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6> 암만 캠프로 되돌아 나오며
이라크통신6> 암만 캠프로 되돌아 나오며
  • 박기범
  • 승인 2003.03.2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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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 캠프로 되돌아 나오며

- 모함마드가 내게 준 선물


오늘도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가뜩이나 손끝이 야물지 못한데다 산만하게 짐을 부려 놓았으니 아침이 더욱 바쁘다. 게다가 어제 장애어린이 집을 다녀오며 카심 씨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가능하면 오늘 아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책방을 같이 가기로 했다. 그냥 한 번 같이 가보고 싶었다. 시내 관광이나 시장 관광을 할 때도 혹시나 책방이 있을까 둘러보았는데 찾지 못했다. 이 쫓기는 마음과 긴장 속에서도 책방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라니. 혼자 생각에 내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끌려 다니는 관광 일정을 보내다 보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데 암만에 남아 IPT 비자를 기다리던 한상진 선생님이 숙소에 찾아왔다. 무슨 일인지 (아니, 사실 우리가 암만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내내 겪은 일이지만) IPT 비자가 계속 나오지 않았고,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이라크 외무성으로 전화를 걸어 방법을 뚫었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한국에서 파병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몇이 이라크에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비자만 기다리고 있던 한 선생님이 외무성과 통화를 하면서 평화활동을 하러 온 한국인을 못 들어오게 하면서 의원만 초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따져 물었다. 만일 나에게 비자를 내어주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이 들어가는 것도 막을 거라며 눙을 치기도 했다. 이라크로서는 지금 시기에 어느 나라의 의원들이 자국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에 커다란 여론 압박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의원 입국을 막을 거라는 말을 하니 그곳 관리가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하루만에 한 선생님에게 바로 비자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고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모습이 이라크 입국과 관련한 현재의 모습이다. 일단 이라크 비자를 받는 것 자체가 지금은 상당히 어렵다는 것, 그리고 비자를 내 주는 것에 뚜렷한 원칙이 없다는 것. 언젠가 한상진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이라크에서는 지금 되는 일도 하나도 없고, 안 되는 일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어쨌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나갈 준비를 하느라 짐을 꾸리고 있는 부산한 아침에, 놀랍게도 한상진 선생님이 바그다드 숙소에 찾아온 것이다. 팀원들은 나갈 준비로 짐을 꾸리느라 부산한 가운데 한상진 선생님에게 지금의 바깥 상황에 대한 것부터 IPT에서 나눈 정보는 없는지, 어떤 비자를 통해 들어왔는지 따위들을 물었다. 원래 오늘 오전에는 짐을 다 꾸려 차에 옮긴 뒤 아동 병원을 먼저 방문하여 준비해온 의약품을 전하려는 계획이었는데 한상진 선생님이 오면서 계획을 조금 바꾸었다. 그저께부터 휴먼쉴드로 온 사람들이 중요 시설에 배치 받아 들어가 있는데 그 중 한 곳을 방문해보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전하기로 한 의약품은 앞으로도 계속 바그다드에 있을 한상진 선생님이 전하기로 하고, 우리는 이라크를 나가기 전 휴먼쉴드가 들어가 있는 시설을 방문하자고 했다.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차에 짐을 실어야 할 시간까지는 얼마가 남아 있어 카심 씨에게 어제 부탁했던 것을 다시 물었다. 아,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안경점에도 들러 안경다리를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부탁과 함께. 그런데 갑자기 팀의 계획을 바꾼 데다 갑자기 들어온 한상진 선생님하고도 나누어야 할 얘기가 있기에 당장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사정이 그래서 같이 가주지 못하는 것인데도 카심 씨는 무척 미안해하는 얼굴로 자기 대신 우리 팀 운전을 해주고 있는 하이달과 같이 가도 되겠느냐며 하이달 씨에게 부탁했다.

내가 우리 팀의 다른 누군가 없이 이라크인과 단 둘이 어딜 가는 건 처음이었다. 영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좀 덜할까? 그것도 아니니 좀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이달은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고, 곧 둘은 어색함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겨우 할 줄 아는 짧은 영어로 궁금한 것을 물으며 서로에 대한 느낌을 얘기했다. 책방에 가기 전 안경점부터 먼저 찾았다. 처음 찾은 안경점 주인은 내 안경을 어떻게 손보아야할지 모르는 듯 했다. 하이달이 아랍어를 쓰는 안경점 주인에게 아랍어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지만 아마 그 안경점에서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이달은 오히려 내게 미안해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다른 안경점으로 찾아갔다. 주인이 안경다리를 고치는 동안 하이달이 진열장에 있는 썬글라스를 껴 보았다. 하이달이 워낙 잘 생긴 청년이기도 했지만 써 본 안경이 참 잘 어울렸다. 하이달에게 무언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을 잘 전하고 싶었다. 하이달은 깜짝 놀라며 극구 말렸지만 좀 전에 그이가 써 본 썬글라스를 사 선물로 주었다. 둘사이에 말이야 잘 통하지 않지만 눈빛이나 낯빛, 몸짓을 보며 느낄 수 있는 그이는 참 착하고 친절한 청년이었다.

안경을 고치고 나와 책방으로 가는 길, 하이달이 쥬스를 먹겠냐며 어느 가게 앞으로 갔다. 오렌지를 바로 갈아서 쥬스를 내주는 집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마음이 바쁘기도 했지만 하이달의 친절이 너무 고마워 잠시 들어갔다. 쥬스를 먹고 값을 치루려 하니까 이번에는 하이달이 끝까지 못 내게 했다. 자기의 마음이라고, 우리는 친구라고 말을 하면서.

책방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이라크 어린이 책을 살 수 있을까? 글자가 많은 책보다는 그림이 많은 책이면 좋겠는데. 대충 하이달에게 내가 찾는 책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나는 어린이 책을 보고 싶다고, 그림이 많이 있는 이야기책이면 좋겠다고, 이라크 사람이 쓴 이라크 창작이면 좋겠다고……. 내 말이 잘 전해진 건지는 모르지만 하이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어린이 책이라니까 눈이 커지면서 놀라는, 재미있다는 얼굴을 지었다. 늘어서 있는 책방 가운데 하나를 들어가 주인과 뭐라 뭐라 말을 했다. 아마 그 책방에는 어린이 책이 없는지 다른 가게를 소개했다. 다시 그 옆 가게로 들어가 주인에게 물어 보니 쌓아 놓은 책 가운데 몇 권을 가리켰다. 에이, 실은 조금은 실망. 인쇄나 제본 상태도 그러했지만 그림이라는 것도 (내가 그림을 볼 줄 몰라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내 기대가 좀 어처구니없었나 보다. 그래도 주인이 골라주고 하이달이 권해주는 책을 몇 권 샀다. 며칠 뒤 귀국하기로 한 팀원 몇에게 부탁해서 한국으로 보내면 좋겠다 싶었다. 이왕이면 이 책들이 재미있고 좋은 거였으면 하고 바라며 말이다.

하이달과 함께 돌아오는 길, 수첩을 꺼내어 그이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따위를 급하게 적었다. 사실 지금은 우리 팀이 모두 요르단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이후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직 드러내 놓고 이라크 재입국의 뜻을 드러내지 않고는 있지만 개인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요르단에 돌아가 재정비를 하고 다시 어떤 계획을 세울지 또한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나는 할 수 있는 한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오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라크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을 가정할 때,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나 혼자 한다고 가정할 때 현실적으로 걱정되는 건 한둘이 아니었다. 공습이나 폭격, 폭동 같은 전쟁의 위험이야 이미 각오를 한다 치더라도 도시의 지리도 전혀 모르고,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과연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인지, 최악의 위급한 상황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라크 재입국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내가 도움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뭐든 준비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이달. 물론 의례적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나자면서 언제든 전화나, 편지를 나누자고 했다. 짧은 시간 그이에게 받은 느낌으로만 모든 걸 믿을 수는 없지만 어찌했건 이라크에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라크인은 그이 뿐이었다. 이라크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그이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그이를 만난다. 혹 첫발을 딛는 순간부터 택시 기사와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영어 뿐 아니라 아랍글자로도 하이달의 연락처를 받아 놓아야겠다. 그리고 하이달에게도 대충은 말을 해 놓아야지. 떠듬거리며 내 마음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오늘 모두 요르단으로 나가지만 나는 다시 바그다드로 올 생각이 있다. 그러면 나는 하이달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 하이달은 눈이 커지면서 오케이, 오케이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나보다 더한 목소리로 꼭 연락하라고 이프 유 윌 컴백 바그다드, 유 콜 미, 유 콜 미 하고 말했다.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하면서 유 콜 미, 유 콜 미! 하이달 또한 전쟁을 앞두고 두려운 마음이라고 했다.

하이달은 28세, 앞으로 돈을 더 벌어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려 한다고 했다. 이라크는 지금 매우 위험하다, 다시 들어온다면 꼭 나에게 연락해라…… 하이달이 고마웠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어쨌건 이라크에 다시 들어온다면 붙잡을 끈 하나가 생긴 마음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팀원들과 함께 자동차에 짐을 실었다. 이제 휴먼쉴드가 들어가 있는 시설 하나를 방문하고 나면 이라크를 떠나는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들어왔던 이라크 국경을 넘어 다시 요르단 암만으로 나가는 것이다.

휴먼쉴드가 들어가 있는 시설, 폭격 예상 시설 방문에는 한상진 선생님도 함께 했다. 만약 내가 홀몸으로 이라크로 다시 들어온다면 내가 기댈 수 있는 두 사람의 한국인 중 하나. 지금 상황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라크에 끝까지 남겠다는 우리 팀의 공동 대표이다. 내가 그 분과 얼마만큼 행동 통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상황에 대한 정보나 현지에서의 언어 소통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버스를 타고 휴먼쉴드가 들어가 있는 시설로 가는 사이 수첩을 꺼내어 한 선생님의 연락처를 받아 적었다. 알파나하 호텔, 객실 번호와 전화번호, 그리고 전자 우편 주소.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 팀원들의 심중을 확인하지 않은, 우리 팀의 앞으로 계획을 짜지 않은 상태에서 그 어떤 상황을 전제로 했을 때를 준비한 것이다.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데 바그다드 시내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군인들이 거의 이백 미터 간격으로 쫙 깔려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저기 봐, 저기.", "군인이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실탄까지 다 지급되어 있네." 긴장이 감돌았다. 한겨레 임 기자님과 엠비씨 취재진은 바쁘게 카메라를 움직여 긴장된 시내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분명 이라크 당국이 무언가를 감지했으니 이렇게 군인들을 깔아놓았겠지.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모래 마대를 쌓은 진지도 곳곳에 보였다. 총을 매고, 실탄을 허리에 감은 군인들이 두서넛씩 모여 자리를 지켰다.

점점 자동차가 시내 외곽으로 나갔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태 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황량한 벌판, 띄엄띄엄 서 있는 허름한 집, 길목마다 지키고 서 있는 군인들 하지만 그 사이 사이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늘 보던 얼굴로 길을 걷거나 가게에 나와 장사를 했다. 탱크, 탱크가 보였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돌았고, 방송 카메라 또한 더 잘 담아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카메라 내려! 어느 길 들머리에선가 누런 군복의 군인이 우리 자동차 안을 유심히 보았다. 더욱 긴장되었다. 조심해야 한다. 자동차는 계속 달렸고 우리는 놀란 눈으로 창 밖을 주시했다. 어느 참호를 지키는 군인은 턱수염이 허연 노인이었고, 어느 길에서 본 군인은 앳된 소년이었다. 정녕 전쟁은 코앞으로 온 것인가? 3월 7일 개전설이 현실로 드러날 것인가?

시내 외곽으로 갈수록 곳곳에는 분대나 소대 가량의 군인이 모여 있기도 했다. 아,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서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의 정경. 우리가 달리는 길은 말하자면 시골, 채소밭과 과수원, 손을 대지 못한 공터가 멀리 보이는 농촌 마을이었다. 황량한 벌판과 사람이 손을 댄 밭과 과수원이 띄엄띄엄 이어진 곳. 바그다드 시내의 정겨움과는 또 다른 평화로움이었다. 그리고 아이들. 무기를 갖추고 군인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마을의 공터쯤 되는 곳에서는 아이들이 맨발로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외곽 도로를 달리는 중이라 그 모든 게 더욱 멀리 보여 그러는지 더욱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황량한 벌판을 홀로 걷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아무런 배경도 없이 지평선만 있는 철길 위에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또다시 어느 길목을 맞으면 대공포를 준비한 진지와 군인들이 나타났다. 전쟁이 터지면, 공습이 시작되고 이 군인들이 교전을 시작하면, 아이들을 비롯한 이 마을의 사람들은 어찌될 것인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을 찾은 것인지 자동차가 어느 건물 앞으로 가 섰다. 카메라를 맨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렌즈의 초점을 잡으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앞자리에 앉은 안내원인 카심 씨가 촬영은 안 된다고 손짓을 했다. 이라크에 오면 촬영 자체가 무척 제한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처럼 저지 당하는 일은 몇 번 없었다. 우리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원 카심 씨와 영어 능통자인 혜경, 승로가 그쪽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오더니 이곳은 우리가 찾던 시설이 아니라고 했다. 잘못 찾은 것이다. 왠지 불안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뒷날 내가 혼자 찾아다니게 될 상황을 그리니 무척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라크 인이 손수 운전해 주는데도 가야할 지점을 못 가고 헤매는데 나 홀로 모든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때는 어찌될는지.

다시 장소를 확인하고 차를 돌렸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타지에 식량 창고. 숙소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떼지어 있는 수백 마리의 비둘기. 식량 창고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수백 마리의 비둘기들이 땅바닥에 붙어 무언가를 쪼아먹거나 한 떼가 파다닥 날아올랐다. 식량은 곧 전략 무기이기도 하지만 수십, 수백만의 난민이 예상될 때 목숨을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하는 곳이다.

대공장처럼 거대한 식량 창고 한 쪽에는 집 몇 채가 아담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숙소인지 아니면 정부 정책으로 꾸며 놓은 것인지, 아무튼 휴먼쉴드 회원이 머무는 숙소를 찾아가자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네 명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집 앞에 조그만 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 늙은 여인 한 사람.

"어, 오셨어요?"

유학생은 참 밝고 경쾌하다. 어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지만 그곳에서도 긴장된 모습은 별로 찾지 못했다. 마치 집에서 편히 쉬다가 나오는 것처럼 편안한 옷차림과 슬리퍼.

그이를 따라 숙소 안으로 들어가니 방의 크기며 침대, 책상, 옷장 따위가 참 잘 갖춰져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라크 당국이 휴먼쉴드를 위해 모든 가구를 새로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웃으면서 유학생이 하는 말, 이 속소만 빼고 다른 집들은 아주 허름하고 그런데 아, 이거 여기 사람들한테 미안해 죽겠어요.

우리 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저마다 궁금한 것을 물었다. 씨는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 이곳 숙소에 와 보니 실제로 어떤지, 휴먼쉴드 안에서 새로이 얘기되는 것은 없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오며 본 시내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하루만에 싹 바뀐 도시의 모습, 바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군과 무기의 이동. 씨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 곳에서야 시내로 나올만한 마땅한 교통이 없다. 나갈 일이 있으면 본부로 연락해 차를 부르는 것뿐인데, 그 마저 막히면 그대로 발이 묶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씨는 바깥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 또한 놀라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이는 놀라더라도 밝은 낯빛이나 성격은 그대로였다. 어떻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는 일처럼 여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씨는 현재 그 시설 안 숙소에서 생활이야 좋다고 했다.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숙소부터가 그렇고 때가 되면 밥을 해다 주고.

하지만 자신도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추었다. 그리고 자신은 일단 비자 기간이 2주일이니 그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며, 자신도 상황이 너무 나쁘다 싶으면 판단해서 나올 거라고 했다.

씨가 지키고 있는 타지에 식량 창고에는 모두 네 사람의 휴먼쉴드가 들어와 있는데 그 가운데 둘이 전쟁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이라고 했다. 씨는 그이들의 얘기를 빌어 자신이 있는 식량 창고는 상대적으로 폭격의 위험이 적다고 얘기했다. 전쟁 경험으로 보았을 때 전쟁이 일어나면 전기 시설이나 무기 창고 같은 곳은 먼저 치지만 식량 창고에 대고 직접 공습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식량 창고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곳 가까이에 특수 부대가 치고 들어올 거라는 거였다. 그럴 경우 - 특수 부대가 식량 창고 가까이로 진입해 오는 경우, 그곳을 지키는 휴먼쉴드들은 둘레의 마을 사람들,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피난을 가겠다고 했다. 씨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그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마칠 때쯤 나는 수첩을 열어 이 식량창고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이 사람 또한 내가 이라크에서 기댈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 가운데 하나이다. 어젯밤 내가 다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자문을 구할 때에도 그이는 아주 자세히 그 방법이나 자신의 생각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홀로 들어오는 상황이 있다면 당신과 함께 움직이고 싶다고 말할 때에도 선뜻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이에게 연락처를 받아 적고 나오며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내가 휴먼쉴드 비자를 얻어 들어올 경우 이 식량창고에서 함께 있을 수 있겠는지. 그이의 대답은 아무래도 숙소가 다 차서 어렵지 않겠느냐 했지만 본부로 알아보아 하는 데까지 부탁해보겠다고 했다. 이 또한 그 어떤 상황을 가정으로 놓을 때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것뿐이다.

여러 외국인들이 들어가니 숙소 바깥에는 궁금해서 나와본 아이들이 참 많았다. 시장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나 주택가 골목에서 만날 때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넓은 길과 확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아무 움직이는 것 없이 아이들만 뛰놀았다. 아이들은 저희에게 손짓하는 낯선 외국인들을 보며 얼마만큼은 신기한 눈빛으로, 얼마만큼은 재미있다는 웃음으로 쫓아다녔다. 예쁘다. 식량 창고에는 공습은 없을 거라지? 그리고 특수부대가 진입해 오면 이 아이들을 안고 안전한 곳을 찾아 피신한다지? 그만 우리가 돌아 나올 때까지 아이들이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하늘을 닮고, 흙을 닮은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식량 창고를 나와 다시 바그다드로 오는 길. 창고 안 마을의 평화로움과 달리 바깥은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들어올 때보다 군인의 수가 더 는 것 같았다. 긴장하고 창문 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탱크 넉 대가 줄지었다. 시내 방향. 카메라를 든 분들은 다시 바빠졌다. 어쩌면 오늘이 바그다드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나자마자 바로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는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올지 모른다.

암만으로 떠나기 전 점심을 먹느라 바그다드 시내에 들렀다. 식당 안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데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인다. 지금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전쟁이 일어나도 따로 갈 곳 없이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을 겪어내야 하는 사람들. 그래, 전에도 거리 또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인시알라!" 하고 말할 뿐이었다. 몇 십 년 째 늘 전쟁을 겪거나 전쟁의 위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 위기 얘기가 나올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나갔다가 개전 시점이 계속 다시 돌아왔다. 언제나 전쟁 중 혹은 전쟁 위기, 그렇다고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시내로 탱크가 들어가고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늘어서 있지만 어쩌면 이들에게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하나인지 모른다. 꿉벅하면 라면에 통조림에 사재기를 해대는 우리의 모습과는 영 달랐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한 사람 더 카심 씨에게 주소와 연락처를 얻었다. 이번에는 사무실 뿐 아니라 집 주소까지 함께 적어달라 했다. 영어로 그리고 아랍글자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만일 어떠한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부탁했다. '만일 어떠한 경우' 카심 씨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카심 씨는 미더운 눈빛을 보이며 그러한 경우라면 자신에게 꼭 연락해달라 했다. 내가 바그다드에 홀로 들어오는 경우 기댈 수 있는 사람들 - 하이달, 한 선생님, 유학생, 카심.

요르단에서 이리 들어올 때 내려서 차를 갈아타던 정류장, 그리로 다시 갔다. 이제 그 때처럼 9인승 승합차 석 대가 오면 우리는 이곳 이라크를 떠난다. 하이달의 차에서 짐을 내리고 그 차를 기다렸다. 보아하니 지난 번 갈아탈 때도 그렇듯 한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모함마드. 내가 이라크 땅에 들어와 가장 처음 만난 아이. 정류장 바로 건너편에 사는 아이이다. 혹시 모함마드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여 담장 밖으로 나갔더니 모함마드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하이' 하고 인사를 했던가 '핼로우' 하고 인사를 했던가? 나도 '앗쌀라무 알라이꿈' 하고 인사를 했다. 반가웠다. 모함마드도 아주 반가운 얼굴이다. 모함마드가 손짓을 해 집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전 이곳에서 모함마드와 모함마드의 두 동생, 모함마드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났다. 마침 그 때는 모함마드의 아버지는 바깥으로 나가고 없었다. 모함마드네 집에 다시 한 번 들어갈 수 있을까 했는데 아쉽게 그럴 수는 없었다.

모함마드가 아랍어로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 눈이 반짝거리는 모함마드. 그 때부터는 녀석이 먼저 손짓으로 말을 했다. 이리 오라는 손짓, 대문에서 오른편으로 나 있는 마당으로 갔다. 손을 코에다 대고 무언가 만지는 듯한 시늉을 내었다. 뭐라고? 그게 뭐야? 이번에는 모함마드가 여기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송이가 큰 빨간 장미가 있다. 아아, 장미꽃을 보여주고 싶어 그랬구나. 그러더니 모함마드는 허리를 구부려 장미꽃에 코를 대었다. 다시 손을 코에 대며 무언가 만지는 시늉……. 우와! 모함마드 고마워.

마음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아까부터 코에 대고 무언가 만지는 시늉이 바로 냄새를 맡아보라는, 꽃향기를 맡아보라는 그 말이었다. 감동. 나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꽃에 코를 갖다 대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 그 향기를 맡았다. 고마워, 고마워. 모함마드 고마워. 땡큐, 슈크란, 모함마드 고마워.

모함마드는 두어 발을 더 가더니 이번에는 아직 터뜨리지 않은 꽃망울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이쪽 송이가 큰 장미꽃과 그 터뜨리지 않은 꽃망울을 번갈아 가리키며 두 손을 부딫혔다. 그래, 이것도 장미꽃이라는 얘기구나. 모함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터뜨리지 않은 꽃망울에 코를 대며 향기가 난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래, 그래 그것도 꽃이 피면 향기가 아주 좋을 거야. 뒤늦게 따라 들어온 itv 피디님께 모함마드가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아시냐고, 이 애가 나를 이 꽃 앞으로 데려와 향기를 맡아 보라 했다고 자랑을 했다. 아이가 그 말뜻을 알아들어서일까? 아이는 다시 송이가 큰 장미꽃 앞으로 가며 향기가 난다는 그 손짓을 했다. 그래, 맞아요. 저렇게 했어요. 모함마드가 이 꽃향기를 선물로 주었어요. 좋아라고 계속해서 그 자랑을 하고 있으니 모함마드가 장미꽃을 따 주겠다는 시늉을 했다. 마치 '따 줄까요?' 하는 눈빛으로 그것을 꺾는 시늉. 아니, 모함마드. 괜찮아. 이렇게 냄새를 맡는 게 너가 준 선물이야. 고마워, 모하마드. 그걸 꺾지는 마.

그렇게 모함마드와 손으로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모함마드의 동무들이 더 모여들었다. 이슬람, 요셉, 제이트. 아이들마다 주머니에 있던 버튼을 하나씩 가슴에 달아주었다. 나는 줄 것이 그것밖에 없다. 몇 분 있으면 차를 타고 떠날 것이다. 그걸 이제야 알았나?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겨우 그깟 버튼뿐이라니.

혹시 차가 왔는데 나 때문에 못 떠나고 있나 해서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정류장에 들어와 봤다가도 다시 아이들에게로 뛰어갔다. "유어 네임 이즈 박?" 아이들 중 누가 기억한 걸까? 이름이 '박'이냐고 내게 물었다. 어쩜! 나는 솔직히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수첩에 써 놓은 것을 꺼내 보고도 솔직히 그것이 어느 아이의 이름인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 이름까지 기억해주었구나. 얘들아, 지금 시내에는 총에 총알을 넣은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고, 커다란 탱크까지 들어와 있어. 전쟁이 곧 다가와 있다고, 언제 폭격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외국 사람들은 하나 둘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나도 너희 나라를 나가려 하고 있어. 결국은 몇 사람 없이 너희만 남는구나. 너희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도 나는 너희 이름을 다 잊었듯이 결국 나는 이방인으로 너희를 지나치는 사람일뿐이었을까. 같이 있고 싶어하는 너희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이방인일 뿐일까.

우리를 요르단으로 데려다 줄 자동차가 왔고, 아이들과 인사를 했다. 멀리,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인사를 했다.

열 시간이 넘는 자동차길이 시작되었다. 몸은 무척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이렇게 나오고 있지만 마음은 그곳 모함마드가 사는 마을과 식량 창고의 아담한 마을, 그리고 노라가 있던 장애 아이들네 집, 타흐리 광장과 올드 바그다드의 골목길에 있었다. 마음을 둔 곳과 몸이 있는 곳이 다른 것, 그것이 이토록 괴롭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차가 다니는 길 양 옆으로는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이었고 양떼가 보였고 낙타 떼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없는 모함메드와 노라, 낸씨, 나자르, 알리가 보였다.

다섯 시간을 넘게 달려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에 닿았다. 이라크 국경은 들어올 때도 무척 까다로웠듯 나갈 때에도 아주 까다롭게 짐 검사를 했다. 이런 저런 검사로 국경에서만 두 시간쯤 걸렸을까? 검사를 다 마치고 이제 정말 국경을 넘을 때가 되었다. 팀원들은 그곳까지 따라온 정부 요원 둘과 카심 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우리부터 경계하며 긴장했던 정부 요원들. 이제는 그이들하고도 정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우리보다 그네들이 더 한 것 같았다. 정부 요원 중 하나인 지하드 씨는 자기도 한국에 가고 싶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그이의 진심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자기가 한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정부 요원인 그들부터가 술을 마실 때마다 후세인 정권을 비판하는 얘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말을 들을 때 맞장구를 치거나 또 다른 질문을 더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부 요원의 그런 말과 행동이 미끼일지 모른다는 주의를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유인하여 당국에 비판적인 말을 한 뒤 체포를 해 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를 떠보려는 말이든 아니면 진심이든, 이네들이 현재 후세인 체제 아래에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한 사실. 자기도 우리를 따라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지하드의 눈물을 볼 때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자동차를 타기 전 카심 씨하고 한 번 더 작별 인사. 우리 팀원은 모두 하나 하나 카심 씨와 끌어안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카심은 관광 안내가 자신의 직업이지만 우리가 최대한 집회 참여나 행사를 가질 수 있도록 모진 애를 많이 써 주었다. 우리가 고아원에 가고 싶다면 그 일정을 만들어 주었고, 휴먼쉴드나 IPT쪽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그것을 도와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워하는 친구. 카심 씨와도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오르려 할 때, 나는 다시 한 번 승로에게 부탁하여 카심 씨에게 말을 전했다.

혹시 '그 어떤 상황'에서 내가 다시 이라크로 들어온다면 연락하겠다고, 도와달라고. 그 말을 하고도 승로에게 다시 한 번 '나 좀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해 줘.' 하고 말했다. 카심 씨가 다시 한 번 손을 꼭 잡으며 주먹을 감아 귀에 대었다. 꼭 자기에게 전화하라고, 연락하라고.

국경을 넘고 다시 다섯 시간을 더 걸려 암만의 알 아미라 숙소에 닿았다. 우리가 바그다드로 떠나기 전 길게는 보름, 짧게는 일주일 발이 묶여 있던 곳. 바그다드에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막상 열 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 이곳에 닿으니 오랜 고향집처럼 반가웠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할지 새로 판을 짜고 준비해야 한다.


2003.3.5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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