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는 광명 역사④...광명 3·28 만세운동 그 후
톺아보는 광명 역사④...광명 3·28 만세운동 그 후
  • 권용화 칼럼
  • 승인 2022.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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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온 땅에 만세의 물결이 퍼진 때. 3월 27일 시흥군 서면 소하리(지금의 광명시 소하2동) 청년 이정석은 만세를 부르다 보안법 위반으로 노온사 주재소에 체포된다.

아버지 이종원은 3대 독자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윗마을(지금의 광명시 설월리) 최호천에게 도움을 청하고, 최호천은 윤의병과 함께 사람들 200여명을 모아 왕복 5시간 거리의 밤길을 달렸다. 그러나 일본 순사의 보복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김거봉(김인한), 최정성, 류지호, 최주환이 고문을 비롯 최소 1년 6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본지는 1호에서 광명 3·28 만세운동을 알리고, 2호와 3호에서 3·1운동 당시 배경, 그리고 경성과 이북 도시에서 첫 함성이 터진 후 광명까지 만세운동이 닿은 과정을 다뤘다. 이제 4, 5호에서는 당시 광명 3·28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분들의 후손과 연락하여, 지금까지 광명에 알려지지 않았던 만세운동 그 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미지: 청샘 박소영 <마음 12> / 50ⅹ70㎝ 장지에 수묵 담채 

 


최호천崔浩天 1899. 1. 9. ~1960. 4. 12.

1919년 3월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 생도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최호천은 이정석 탈환 시도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최호천은 1915년 결혼해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나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의 부탁을 받고 처음 일을 도모했다. 1919년 5월 28일, 보안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재판에 참여도 못한 상태에서 징역 4년을 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1921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 같은 해 2월 28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최종적으로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최호천 판결문〉 대정10년(1921년) 형공제5호
〈최호천 판결문〉 대정10년(1921년) 형공제5호

최호천의 출소와 학업 이수 후 일가는 서면 소하리에서 경성 종로로 이주했다. 1926년 장남 최종인 님이 태어났다. 최호천은 수완을 발휘하여 사업을 번창시켰다. 그리고 사업 이윤 중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결국 이는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최호천의 가정은 풍비박산을 맞았다.

최호천 지사는 족보에 1960년 동대문에서 타계했다고 적혀 있으나, 장남 최종인 님(2010년 작고)은 최호천 지사가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1945년 해방, 1950년 6.25 동란을 거치며 최호천 지사가 어떤 환경에 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임종을 후손들이 지킬 수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최호천 지사의 유해는 간신히 가족 품에 돌아왔으나, 화장 후 뿌려져 묘소조차 없다. 최종인 님은 훗날 부산까지 내려가 아버지 최호천 지사에 대한 기록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1919년 21세였던 청년 최호천은 1960년 그렇게 한 줌 재로 스러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밤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찾으러 가 줄테니. 어르신도 같이 가요.” - 1919년 5월 28일 판결문 인용(※현대어 의역)

이듬 해 1961년 최호천 지사의 장손자 최학재 님이 출생했다. 최학재 님(61)은 할아버지 최호천 지사가 "매우 엄격하고 성정에 불같은 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최학재 씨는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관련 사진이 놓여 있었음을 기억한다.

독립운동에 몸담은 민초와 그 가족은 '한(恨) 많은 조부모', '한 많은 부모'로 후손에게 각인되었다. 국가는 만세운동의 주역을 나라 이미지로 삼고 싶어 했지만, 만세운동의 뿌리이자 몸통인 민초들은 잊혀졌다. 긴 세월 동안, 아니 지금도 그들은 암막 속에 있다.

최호천 지사의 서훈은 1990년 애족장으로, 사후 30년 후에야 이루어졌다.


매일신보 1921년 1월 27일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연구원

“피고 최호천을 징역 4년에 처한다. 피고 윤의병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 이종원을 징역 2년에 처하고 김거봉(김인한) 최정성 류지호 최주환을 각각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단 피고 최호천은 *궐석이므로 스스로 이 판결을 송달 받거나 또는 판결 집행으로 형이 언도되었음을 안 날로부터 3일 이내에 *고장을 *신립할 수 있다.”-1919년 5월 28일 판결문 중에서

*궐석재판(闕席裁判) : 피고인이 재판정에 나오지 않은 채 치러지는 재판
*고장신립(故障申立) : 피고인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여 재판을 원점에서 재개하는 제도

 

윤의병尹宜炳 1900. 12. 14. ~ 1960. 9. 29.

윤의병은 1919년 3월 배재고등보통학교 생도로서, 같은 학교 최호천처럼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이정석 탈환 시도에 참여, 시위를 주도했다. 구금자탈취미수죄, 소요죄로 1919년 5월 28일 징역 3년이 구형됐다. 일제의 판결에 거듭 항거했으나, 경성복심법원, 고등법원,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1920년 6월 징역 2년에 처해졌다. 구류 상태에 있던 240일이 소급 적용되어 1921년 출소했다.

윤의병 지사는 출소 당시 이미 고문 후유증으로 척추에 이상이 생긴 상태였다. 윤의병 지사는 허리가 점차 심하게 굽고 걸음걸이마저 힘들어져 평생 어떤 직업도 갖지 못했다. 또한 일경들의 괴롭힘이 그를 따라다녔다. 때문에 가족들은 윤 지사를 혈혈단신 만주로 망명 보냈다. 윤 지사는 만주 목단강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인 조국동지회’에 가입했다.  윤의병 지사는 소하리와 국경 너머 만주를 오가며, 고문 후유증과 일경의 감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3·1 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통치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다소 생기자 이원익의 후손 이연철의 후원으로 소하리에 야학이 설립됐다. 윤의병 지사는 1927년 11월 경 이순구, 이병대, 이범규 등과 함께 야학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무급이었다.

(왼쪽) 장남 윤형중과 함께 한 윤의병 지사 ⓒ윤석규
(오른쪽) 만주에서의 윤의병 지사(1923년, 오른쪽) ⓒ윤석규

 

윤의병 지사의 집안은 소하리에서 꽤 영향력이 있었다. 윤 지사의 본가 ‘서면 소하리 924번지’는 넓은 정원에 연못까지 있는 ㅁ자형 큰기와집 이었다. 윤 지사 형님은 마을 면장으로 집안에 늘 수많은 식객과 하인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1940년 12월 윤 지사가 조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고도 한참을 윤 지사 가족은 그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윤 지사와 그 가족에게 독립운동은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닌 숨겨야 하는 낙인 이었다. 

맏아들 윤형중 님의 생년은 1923년이며, 장손 윤석규(77) 님은 1946년 태어났다. 윤의병 지사는 윤석규 님을 각별히 아꼈다. 윤석규 님 가족은 초등 입학이 다가오자 장손에 대한 윤 지사의 교육열로 서울로 이사했다. 그렇지만 윤의병 지사는 가정 형편으로 장손과 함께 살 수 없었다. 때문에 윤석규 님의 중학교 시절에, 윤 지사는 장손을 보기 위해 학교까지 찾아오곤 했다.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김치를 내 오시면 그걸 쫙 드시고 괜히 제 머리만 쓰다듬고 착하게 쳐다보고 쳐다보고... 제가 학교에 못 오게 하니까 집으로 저를 보러 오시곤 했어요.  _장손 윤석규 님의 회고 

윤 지사가 굽은 허리와 통증 때문에 학교 창문턱에 팔을 괴고 있으면, 친구들은 “너희 할아버지 오셨다”며 웃음으로 알려주곤 했다. 당시 윤석규 님에게 할아버지의 척추가 굽어진 이유에 대해 알려준 이는 없었다. 윤석규 님은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찾아오시거나 자꾸 마중을 나오심이 어린 마음에 곤란하고 때로 창피함까지 느꼈다. 윤석규 님은 평생 이것을 죄송스러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1960년, 윤의병 지사는 성북구 안암동 윤석규 님 숙부 댁에서 타계했다. 윤의병 지사는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나 넓었던 광명시 소하 924번지는 난개발된 시멘트 건물과 도로가 들어찬 채,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19년 3월 28일 이정석 구출을 시도한 그 밤. 마을 사람들은 돈과 금, 권력이 탐나서 다른 이를 노략질하고자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민초들의 항쟁은 숨겨야할 부끄러움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와 잘 나누고 있는가?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떻게 기억될까? 아이들과 기억과 공감을 함께 나누자.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①
톺아보는 1919년 3월을 담은 공간

《서울 탑골공원》 _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1919년 3월 1일 이북 도시와 함께 최초의 만세 함성을 울린 경성의 만세운동 발상지. 관리 부실로 인해 3·1 만세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수 없어 안타깝다.
(1호선 종로3가역에서 도보 10분)

《서대문독립공원》(독립근린공원) _서대문구 통일로 251
고종 대에 중국 사대주의의 상징 영은문을 헐고 지은 독립문(1896~1898)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1992년 8월 15일 개장하여 2009년 10월에 재정비된 역사공원이다.
(3호선 독립문역에서 도보 10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_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1919년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이들이 구금됐고, 일제가 1908년 세워 의병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고통을 가했던, 일제 형무소 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1987년 11월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닫고, 민주화운동 역사를 더해 1998년 11월 역사관으로 문을 열었다.
(서대문독립공원 내. 매주 월요일 휴무)

《딜쿠샤》 _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사직로2길 17
사업가이자 AP통신 임시기자로서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해외에 전한 로버트와 연극배우였던 아내 메리 L. 테일러 가족의 집. 1919년 3월. 로버트가 세브란스 병원에 갓 태어난 아들을 보러 왔을 때, 아들의 침상 밑에는 ‘조선기미독립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다. 비밀리에 반출된 독립선언서는 기사화되어 3월 12일 뉴욕타임즈에 보도됐다. 딜쿠샤는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2021년 3월 1일 개관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도보 15분. 매주 월요일 휴무)

《배재학당역사박물관》 _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기초를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 기관이다. 2008년부터 역사박물관이 된 이 곳은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의 동관이다.
(딜쿠샤에서 도보 30분. 1호선 시청역에서 도보10분 / 매주 일요일·월요일 휴무)

 


참조 자료 및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samil 2022
공훈전자사료관 e-gonghun.mpva.go.kr 202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heritage.go.kr 2022
디지털 광명 문화 대전 2022
<광명시 독립운동가 이야기> 광명시 2019
<광명지역 삼일운동과 항일 농민항쟁사> 성동수 광명문화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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