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흐리지만
날은 흐리지만
  • 이경달 칼럼
  • 승인 2022.06.30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든 일을 할 때이다. 때와 완치의 시기를 맞았다. 작은 비만 뿌리던 하늘은 우중충이다. 한 낮이면 더위를 잊기 위한 고양이가 뜰에서 늘어져 잔다. 지나가는 나를 실눈으로 본다. 가끔은 소리를 낸다. 고양이는 내 마음 속에서 어떻게 남았을까. 소리와 모습이 감정으로 전환되고 그걸 요소로 한 이미지가 ‘새로운 고양이’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저 고양이와 길 고양이와는 다른 내 마음 속의 고양이이다. 어쩌면 고양이와 더불어 살았던 추억도 판타지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그런 고양이의 판타지는 내게 무엇이 되는가. 무엇이 되어 그는 저 곳에 나는 이곳에 있는가. 아니면 구분 없는 공간에 이중의 모습을 하고 함께 존재하는가.

 

비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밭의 작물이 타 들어가는 안타까움이라는 그건 무엇일까. 한발은 악신처럼 느끼거나 진저리 치는 배경이 된 들에서 짓는 농사이다.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내 안에 있다. 사람을 만날 일이 드문 내게 의문이 있다. 왜 사람들은 ‘아는 체’를 할까. 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까. 일상의 거짓말이 그에게 무엇이 되는가. 혹 자기 안에 악신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감정은 ‘사물이나 사건 또는 환경’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이러니 ‘조건 반사와 같은 감정의 그들’은 항상 옳았다. 진행형인 사람이나 다시금 이런 부류에 편입되는 ‘인간’도 흔하다. 야생의 들판에서 고양이과 동물에 대한 격한 감정이 만들어 낸 그 판타지를 극복하는 것이 과학이다. 새로운 환경이라는 설명이 있어도 그들에게 그저 설명일 뿐이다. 지식과 관찰과 감정을 객관화하고 처한 환경을 객관화하고 나를 포한한 전체를 시간을 들여 객관화하고 또 연습하지 않는 이상 사람의 말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바쁘다는 것과 핑계가 결합되어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을 본다. 사회가 그리 흐르는 듯한 느낌이다.

풀의 키가 낮다. 자연 상태로 키워진 그 풀의 빛은 위로다. 위로는 내가 풀을 둘러싼 환경과 풀이 내게 남긴 오래된 유물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다. 한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위험하다고 하는 데 자기감정이 옳다고 우기는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자기감정이 자기환상이 옳다는 그들의 생각 과정을 따라가면 ‘대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의는 그들 안에 머물러 물러서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는 그 과정은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을 만든다. 아마도 죽는 그날까지 ‘스스로 정의’로울 것이다. 종교단체에서 볼 수 있었다. 환희에 찬 듯하고 진리를 발견한 듯한 그 태도 이면은 자기망상 자기환각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흔하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를 둘러싼 환경의 탈락’된 꿈같은 시간과 공간이다. 혼자 진지하다. 유머는 이들을 가로지르고자 하는 ‘의도’가 스며 있지만 애초 이해에 무관한 그에게 있을 턱이 없다.

교육에 이런 것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대안교육의 정반대에 있는 그들은 무엇을 구현하려고 할까. 그 나라의 시민교육을 부러워한다. 과연 학교를 다니거나 또는 중도에 그만둔 그들에게 ‘그들이 가진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는가. 헛된 일이다. 헛된 일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이 드물다. 그런 ‘종교인’의 탄생은 더욱 힘든 시대이다. 가난과 시련은 ‘동물 때의 기억이고 기억이 환상’이 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니 굶는 행위는 그 사람을 강력한 환상에 매달리게 한다. 망치가 있고 펜치가 있고 좋은 못이 있는데 돌로 못 박는 행위는 우습다. 더 우스운 것은 집안을 머릿속을 쓰레기로 채우는 일이다. 나는 어떤지.

사주관상 점복 풍수 꿈해몽 별점등의 책을 모았다. 버려지는 것들이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유사한 것으로 유럽인의 연금술이 있다. 이런 책에는 임의적으로 덧붙인 시공간이 있고 임의적인 곤란을 기술하는 내용이 있다. 오랜 환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설명을 위한 음양오행은 기본이다. 여럿 신들에 부처도 있다. 그리고 부와 권력을 향한다. 인간 내부의 망상이 ‘투사’된 언어의 나열이다. 이런 종류의 내용을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에서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수집하기도 했다. 이런 환상과 불교가 결합하고 이런 환상과 기독교가 결합하고 또 이런 환상과 영웅호걸이 결합하고 시대와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든 적이 없는 제초제의 탄생이다. 화학적 결함은 ‘낯설고 섬뜩한 것’을 탄생시킨다. 인간의 사고나 행동에 섬뜩한 것이 나타나는 증거이다.

산은 투자대상이고 좋은 물은 호텔이나 놀이공간을 만들기 좋다. 같은 옷이라도 브랜드가 결정하고 OEM이라도 거대 회사 로고가 먼저 들어온다. 대화는 주워들은 말로 이리저리 끼워 맞춰 가십으로 채운다. 말은 꼬리 이어붙이면 충분하다. 발견되지 않는 세계정신을 들먹인다. 기도하라 복종하라는 말은 신의 대리인의 당연한 가르침이다. 회색옷의 그들은 도를 이야기한다. 책만 보는 자는 나팔이 되고 생각만하는 자는 도깨비가 된다는 데 빠른 길은 도깨비이다. 말을 이어붙이면 된다. 현실이 사라지니 말과 행동은 자동기계이다. 무엇이 말하고 행동하게 할까. 무엇인가.

우리는 사물을 어이 이해할까. 우리에게 과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과 사실을 엮은 논리라는 것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을까. 자기망상을 벗어나 작은 들꽃이나 파도나 구름처럼 흐르고 흐를 수 있을까. 공존 가능할까. 자기물건을 치우고 정리 가능할까. 자기 머릿속의 망상은 걷어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언제쯤 일까. 50만년 후 아니면 내일쯤일까.

밤꽃둘레로 벌레소리 굉장하다. 멀지 않는 곳에 벌을 친다. 그 벌들이 때를 만났다. 밤나무가 거대하다. 가끔 이웃에게도 보이는 밤나무다. 흉내 내지 말고 자기의 나무를 심었으면. 단풍나무도 가득이다. 멀지 않는 날 갈무리된 그 나무의 꽃을 볼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한계를 자각하는 것이다. 신의 비밀을 알았다는 우스개도 흔하다. 인간 어리석음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유머가 떠오른다. 무리한 어제의 일에 오늘의 어깨가 저린다. 다행히 손은 펴진다.

날이 흐리다. 비가 올 기미가 아니어도 날은 흐리다. 어제 남은 일을 마쳐야한다. 누구의 핑계도 없이 마칠 일이다. 언덕에서 ‘이것저것의 일’을 미리 긴장하고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행한다. 일을 하지 않아도 미리 긴장하고 생각만으로도 긴장한다. 소통이 무너진 이 언어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가.

- 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