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5> 이라크 시민들과 함께 만든 걸개...
이라크통신5> 이라크 시민들과 함께 만든 걸개...
  • 박기범
  • 승인 2003.03.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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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시민들과 함께 만든 걸개...

평화의 타흐리 광장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일찍 움직이기로 했다. 두 시부터는 이곳 이라크에서 우리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이 독자로 준비한 행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일단 이라크에 들어온 a팀, b팀이 모두 머물며 활동할 수 있는 날은 오늘 하루. 한국에서 준비해 온 의약품을 이곳 아동 시설에 전하기로 한 계획까지 다 하려면 마음이 바빴다. 날마다 늦은 새벽까지 토론이 이루어지고, 개인 작업을 마쳐야 하기에 하루가 갈수록 피로가 쌓였지만, 시간을 아끼고 쪼개야 한다.

다들 아침을 서두르고 있는데 한겨레 임 기자님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어제 보낸 메일이 혹 잘 못 갔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전해졌고 그것 가운데 하나가 1면 사진이 되었다 한다. 보이지 않게 지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힘이 나는 소식이다, 기쁜 소식이다.

아침을 다 먹고 나서 오늘 행사를 준비할 사람들이 몇 남고 나머지는 아동 시설으로 떠났다. 숙소에 남은 사람은 집회와 행사 기획을 맡은 나와 은국이, 걸개 밑그림을 그려줄 임기자님과 그 밖에 손이 많이 가야할 일을 도와줄 혜란, 승로. 사실 걸개에 넣을 그림이나 문구조차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임기자님이 좋은 생각을 얘기했다. 어차피 다 그리고 나면 티그리스 강의 다리 난간 같은 곳에 걸 테니까 우선 가운데에는 커다란 글씨로 "PEACE"라고 쓰고 그 양쪽으로 휴먼쉴드의 상징인 아이들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을 그리자는 것. 그런 뒤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팀원들이 모두 돌아가며 걸개의 빈곳에다 싸인을 하거나 간단한 메시지를 적자는 거였다. 그것이 시민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면 글씨와 그림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부터 그곳 시민들과 함께 하고, 나중에 한 마디씩 쓰는 것도 시민이나 다른 나라 평화활동가들까지 다 함께 하면 좋겠다는 것. 우리의 바람처럼 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며칠 동안 우리가 만난 거리와 광장의 아이들, 시민들을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혹시 광장에 가서 걸개를 펼치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나? 우리는 관광 비자로 온 것이라 집회 신고도 낼 수가 없는데, 어쩌면 우리를 따라 다니는 정부 요원들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자잘하게는 광장에 걸개를 깔고 페인트를 칠하면 바닥에 다 묻어날텐데 하는 걱정까지 맴돌았다. 최악의 상황이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이곳 바그다드에서는 그 무엇도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임기자님이 걸개 밑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리는 꼬마운동회 때 과자 따먹기를 할 준비를 했다. 실을 구하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혜란이가 반짇고리를 챙겨와 있었다. 바늘로 과자에 구멍을 내고, 실을 꿰어 묶고. 나중에는 실이 모자라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수건 하나를 가져다 실오라기를 풀며 그것으로 묶었다.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바그다드에 와 있고,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이곳에서 우리들 힘만으로 시민들 앞에 나설 준비를 했다.

고아원을 방문하러 나간 팀은 안타깝게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오늘 화요일이 이 곳에서는 몇 주만에 한 번 돌아오는 휴일이라 했다. 아, 어쩌나. 휴일이어서 광장에 사람들이 나와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곳의 휴일은 이슬람의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라 그저 놀고 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금요일이 우리 식으로 치면 일요일과 같은데, 그런 날은 그냥 노는 휴일이 아니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술집은 물론 가게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 정도에 낮이라고 해도 거리에 나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한 시가 되어 정신없이 짐을 꾸렸다. 고아원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짬을 보아 페인트와 신나, 걸개를 걸 끈, 축구공을 사왔고, 이 안에서 준비한 과자와 걸개, 아이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줄 붓과 물감을 챙겼다. 물통으로 쓸 피티병을 잘랐고, 페인트를 섞어 쓸 쟁반들을 챙겼다. 그리고 사탕과 밀가루, 과자를 매달 막대 대신 엠비씨 방송국 분들의 카메라 다리. 짐을 차에 싣고 가는데 혹시 무얼 빠뜨리지 않았나 불안했다. 걸개 그림 그리기도 꼬마 운동회도 아주 썰렁해지면 어쩌나? 잘 하고 싶은 마음 한 편에 내내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아, 점심을 먹는데 식당 둘레를 오가는 고양이. 이것들이 말로만 듣던 페르시안 고양이? 어린 고양이들인데도 눈빛이 날카로웠다. 배가 고픈 게로구나. 먹다 남은 음식을 손에 올려 내미는데 화악 달려들어 손가락까지 아프게 깨물었다. 조금 겁이 나 음식을 뜯어 던져 주는데 저희들끼리도 얼굴을 할퀴며 싸운다. 배가 많이 고픈 게로구나. 이 도시에 전쟁마저 나버리면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갈래? 그게 어디 너희들뿐이랴, 저 하늘에 나는 새들도, 위태롭게 서 있는 나무와 꽃들도…….) 광장으로 갔다. 엊그제 우리가 온 나라의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 노 워,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을 외치던 타흐리 광장. 점심을 먹던 식당만 해도 거리에 사람이 한산하여 불안했는데 타흐리에 닿으니 사람들이 꽤 많다. 이 정도면 어떻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광장 앞에 차를 대자 마자 걸개 천을 내리고 바리 바리 싸간 준비물을 내려 한 가운데 분수대 앞으로 갔다. 어디, 어디. 어디에서 하면 좋을까? 광장의 가운데 분수대가 가장 좋기는 한데 바닥에 페인트가 배겨날 게 걱정. 그렇다고 당장에 신문지를 구해볼 수도 없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냥 저 아래 잔디밭 쪽에서 하자, 아니 페인트가 배겨도 여기에서 하자, 저 쪽에 사람이 더 많은 곳으로 가서 하자……. 잠시 우왕좌왕하다 광장의 한 가운데 분수대 앞에서 걸개 천을 펼쳤다. 열 마 짜리 천이니 길기도 꽤 길다. 팀원 몇이 천을 반듯이 펼치느라 붙잡고 서 있으니 벌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걸개 천을 바닥에 잘 까느라 다 쪼그려 있는 우리 팀 사람들은 금세 사람 벽으로 둘러싸였다. 걸개 천을 둘러싸고는 임 기자님이 이끌어서 팀원들이 붓 하나씩을 들고 색을 발라갔다. 그리고 걸개 그림을 그리는 한 쪽에서는 혜란이가 물감 붓을 들고 팀장님 얼굴에 'peace'라는 글자를 넣어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점점 둘러싼 사람 수가 늘어났다. 이 외국인들이 천을 깔아놓고 웬 페인트칠을 하나, 또 이쪽에는 왜 사람 얼굴에 그림을 그리나? 하고 아주 호기심 ! 많은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아주 재미있어하는 얼굴. 사람들은 '헬로우', '하이, 미스터' 또는 '살롬' 하면서 말을 걸며 눈을 맞추어 웃어 보였다. 아직 얼굴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 자기도 그려달라, 나도 그려달라 하며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럼 한 번 보여주어야지. 구경하며 둘러 선 아이에게 가서 인사를 나누며 친하고 싶은 눈짓을 보냈다. 무릎을 꿇어 키를 맞추고 함께 웃다가 아이에게 안기라고 팔을 벌리니 아이가 안겼다. 아이를 품에 안아 번쩍 일어나서 보니 그 뒤에 아이의 아버지가 웃고 서 있었다. 아이를 안고 혜란이 쪽으로 가면서 아이 얼굴에 저런 그림을 그려주어도 되겠느냐 물었다. 아이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혜란아, 얘도 얼굴에 그려 줘."

얼굴에 닿는 붓질이 간지러운지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다 그릴 때까지 잘 기다려주었다. 빨간색, 녹색, 하얀색으로 그려 넣은 'peace'라는 글씨와 꽃무늬가 참 예뻤다. 아이에게 그림을 다 그려주고 나니 다른 아이가 자기도 해 달라 했다. 나도 해 볼 수 있을까? 붓 하나를 꺼내어 물감을 묻혀 조심스럽게 아이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아니, 먼저 조심스럽게 피, 이, 에이, 씨, 이 하고 알파벳을 썼다. 해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 다음 물감을 바꾸어 혜란이가 하던 것처럼 꽃잎을 그려 넣었다. 아이가 계속 웃었고 둘레에 선 사람들도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다큐 영화를 찍으려고 비디오 카메라를 가져온 혜란이가 그만 붓을 놓고 일어선 뒤에는 내가 붓질을 계속했다. 한 아이의 얼굴에 더 그려주고 나니 그 뒤부터는 구경하던 청년들이 팔뚝을 걷어 들이밀었다. 얼굴은 말고 자기 팔뚝에 그려달라는 거다. 한 청년의 팔뚝에 그려주고 나니 사람들 사이에서 서너 개의 팔뚝이 디밀어졌다. 서로 먼저 해 달라고 다투기도 했다. 내가 글씨를 그려 넣을 때 '피이쓰' 하고 말을 하면서 피, 이, 에이, 씨, 이 라고 철자를 불러주었다. 뿌듯한 마음, 기쁜 마음. 사람들에 둘러싸여 한참 얼굴에 팔뚝에 'peace'와 'no war' 글씨 그림을 그려 넣고 있을 때, 걸개를 만드는 쪽은 벌써 색을 다 칠하고 마무리만 남기고 있다. 걸개 위에 그려간 밑그림이 색깔 옷을 입어 점점 뚜렷해질수록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더 환해졌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사람들이 밀려들면 제복을 입은 이라크 군인이 더 넘어오지 못하게 그것을 막았다. 오히려 이라크 군인들이 우리와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이었다. 그림이 되어갈수록 사람들 관심이 커졌고, 우리는 붓을 현지인! 들에게 건네었다. 구경하던 이라크 시민이 붓을 건네 받아 굵게 쓴 'PEACE' 글자에 색을 입혔다.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구경을 하던 아이도 붓을 건네 받아 그림에 페인트칠을 했다. 걸개 그림 그리기를 다 마쳤을 때 우리 팀원들은 모두 나란히 그 앞에 늘어서서 한 사람씩 매직으로 자기가 하고픈 말을 써넣었다. 'Don't attack on iraq', '사랑해요', 'Yo!! peace', 'I love iraqi children', 'NO WAR', 'We are friend'……. 아무렇게나 걸개 바탕에 글씨를 써서 어지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우리의 마음 하나 하나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팀원들이 모두 한 마디씩 쓰고 난 뒤, 이라크 시민들에게 매직을 건넸다. 콧수염에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아랍 글자로 무어라 썼고, 허름한 잠바를 입은 청년이 그것을 건네 받아 또 한 마디를 썼다. 매직은 아이에게도 돌아갔고, 광장을 지키는 군인에게도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 팀의 여행 가이드를 해 주고 있는 (그와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카심 씨가 매직을 건네 받았고, 늘 우리 곁에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던 정부 요원도 구두를 벗고 올라와 한 마디를 썼다. 그야말로 우리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과 이라크의 민중이 함께 만든 걸개가 되었다. 그 광장에 있던 어른, 아이, 군인, 정부 요원 할 것 없이 누구나 이 땅에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바란다는 마음을 그 걸개에 담았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걸개 작업을 다 한 뒤 광장 뒤편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기려 아직 마르지 않은 걸개를 옮기는데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행렬이 되었다. 평화 팀원들과 아이들이 걸개 끝자락을 잡아 나르는 것만도 하나의 행렬이었는데 우리 둘레를 감싸며 따라오는 시민들, 그리고 마치 우리를 호위라도 하듯 곁에서 따라오는 군인들까지.

잔디 위에 걸개를 널어놓은 뒤 서둘러 과자 따먹기 준비를 했다. 카메라 다리를 길게 내어 준비해 간 과자를 매달았다. 바쁘게 손을 놀려 과자를 달고 있는데 그곳까지 따라온 시민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저 신기한 눈길, 또는 재미있다는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막대에 과자를 꿰면서도 우리는 과연 이 놀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마 한 번에 달려들어 순식간에 다 따먹을텐데, 이것 한 뒤에는 축구도 한 판 해야 하는데…… 하며 마음이 바빠 걱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 때 나눈 걱정은 불안한 걱정이라기 보다 어찌 되어도 좋은 그런 걱정이었다. 이미 이곳 시민, 아이들과 우리는 하나로 어울려 있었고, 반듯이 짜여진 무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를 둘러 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막대에 실을 매다느라 손이 바빴다.

준비해간 과자를 다 매달아 치렁거리며 놀이를 할 장소로 옮기는데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한 무더기였다. 대충 어디에서 달려 어디에서 과자를 따먹게끔 하면 좋겠다 싶어 막대를 든 사람만 그리 옮기려 해도 사람들은 자꾸만 과자 막대 쪽으로만 따라다녔다. 아이, 이러면 안 돼잖아. 팀원들이 사람들은 한 편에 기다리게 하고 과자 막대를 든 이들만 맞은편 끝으로 가 섰다.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는 거라고 설명을 해? 먼저 혁 선배와 승로에게 시범을 보여주라 했다. 출발! 둘이 과자 막대 쪽으로 뛰기 시작하는데 아니, 벌써 저 편에 서있는 아이들이 그 뒤를 떼로 쫓아왔다. 어, 어, 어, 어?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한 떼가 되어 달려왔다. 과자 막대 아래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고, 처음에는 입으로만 따먹으려던 것도 나중에는 펄쩍펄쩍 뛰면서 손으로 낚아채는 상황.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걸 준비하던 우리들은 아이쿠 하며 즐거이 웃었다. 아무렴 어떤가? 아이들이 이토록 좋아하고 사람들이 즐거워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한 아이는 내 앞에 와서 손가락 둘을 내밀며 자기는 두 개를 따먹었다 자랑한다. 또 다른 아이가 ! 과자 하나를 내밀며 내게 먹어 보라 한다. 우리는 그저 좋기만 하여 입을 벌린 채 준비물을 챙겨온 쪽으로 가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며 걸었다. 적어도 이 날만큼은 우리가 다니는 데로 행렬이 만들어졌고, 우리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이라크 시민들도 함께 움직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이들하고 축구를 한 판 해야지 하는데 그 사이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아쉽지만 공을 차는 것은 못하고 그만 가야할 준비를 해야 했다. 걸개는 걸고 가야지. 처음 우리는 다른 나라 평화팀이 그리 했듯 티그리스 강 위의 다리 난간에 거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인이 먼저 우리에게 광장 앞 넓은 교차로에 세워져 있는 깃대들 사이에 걸어달라고 했다. 아마 그 깃대는 여러 나라의 국기를 나란히 달아놓는 깃대인 모양인데, 이 전쟁을 앞두면서 타국의 국기들을 모두 내린 듯하다. 아무렴, 많은 국가가 미국의 편에 서고, 파병의 움직임까지 보이는데 그럴만도 하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시내의 한 복판, 많은 시민이 다니는 광장 건너편에 우리가 만든 걸개를 걸어달라고 하다니. 경찰이 나서서 우리의 행렬이 찻길을 건너갈 수 있도록 차를 막아주었고, 우리는 그 깃대 위로 올라가 걸개를 걸었다. 우리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과 이라크 시민들이 함께 그린 평화 걸개. 우리가 걸개를 거는 동안 시민들은 그 아래로 모여들었고, 교차로 건너편의 많은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보았다. 누구는 엄지손가락을 쳐 들! 어주었고, 누구는 입술 휘파람을 날리며 박수를 쳤다.

감동. 오늘 오후 이 광장에서 온 처음부터 그 순간까지 모든 게 감동이었다. 우리는 암만에 발이 묶일 때부터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보자 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예측하지 못했다. 겨우 페인트를 마련하고 흰 천을 구하고, 무조건 시민들이 있는 광장으로 나가 그이들과 함께 이것을 그렸다. 아마도 우리가 한국에서 만들어온 플랭카드를 내거는 거였다면, 그것이 아무리 멋진 것이라 해도 이토록 감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 아이들을 비롯한 이라크의 시민들과 함께, 그것도 군인과 정부 요원들까지 함께 만든 평화 걸개를 시민들의 박수 속에 광장 교차로에 걸어 놓은 것이다.

그 자리를 오래도록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시민들과 어울려 노래라도 부르고 얼싸 안고 춤을 추고 싶었다. 아이들을 안아 무등을 태우고 손을 잡고 광장을 달리고 싶었다 우리가 한 일은 어찌 보면 아주 하찮고 작은 일이지만 이곳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아주 소중한 일이었다. 평화란 결국 더 많은 이들이 친구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돌아오는 길, 어제 장애어린이 시설에 갔던 사람들을 위주로 해서 몇은 시설로 가고, 나머지는 숙소로 돌아갔다. 어제 눈을 맞춘 아이들이 용케도 알아보았다. 오마르, 낸씨, 야쓸, 노라……. 오늘 우리가 간 시간도 아이들이 막 저녁을 먹을 즈음이었다. 한 사람이 한 아이씩 곁에 앉아 밥 먹는 일을 도와줬다. 미처 일대일을 이루지 못해 혼자 밥을 먹던 오마르가 뒤에서 내 옷자락을 잡아다녔다. 왜애, 오마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니 오마르가 웃었다. 고개가 외로 접혀 있는 채로 얼굴을 찡그려 웃었다. 그래, 너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누군가 곁이 되어주는 일인데.

아이들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며 밥 먹는 걸 도와주다가 수녀님들이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밥상과 걸상을 치우고, 바닥을 쓸고. 늦게 먹은 아이의 밥그릇이 하나 남아 있어서 설거지를 하는 부엌이 어디인가 하다가 그 안에 있는 수녀님과 같이 설거지를 했다. 수녀님이 혼자 하겠다고, 그냥 두고 나가라고 떼밀었지만 같이 하겠다고 졸라 우겼다. 그게 우스운지 수녀님은 계속 웃었고, 나는 잘 되지 않는 영어로 말을 붙였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 수녀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그러면 이 나라에는 얼마나 있었냐? 아이들이 참 예쁘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전쟁을 반대하러 이 나라에 왔다. 수녀님은 전쟁이 무섭지 않으냐? 쉬운 단어나 손짓 몸짓을 섞어 얘기했지만 그런대로 잘 통할 수 있었다. 수녀님은 인도가 고향이라 했으며 이곳에 온지는 일 년 반 되었다 했다. 나는 서른 한 살이라 했더니 나이는 나보다 어리다고만. 수녀님은 전쟁이 무섭지 않다고 했다. 노우 프로블럼, 아임 낫 어프레이드.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며 죽거나 살거나 그것은 하늘의 뜻에 맡기다고 했다. 무섭지 않다는 말에 이상하다는 낯빛을 보이는 내게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는 듯 오히려 그것을 더 이상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여섯 시. 설거지를 마칠 때쯤 그곳은 미사 시간이 되어 그만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본능으로 안다. 혁 선배가 안고 있던 노라를 내어놓으려 하니 갑자기 노라가 울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리는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과연 하늘의 뜻이기만 할까? 이 아픈 아이들이 모여있는 이 집의 지붕에도 무서운 것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그래도 그것은 하늘의 뜻이기만 한 걸까?

정리 회의 시간, 며칠 미루기만 하던 체류 기간에 대한 해야 했다. a팀이야 내일 돌아가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고, 비자 연장을 더 하면서 남아 있을 수 있는 b팀 다섯 사람. 혁 선배, 임 기자, 혜란, 은국, 나. 우리가 바그다드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3월 중순은 되어야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 현지 소식통들에게 듣는 정보는 아주 달랐다. 유엔결의안을 심의하는 3월 7일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공습이나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반후세인 세력이 일으킬지 모르는 폭동 또는 내전. 팀원들에게 따로 제안하거나 의논하고 싶은 거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일단은 다같이 암만으로 나가기는 해야 했다. 관광 비자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한 팀이 된 다섯 사람은 모두 똑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입국을 하건 출국을 하건. 일단 나가서 암만에서부터 새로이 판을 짜야 했다.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오건 암만에 남아 난민지원캠프 활동을 준비하건 아니면 귀국을 해서 그 이후의 계획을 세우건.

정리 회의를 하다 보면 저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알게된 정보를 함께 나눈다. 일단 미국이 군사 기지로 주둔하려 했다던 터키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는 소식과 아랍의 친미권 국가들조차 이 전쟁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 이대로 미국이 계속 여론에 밀리고 부담을 안게 되면 전쟁이 안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실낱같은 희망. 그리고 하나 더 들은 얘기는 어제부터 휴먼쉴드로 온 사람들이 그만 숙소에서 나와 각자 정해진 주요 폭격예상시설로 옮겨갔다는 거였다. 이를테면 정수 시설, 전기 시설, 기름 정제 시설, 식량 창고……. 그런데 휴먼쉴드의 회의를 참관하고 온 김피디님이나 은국이, 승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안에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지금 휴먼쉴드 비자로 입국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라크 정부에서 숙식이나 밥 먹을 것을 모두 제공하고 있는데 일부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깊이 걱정한다는 거였다. 우리는 미국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후세인 정권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닌데, 자칫 그런 지원을 받게 되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게 되는 것 아니냐? 게다가 지금 이라크 정부? ?휴먼쉴드 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60군데인가 되는 주요 시설을 지정해 주고 몇 사람씩 그곳에 가 있으라고 배치까지 하려 한다고 했다. 휴먼쉴드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가 정말 지키고 싶은 곳에 가 있겠다, 왜 우리를 마음대로 통제하려 하는가 하는 것. 게다가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고 나면 이라크 정부가 본격적으로 휴먼쉴드를 이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체포와 감금, 나중에는 그야말로 인질로 쓰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 같다며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여 명 되던 휴먼쉴드 가운데 반 수 이상이 본국으로 나가겠다고 하거나 폭격 예상 시설물로 가지 않고 호텔에 남아 자유롭게 활동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어찌 되었건 이곳 현지에서는 위험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몸에 와 닿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보와 소식, 거기에 따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리 숙소로 한 한국인이 찾아왔다. 개인 사정으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이는 외국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다. 나를 포함한 3진이 암만에 들어가기 전 우리 팀과도 미리 연락을 나눈 모양이었다.

그이는 공부하고 있던 나라에서 바로 암만으로 들어가 휴먼쉴드 비자를 하루만에 받아 바그다드에 들어왔다 했다. 앞서 우리가 들어 알고 있는 정보처럼 이라크 당국은 휴먼쉴드가 입국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열어두고 있다. 심지어는 숙박과 식사까지 모두 대주면서. 그것이 이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든, 아니면 평화활동가들을 위한 배려이든.

유학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 대부분 비슷했다. 아니, 우리가 들은 정보를 조금 더 자세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어제 오늘 사이에 휴먼쉴드 안의 다양한 입장 차이. 사실 휴먼쉴드라는 모임은 애초부터 그 구성원의 아주 다양했다. 그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그저 휴머니즘으로 온 사람도 있고, 자유분방한 히피에서부터 무슬람 동지회 같은 사람들까지. 단지 그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이 전쟁을 막겠다는 것, 그리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 그이들은 저마다 행동양식이나 행동원칙 같은 것에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서도 조직 운영 방식을 보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아주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스페인에서 온 친구들은 조금 급진적인데, 바그다드에 들어와 대사관을 점거하고 후세인 정권에 대한 비판까지 한 일이 있어 그 뒤부터는 이라크 당국이 스페인 국적을 가진 이들에게는 아예 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다.

유학생은 자신의 비자가 앞으로 2주 더 있을 수 있는 것이라 하며 앞으로 휴먼쉴드의 일원으로 폭격 예상 시설에 들어가 있을 거라 했다. 시설에 들어가 있을 경우 밤에는 꼭 그곳에서 잠을 자야 하지만 낮에는 자유로이 다른 활동이 가능하다 했다.

대충 그 유학생이 팀 전체와 이야기를 나눈 뒤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따로 물었다. 암만에 있는 휴먼쉴드 본부의 연락처와 위치를 물었다. 지금도 암만에는 휴먼쉴드의 비자를 얻어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줄?잇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그다드에 있는 휴먼쉴드의 연락처, 그 유학생이 현재 머물고 있는 숙소의 연락처 따위.

그이의 얼굴은 가벼워 보였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하는 물음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반전평화팀으로가 아니라 먼 이국땅에서 공부하다 홀로 찾아 들어온 한국인, 우리가 내일 암만으로 돌아가도 그이는 홀로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2003. 3. 4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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