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젊었다. 젊고 약간은 비딱한 그들에게 ‘시인 김수영’은 무엇이었을까. 어디에 있는 시인이고 시는 그에게 무엇이 되는가. 참 오래된 시인의 이것저것이 지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를 마음에서 발견하고 쓴 시에 부친 노래 ‘멀리 있는 빛’이다.

습기 가득한 공간에서 데워진 근육은 괴로웠다. 숨이 턱 끝까지 밀려온다는 말을 실감한다. 헐떡인다. 가파른 숨. 생명의 괴로운 부분인 듯하다. 길 둘레 풀을 베다. 비워지는 그 길에 누가 온다는 예감이다. 낯설거나 아니거나 등장하는 설레임이다. 아래 긴장이 있다. 어쩌면 대극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명은 피고 지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고 달리 존재의 형태만을 바꾸는 듯하다. 괴롭거나 설레거나 긴장하거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감정’이다. 이 뿌리가 생명의 시작인가. 그저 추측이다.
아닌 것을 인 것이라 하고 인 것을 아닌 것이라고 한다. 흰 것을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한다. 여우를 사슴이라 하고 사슴을 말이라고 한다. 기억에 남은 말이다. 장소도 시간도 잊어버렸다. 빽빽한 교실에서 들었을까. 오전반이 있었고 오후반이 있었다. 콩나물 교실은 우스개였다. 칠십 명이 넘는 아이들과 형과 동생이 한반이기도 했다. 초등학교도 사립이 있었다. 공립학교 건물은 붉은 벽돌로 바닥은 마루였다. 오후 5시가 되면 학교일 하는 분들이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냈다. 방송은 나가라는 강경한 메시지였다. 어디로 갔을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노래를 들었을까.
흔한 논리의 거짓말이다.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잣대가 있다. 흔하니 돌아보면 발견한다. 이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희박해진 현실감각으로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마음 어느 자리에 있는가. 불안과 공포가 겹치면서 흔들리고 있을까.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늘 있는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극복할 수 없는 물결이다. 그들도 어디에서 듣는 노래에 묻어 있는 ‘멀리 있는 빛’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은 숙명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 곁을 맴도는 현실과 무관하게 보이는 격한 감정이다. 감정이 픽션의 바탕이라면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산등성. 흔하게 보였던 무덤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 베어진 둘레가 우거졌다. 비와 더위가 몰고 온 큰 키의 풀이다. 무덤은 아래에 저물어 있는가. 아니면 깊은 곳이라 감추어져 있는가. 무덤은 영혼이 머물기에 너무나 작다. 영혼은 바람이고 별이고 폭풍이고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인 까닭이다. 무덤은 산자의 까탈이다. 건너편에서 풀 베는 기계소리이다. 그들은 여름이면 온다. 때때로 오기도 한다. 무덤의 풀은 그들에게 무엇이 되는가. 오랜 인간의 기억에서 크게 자란 풀의 지긋지긋함이 보는 마음에 스며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도 확인해 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풀은 그저 자란다. 비온 뒤면 무성하고 더운 날 벼과 식물은 잎에 칼날을 단다. 매미 소리에도 풀은 자란다. 예초기가 지나가고 그 옛날 제초제에 저려 있던 그 밭도 풀이다. 무덤으로 간 그들을 뒤로 하고 그가 가꾼 밭은 풀이다. 그저 풀이고 풀이다. 바람에 무심하다. 바람의 진저리를 흘러 듣는다. 때가 되면 그들은 절로 칼을 거두고 무성함을 거두고 빛을 거두어들인다. 풀빛은 바다고 흙이고 또 투명하다.
둘레에 죽은 자가 꽤나 된다. 죽음은 산자를 그리워하고, 산자는 죽음을 막연하게 또 그리워한다. 멀리서 보는 무덤과 집은 구분이 없다. 도회지에는 무덤이 없다. 먼 그곳의 무덤가에는 인가가 없다. 이제는 멀어져 서로가 잊고 사는지. 도회지 중심에 무덤을 조성하자면 아마 미쳤다고 할 것이다. 외국 어느 도시의 무덤은 여기와 달랐다. 멀지 않는 경주에도 무덤은 도회지를 덮고 있는데. 땅위의 생산은 산 자들만의 몫이라고만 생각하는지.
잔디 같은 마당의 풀 위로 버섯이 원을 그리고 있다. 그 때 풀도 자라지 않았고 땅을 파면 폐비닐 가득했다. 긴 시간이 지나 버섯이 줄을 짓고 원을 그린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객’을 위한 ‘담배’를 준비할 리 없다. ‘객초’의 그가 쓴 시와 그 암울한 시대의 가객이 노래를 한 것이다. 그러니 ‘멀리 있는 빛’이 되었다. 빛은 어둠에서 그 존재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 빛은 참으로 멀리 있는 그런 복잡한 ‘나’의 감정과 생명을 보는 느낌이다. 주인은 누구이고 손님은 누구이며 준비해둔 담배는 무엇인가. 그리고 객과 함께 피우는 담배의 맛은 어떠하며 연기는 어디로 가는가. 연기를 보는 주인과 객이 하나가 되고 담배와 하나가 되고 하나가 또 둘로 분화하고. 가객 김영동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소리에 빠짐이 없었다. 숨 쉴 곳에는 빠짐없이 호흡이 들어갔다.
그 때 사람과 함께 이 노래를 듣고 싶다. 할 수 있다면 그 곳 막걸리를 구해서 강모래에 걸쳐두고 듣고 싶다. 아무런 악기도 없이 그저 그의 감정과 절제, 반가움과 슬픔이 실린 어둠과 빛의 노래를 듣고 싶다. 그런데 이 노래를 아는 이도 드물다. 그녀에게 물어도 모르는 노래였다. 모르는 노래를 혼자 또 듣나보다. 노래는 만든 자가 있고 부르는 자가 있고 듣는 자가 있다. 그러니 모르는 노래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반문이다. 어쩌면 그럴 것이지만.
-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