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는 광명 역사⑤...광명 3·28 만세운동 그 후 2
톺아보는 광명 역사⑤...광명 3·28 만세운동 그 후 2
  • 권용화 칼럼
  • 승인 2023.02.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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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8일 만세운동 당시, 소하리·가리대 리 주민 200여 명의 이동 경로 추정도 1919년 3월 28일 200여 명이 움직인 길을 정확하 게 재현할 수는 없다. 독립유공자 후손 최문용 (79)·류희왕(72) 님은 설월리 토박이로 70여 년을 살아 온 경험에 비추어 이동 경로를 추정한다. 한 무리는 횃불을 들고 가리대리에서 구름산으로 들어가, 나무하러 다니던 길로 한치고개를 통해 갔을 것이다. 다른 무리는 영당말 쪽으로 가 구름 산을 넘어 노온사주재소까지 갔다고 추정한다. 광명은 ‘걷고 싶은 길, 놀고싶은 숲’을 주제로 경관 조성을 진행한다. 더불어, 이야기가 담긴 ‘역사의 길’도 복원하면 좋겠다.

광명 3·28 만세운동!
1919년 3월 27일, 시흥군 서면 소하리 아 랫말(지금의 광명시 소하2동) 청년 이정석이 대 한독립만세를 부르다 노온사 주재소에 체포된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은 아 들을 구하기 위해 윗말(지금의 광명시 설월리) 최호천에게 도움을 청하고, 3월 28일 밤, 최호천과 윤의병이 이끈 소하리와 가리대리 마을 사람들 200여 명이 밤 11시 경 주재소를 포위했다. 이정석의 석방과 약속 수행 각서를 요구했다. 일본 순사는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내일 (이정석을) 풀어주겠다” 약속한다. 마을 사람들은 순사가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하고, 3월 29일 새벽에야 마을로 돌아와 작은 동산(지금의 서면초등학교 자리)에 올라 다같이 만세를 외친 후 집으로 돌아 갔다. 그러나 다음 날 일본 경찰이 마을을 덮쳐 시위 주동자를 체포했다. 광명 3·28 만세운동 사건은 마을 사람들의 주재소 습격과 이정석 석방 요구로 인 해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김거봉, 최정 성, 류지호, 최주환 7명이 재판에 회부되 어 구금과 옥고를 치르고, 구금과 옥고를 치른 사건을 말한다.

광명 3·28 만세운동 그 후 - 2
지난 호 최호천·윤의병 지사 편에 이어 계속

이종원李宗遠 1864. 1. 12.~1940. 6. 23.
이종원 지사는 이정석의 아버지로 1919년 3월 28일 당시 56세였다. 지팡이에 의지 한 노년의 나이에 노온사 주재소(현재의 온 신초등학교)까지 왕복 5시간 이상의 밤길을 동행했다. 1919년 5월 28일 재판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다. 이후 윤의병 지사가 항소할 때 이종원, 최정성 지사와 함께 재심을 요구했다. 두 번의 재판을 거쳐 1919년 12월 19일 벌금 30원 형으로 감형 하기까지 약 9개월 구금 생활을 해야 했 다. 이종원 지사는 1992년 대통령 표창에 서훈됐다.

 

이정석李貞石 1900. ?. ?. ~ 1972. 8. 13.
광명 소하리에서 3월 27일 최초로 만세를 부른 이정석은 노온사 주재소에 잡혀 본서로 이송되었다가, 마을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삼대독자 이정석은 아버지 이종원과 함 께 당시 소하리 아랫말 898번지(지금의 소 하2동)에 살았다.

이정석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으며, 1972년 그 집에서 작고했다. 이후 이정석의 3남과 그 후손이 그 집에 살았으나, 아랫말 898번지는 재개발로 건물이 들어섰다. 동네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인한金仁漢 (또는 김거봉金巨奉) 1899. 10. 15.~ 미상
1919년 5월 28일 재판에서 1년 6개월 형 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본적은 소하리 326번지이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이 서 훈되었으나, 김인한 지사와 그 후손은 1950년 6·25전쟁 중 모두 작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정성崔正成 1898. 2. 3.~1945. 5. 18.
1919년 5월 28일 재판에서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항소를 통해 이종원 지사 와 같이 벌금 30원 형으로 감형받고 약 9개월 구금 생활을 했다.

판결문에 의하면, 최정성 지사의 본적지는 소하리 924번지로 윤의병 지사의 본 적지와 같다. 최 지사가 윤 지사의 식객 으로 있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후손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최정성 지사는 2022년 대통령 표창에 서 훈됐다.

 

최주환崔周煥 1885. 2. 18.~1950. 7. 15.
최주환 지사는 1919년 5월 28일 재판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고 구금과 옥고를 치렀다. 최주환 지사는 1990년 애족장에 서훈됐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며 현재 장손 최문용(79)님이 설월리에 토박이로서 살고 있다.

최주환 지사의 본적 소하리 358번지는 현재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시멘트 건물로, 작은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류지호柳志浩 1892. 5. 19.~1977. 5. 4.
1919년 5월 28일 재판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날 그는 거 적에 싸인 채 마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 다. 당시 17세였던 류 지사 조카딸이 “과연 살아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또한 류 지사의 아내는 심적 충격으로 요절하는 등 집안의 아픔 을 겪었다. 류지호 지사는 다행히 몸을 추슬러 1920년 12월 1일 강순희 님과 재혼했다.

3남이었던 류 지사는 류 씨 가문 토지인 363번지 안에서 두 번에 걸쳐 분가하며 집을 옮겼다. 그러다 지금까지 후손이 살고 있는 소하리 363-24번지에 정착해 1977년 이 집에서 작고했다.

류지호 지사는 1945년 해방과 1950년 6· 25전쟁의 부침을 겪으며, 7명의 지사 중 가장 장수했다. 류 지사 아래로 4대가 번성했다.

류지호 지사의 장손 류희왕 님(71세)은 할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건장하셨어요. 초등학생 시절 3·1절 행사 때가 되면 단 상에 올라 만세를 부르셨어요.” 류지호 지사의 장손 사랑도 지극해서, 운동회 때면 부모를 대신하여 조부모인 류지호 지사·강순희 여사가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류지호 지사는 1990년 애족장에 서훈됐다.

류지호 지사의 설월리 자택은 7명 지사 댁 중 지역의 난개발에도 유일하게 남아, 장손 류희왕 님 부부가 지키고 있다. 하지만 <구름산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곧 헐릴 위기에 있다.


오리 이원익 대감의 10대 종손 이연철이 손자 이병돈을 안고 있는 모습(오른쪽) 1920년대 초사진 출처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 오리 영우 정밀실측조사보고서> 광명시 2018 (원본 <오리 이원익 종가의 근현대 이야기>p81 ⓒ충현박물관 2010)
오리 이원익 대감의 10대 종손 이연철이 손자 이병돈을 안고 있는 모습(오른쪽) 1920년대 초사진 출처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 오리 영우 정밀실측조사보고서> 광명시 2018 (원본 <오리 이원익 종가의 근현대 이야기>p81 ⓒ충현박물관 2010)

소하리 운양의숙雲陽義塾과 서면초등학교

운양의숙은 오리 이원익의 10대 후손인 이연철(1870~1938)을 중심으로 세워진 광명 지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소하리 883-13번지에 있었으며, 1908년(융희 2 년) 교사 낙성식을 열었다.

1911년 11월 안산에 시흥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자 운양의숙은 시흥공립보통학교의 분교장 역할을 맡았다. 1925년, 교사가 노후되자 주민들과 뜻을 모아 소하리 904번지에 교사 신축을 하고 서면공립보통학교 인가를 받아 개교(1927년 4월 1일)했다. 당시 교사 신축에는 1만 수천 엔(円)의 거금이 들었지만, 당시 5,959명이었던 면민들의 기부금으로 전액 부담됐다.

서면 공립 보통학교는 1950년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불타 전쟁 후 개축, 서면초등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면 소하리와 노동야학

3·1운동의 여파로 일제는 기존의 무단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선회하여 언론 ·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했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1930년 경까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도시에서는 야학운동, 농촌 지역에서는 각종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시흥군 일대에서도 야학이 곳곳에 개설됐으며 YMCA·YWCA·천도교조선농민사·동아일보 등이 주체가 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노동야학 성황
“학자學資가 없어서 또는 학령·연령 초과 등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명 퇴치 운동의 차원 으로 시흥군 서면 소하리[오리동 지역]에서 윤 의병(尹宜炳)·이순구(李舜九)·이병대(李丙 大)·이범규(李範圭) 외 여러 명의 청년들이 이곳 유지 이연철(李淵哲)의 후원을 얻어 설립하였다. 가옥[지하실]을 건축한 후 1927년 11월 중순부터 노동야학회를 개최 하고 20여 명의 무학자를 모집하여 교수하여 오다가 기후 관계로 동리 유지 김흥출 (金興出)의 집을 빌려서 다시 노동 야학 운영을 계속하였다. 교수 과목은 조선정음 (朝鮮正音)·한문·산술·상용어(常用語) 등이 었으며, 윤의병·이순구·이병대·이범규 등 네 명의 청년이 교사로 이들을 가르쳤다.” -시흥

 

제2회 학생 브나로드 운동 각지 대원 소식(기 21)
2천 계몽 활동개시
2천리 촌촌에 글소리 낭랑

생도 2백 여
유력 단체 후원 하에

“7월 23일부터 귀사의 힘을 입어 땅지 최호완(崔浩完) 씨의 사택을 빌려가지고 시작한 바 남자 24명 여자 19명 총합 43명이 모였는데 모두 15세 미만의 아동뿐이다. 여기 모이는 아동들은 모두 가업에 조력을 하므로 낮에는 틈이 없고 밤이 되야 집으 로 돌아오므로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의 두 시간을 이용하여 강습한다. 때때로는 아동들이 참가를 권하므로 동화 같은 것을 하여 들려주고 혹은 양지에 등사하여준다. 현재 성적을 보면 과반수는 한글을 해독하게 되었다. 예정은 8월 26일까지로 작정이다. -시흥군 서면 소하리(책임대원 윤기중) 


일제에 의한 교육제도 편제, 그리고 식민사관 교육
 

<안산공립심상소학교>제1회 졸업사진(1939) 배경은 학교 건물이다. 사진 제공ⓒ류희왕

일제는 보통학교 4개년 심상소학교 2개년으로 초등교육을 편제하고 식민사관교육을 시행했다. 1941년 초등학교령으로 소학교는 국민학교로 개칭된다. 위정자들은 군사적이고 상명하복적 방식의 교육과 소통방식을 해방 후 신탁통치 속에서 ‘치안’과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답습했다.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적폐청산 되지 못했다.

 

일제의 침략 전쟁 확대와 민족문화말살정책
일제의 침략전쟁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으로 확대 되고 가속화됐다. 조선 땅은 국가총동원법 제정(1939), 일제황민화정책(1940)으로 징병제, 강제노역,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창씨개명, 신사참배, 조선어 사용 금지 등 무수한 피해가 발생하고 많은 폐단을 낳았다.

소하리 서면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을 초입에 신사가 세워졌고, 학교에 다니려면 창씨개명제도를 따라야 했다.

일제 강점기 피해자 김종근 기증 사진ⓒ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

기록은 기억을 이긴다②

어린이에게? 어린이에게!

‘문화재’는 아니지만 이제는 100여 년의 역사가 쌓인 근대 문화유산. 뜻 있는 이들도 방법을 몰라 발을 구르는 사이, 무관심 속에 사라지는 사례는 많다. 광명과 거리가 가까운 지역 중에서 재개발 속에 살아남은 지역 문화유산 사례를 찾아보았다. 

시흥시 죽율동 생금(生金)집
시흥시 향토유적 제7호 경기도 시흥시 죽율로 45-32

생금집
생금집

생금집은 1913년 경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농민 가옥으로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경기도 가옥형태 를 간직하고 있다. 생금집은 시흥 토박 이 성씨 금녕김씨(金 寧金氏) 종택이면서 집주인 김창관(1845~1929) 노인이 닭의 황금 깃 털을 모아 집을 지었다는 생금닭의 전설이 담겨있다.

생금집은 시흥의 재개발 구역 안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문화 유산 보전에 뜻있는 사람들이 나섰고, 시흥시는 1994년 생금집을 향토유적 7호로 지정했다. 지역의 문화유산이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법적 보호를 받아 철거를 면하기에는 미흡하다.

시흥시의 문화 담당자들은 개발부서와 개발사에 생금집 보전 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시흥시는 생금집과 집터를 매입하여 생금집을 중심으로 어린이공원을 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생금집의 상량문을 기초로 오랜 세월 변형된 점을 찾아 복원하였다.(2005)

문화유산 보존의 노력으로 생금집은 공원이 되어 생금초등학교와 신축 아파트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후 생금집은 시민이 관람객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상시체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의 통학로이고, 놀이터이며, 문화해설사가 운영하는 계절 놀이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생금어린이공원에는 시흥 군자면 3·1운동 독립유공자 김천복의 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생금집과 김천복 지사의 비는 역사를 담은 공간이 되어, 지역의 뿌리를 제공 하고 있다.

 

시흥시 능곡동 영모재(永慕齋)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 경기도 시흥시 능골길 26

영모재
영모재

영모재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장인 류자신(柳自新 1541~ 1612)의 재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로 시흥시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능곡동 개발이 계획됐을 때 영모재 역시 존치가 불투명했다. 류자신 선생 묘와 신도비는 2000년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된 상태였지만, 재실인 영모재는 고종 때 지어진 낡고 오래된 집일뿐이었다.

시흥시 문화담당자들은 개발 주체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설득하였다. 문화담당자들은 영모재를 공원녹지구역에 포함 시키면서 철거를 피할 수 있었다.

류 씨 종중은 영모재를 시흥시에 기부하고, 시는 집터를 보상했다. 영모재는 기존 문화유적 4호에 추가로 포함 지정됐다.(2004) 단독주택 단지 옆 영모재근린공원이 영모재를 입구로 하여 조성(2008)되었고, 인근 능곡선사유적지, 유아숲 체험원, 관무산 등산로가 연결되어 있다. 영모재는 여전히 문화 류씨의 시제를 지내는 공간이면서,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문화해설사가 아이들에게 예절 교육과 놀이를 가르치고 있다.

1919년 만세운동에 대한 시흥시의 답변
“전통과 과거사를 바라보는 가치관은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습 니다. 지금 행정구역상 ‘시흥’시에는 독립유공자 다섯 분이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의 생가 터는 모두 잃었지만, 터마다 공원을 조성하거나 가까운 공원에 비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천복 지사 비의 경우는 생금집 옆에 조성해 아이들이 자주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법이나 조례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역사’차원의 문제입니다. 역사가 상실되기 전에 의미를 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광명 자연마을 유감

작년 가을, 필자는 1860년대 지어진 가학 동 전통 가옥을 찾았다. 집은 말끔히 철거 되어 있었다. 개발을 피해 좋은 터를 잡아 이전·복원되리라는 광명 문화계의 기대와는 상반된 결과였다.

고인돌이자, 효행의 전설이 있는 ‘서독바 위’ 옆에는 인근 공사장의 폐목이 기대어 쌓여 있었다.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저어하지 말라는 교훈이 담긴 ‘말고개’에는 슬레이트 가건물과 거미줄이 우거져 있었다.

1860년대 지어진 광명 가학동 가옥. 2022년 헐리고 없다. 사진ⓒ디지털 광명문화대전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개발”
3·28 만세운동이 있었던 옛 시흥군 서면, 지금의 광명시 설월리로 가보자. 광명 문화계는 2009년 전후부터 설월리를 비롯하여 자연마을의 개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토박이 마을과 지역사, 모두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설월리의 일부만이라도 광명의 유산으로 보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월리는 3·28 만세운동의 중심지이다. 반면, 광명에는 3월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남아있는 현장이 없다.

 

“저희가 매년 사진 찍고 있어요”
“이제 부자들이 많이 들어올 겁니다”

광명의 재개발로 잃은 것이 많다. 일부 문화예술인, 시민활동가는 광명살이를 포기 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비유하자면, 집과 일터는 운영주체가 다르다. 문화예술인, 시민활동가에겐 거주지와 일터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거주지, 일터, 둘 다 광명과 인연이 없었다.

2006년 경 본 어느 작가의 작품이 떠오른다. 하얗고 두께감 있는 A4용지만한 석고판이 눈높이에 있었다. 긴 못들이 박혀 있었다. 별도의 받침대에 망치가 있었다.

“1,000원을 내시면 여기에 못을 박을 수 있습니다”

그 아래 글이 한 줄 더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에서 사라지는 나라가 ○개국이 있습니다"

관람자가 돈을 내고 망치를 땅땅거릴수록, 돈 내고 못 박는 자가 더 많아질수록, 석고판은 갈라지고 파편과 가루가 바닥에 떨어진다. 오노 요코의 <못을 박기 위한 그림 Painting to Hammer a Nail>(1961)을 닮았지만, 결은 다르다.

 

전기 차단기를 내리면,
그 곳에 반딧불은 없다.

나는 그 석고판 작품에서 개발로 파괴되는 오늘날의 세계를 떠올린다. 광명의 재개발로 건물이 밀집해 산능선을 가리는 모습은 착잡하다. 누군가에겐 행복이었던 불행한 근현대사. 재개발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의 얽힌 이해관계. 

3월 만세운동은 근대사이다. 광명 3·28만세 운동은 지역사이다.

광명의 자연 마을이, 고유 문화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토박이와 터지기가 떠나지 않는 방향으로, 어린이와 동심이 사라지지 않게 개발이 지향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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