죽음과 내일 이 도시에서 맞이할 죽음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이럴 때 말이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참혹해지기만 하는 것.

서로 담배를 나누어 태우다 한겨레 임종진 기자님이 북한에도 이것과 아주 닮은 박물관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알 라미르에서 본 것처럼 한국 전쟁 당시 한 마을에 죽은 사람들의 유품을 하나 하나 전시해 놓은 거라 하는데, 이보다 훨씬 끔찍하다 훨씬 끔찍하다 했다. 마을 사람들이 숨어 있는 구덩이에 한 방을 쏜 뒤, 다시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한 방을 더 떨어뜨렸다는. 게다가 그 아비규환을 비집으며 살고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조준 사격을 했다는……. 자연스럽게 버스 안서는 북한 취재 경험이 많은 임기자님이 이라크와 북한을 견주어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마 우리가 처음 바그다드로 들어올 때에도 임기자님은 평양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는 말을 했다. 평온한 듯 보이는 도시의 분위기, 그리고 아주 소박하고 정감 있는 사람들. 하지만 도시나 사람들의 표정에는 왠지 알게 모르게 그 어떤 통제나 감시에서 오는 부담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 그 가운데 무엇보다 닮은 건 어디를 가나 권력자의 초상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닮은 점은 참 많다. 우리가 이곳 관광을 하면서 겪듯 어느 자리에서나 비밀경찰의 감시와 통제가 있다는 것이 그렇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를 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그렇고, 나라 경제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 또 그렇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 하나는 이라크나 북한이나 모두 이 나라들에 대해 우리가 보고 듣는 정보는 모두 서방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화면에는 전쟁의 불안함을 조장하고, 어둡고 경색된 사람들의 표정에만 초점을 맞추는 ……. 나 또한 그랬다. 이라크라 하면 후세인의 콧털이 먼저 떠올랐고, 은연중에 누런 군복의 이미지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아,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와 만나는 사람들은 어떠했던가? 바로 국경을 사이에 둔 요르단 사람들에게만 견주어 보아도 이곳 사람들은 순박하기가 이를 데 없다. 거리에서 만나면 - 외국인이 아니라 서로 모르는 자국민끼리라도 - 누구나 먼저 말을 건네 반가이 인사했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서로 나서려 했다.

구리 공예 시장. 마치 우리 나라의 재래 시장에 와 있는 것처럼 떠들썩했다. 그 좁은 시장 골목 안에는 손수레에 짐을 싣고 끄는 사람들, 구리 쟁반 위에 아슬아슬하게 음식을 얹어 배달하는 사람들, 가게 앞에 서서 들어와 보라 손짓하며 늘어선 장사꾼들. 시장을 지나다 마침 천을 파는 가게를 보았다. 내일 걸개 그림 그리기를 하려면 따로 시간을 내어 그것을 마련해야 했는데 참 잘 되었다. 그 자리에서 가이드인 카심 씨의 도움을 받아 흰 천 열 마를 샀다.

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탱탱탱탱, 쾅쾅쾅쾅, 꽝꽝꽝꽝 쇳소리가 요란했다. 그런 가게를 무어라 해야 하나? 대장간은 아니고, 고물장사 쯤 된다고 하면 될까? 아주 좁은 가게가 잇달아 있는 길 앞에 양은솥이며 주전자, 양동이 따위를 수선하고 만드는 사내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의 보통 사람들 피부보다 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많이 잡힌 할아버지도 있고, 기름때에 얼굴을 시커멓게 한 사내들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우그러지고 떨어져 더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깡통인데 그것을 펴느라 망치를 두드리고, 떨어진 손잡이 따위를 새로 해 달았다. 맨 처음 본 할아버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에 눈이 빼앗겨 한참을 구경했다. 그러다나니 나도 손수 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어라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지는 못하고 할아버지의 시늉을 내면서 손짓을 섞어 부탁했다. 혹 실례가 되는 건 아닌가 하여 조심스러웠지만 할아버지가 오케이, 오케이, 땡큐 하며 망치와 양은 그릇을 건네었다. 탱탱탱탱, 나는 아주 서툴었다. 할아버지만큼 우그러진 자리를 편편하게 잘 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나를 보며 주름 많은 얼굴로 웃으며 시범을 보이듯 망치질을 했다. 다시. 에이, 다시 해 보아도 할아버지만큼 잘 안 된다.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에게 망치를 내주고 또 한참동안 망치질을 지켜보았다. 인간, 삶, 그런 것을 알기에 나는 아직 많이 어리고 모자라지만, 감히 누가 그 할아버지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 뿐 아니라 그 시장에서 본 많은 사람들, 이들 머리 위로 미사일을 떨어뜨리겠다는 자들의 마음은 과연 어떤 걸까?

굽이굽이 시장 골목을 다 빠져 나오니 흡사 청계천 어디쯤과 같은 넓은 길이 나왔다. 자동차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있고, 길에는 바삐 오가는 사람들과 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섞여 마구 떠밀렸다. 커다란 함지에 생선을 내놓고 파는 사람들. 우리 나라에서 먹는 고등어와 닮은 생선이 있고 조기를 닮은 것, 갈치를 닮은 것이 있었다. 한 쪽에는 가자미를 닮은 것이 있고 민물 붕어를 닮은 것이 있었다. 이곳 음식에 쓰는 향료가 입에 맞지 않지만 사람이 먹는 것은 어디나 똑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잡아다 파는 모양이나 그것을 사가는 사람들 모양 또한 이토록 닮았구나.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았나, 무엇이 우리를 갈라 내 것을 챙기고, 내 나라 것만 챙기며, 편을 갈라 싸움을 하게 하는가? 그것도 상대의 삶이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싸움을.

늦은 점심을 먹고 나와 팀을 둘로 나누어 한 쪽 사람은 장애 아이들이 모여 사는 시설로 갔다. 우리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바깥에서 보기에는 작은 크기의 유치원 같기도 했고 조그만 교회 같기도 했다. 우리를 맞아주는 수녀님들 방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이제 막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 세돌박이가 채 안 된 것 같은 아이들. 아이들은 조그만 밥상을 놓고 조그만 밥상에 앉아 자기 접시에 놓인 빵과 달걀을 먹었다. 고개를 꼬고 있는 아이, 웃을 때마다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아이, 손목이 안으로 굽어 있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어색한 놀림을 하는 아이, 방에 들어서서 처음 본 아이들은 아마도 뇌성마비. 그리고 나머지 중에는 정신지체나 자폐, 중증의 신체장애 아이들이 있었다. 오마르, 낸씨, 두니아, 야쓸, 앨라스, 안씀, 알라, 노라, 자이습……. 지난 세 해 동안 늘 만나 지내온 라파엘의 집 아이들과 신망애 아이들이 떠올랐다. 한 눈을 뜨지 못한 채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는 두니아는 꼭 우리 혁진이를 닮았구나. 두니아도 혁진이처럼 안구함몰증이라는 이상한 병명이 있을까? 웃을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오마르는 꼭 우리 승기를 닮았구나. 라파엘의 아이들이 꼭 이 아이들을 닮았는데. 그리고 이 아이들이 좀 크면 신망애 아이들처럼 또 어디론가 가서 살게 되겠지.

아이들을 보며 드는 마음은 어디에서나 한결 같다. 아이들이 내게 눈을 맞추어 주면 그 맑고 또랑한 눈망울로 한껏 빠져드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아이들 살 냄새. 젖이나 분유에서 나는 냄새에 아기들이 쓰는 비누 냄새. 이 아이들 모두 단 하나 뿐인 목숨. 불편한 몸이어도 기분이 좋으면 까르르 웃고, 무언가 바라는 게 잘 되지 않으면 코를 찡그려 울음을 터뜨리고. 어찌 보면 오늘 다녀온 아이들 시설이 그나마 아주 나빠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얼마나 많이 있나? 골방 같은 곳을 얻어 겨우 기대고 끌어안으며 지내는 수많은 공부방, 놀이방, 그룹홈, 장애아이들의 집…….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이번에는 정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관광이고 집회 또는 그 어떤 평화 활동보다 나는 우선 이 땅에 몰아쳐 올 전쟁을 이 아이들의 곁을 지키며 맞고 싶다. 사실 처음부터 나를 이곳으로 불러준 마음은 무엇보다 그것이었다. 그저 아이들 곁이 되고 싶다는 것, 이 땅 힘없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내 약한 몸이 곁이 되고 싶다는 것. 사실 나 같은 이가 이 땅에 들어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지 모른다. 그저 곁이 되는 일 뿐. 곁에서 함께 이 불안함과 고통, 아픔을 함께 겪는 것. 결코 너희들은 내버려지지 않았다고, 이 세상에서 너희들만 고립된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곁이 되어 함께 있을 거라고……. 숙소에 돌아와 잠시 침대에 몸을 누이며 혁 선배가 괴로운 얼굴로 노라 얘기를 했다. 날 때부터 팔 다리가 없는, 이제 겨우 다섯 달 된 노라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고 하면서.

저녁을 먹고 난 시간, 서로들 개인 작업이 바쁘다. 창 밖 시내에서는 오늘도 결혼식이 있는지 음악소리가 크게 들렸다. 날마다 이어지는 결혼, 그것조차도 불안하다. 팀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시간은 밤 열 한 시. 팀원들은 저마다 들어 알게 된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그러한 정보들 속에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들을 찾느라 토론이 새벽 늦도록 이어졌다.


2003. 3. 3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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