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당 시론] 5.18은 우리 민족의 십자가
[한심당 시론] 5.18은 우리 민족의 십자가
  • 광명시민신문
  • 승인 2023.05.1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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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중항쟁 43주년입니다. 올해 5.18을 맞이하는 저의 마음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무겁고 착찹합니다. 그 이유는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수구 진영의 폄훼와 망발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막중한 책임을 지닌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공공연하게 폄훼 발언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일련의 시도들이 우리 사회를 43년 전 전두환 신군부 시대로 돌려놓고 싶어하는 기득권 세력의 반동의 표현은 아닐런지요?

최근 들어 저질러진 망언들을 열거해 보면 이렇습니다.

  •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 의원은 극우 논객 지만원씨를 초청해 '5.18 진상규명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종명·김순례 의원은 "5.18 폭동이었는데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 "종북좌파들이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어내 세금을 축내고 있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 2020년 2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자신의 총선 출마지역인 서울 종로구 현장 방문 당시 "1980년에 '무슨 사태'로 학교가 휴교했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역사인식 논란으로 확산 되었는데 국무총리까지 지낸 제1야당 대표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당시 신군부에서 명명했던 '광주사태'로 기억한다는 점에서 비판이 쏟아진 것입니다.
  • 2021년 국민의힘 대선 경선 과정에서 윤석열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는 잘했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호남 분들도 그런 얘기하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군에 있으면서 조직 관리를 해봤기 때문에 맡긴 겁니다. 경제는 돌아가신 김재익에게, 국회 일은 더 잘하는 너희(정치인)가 해라. 웬만한 것 다 넘기고”라는 발언을 해서 강한 반발에 부딪쳤습니다. 5.18 단체와 여권이 강하게 비판했으며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 2023년 3월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극우 성향의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관한 예배에서 5·18 정신 헌법 수록에 대해 "그건 불가능하다. 저도 반대한다"고 밝히고, '전라도에 대한 립서비스 아닌가'라는 전 목사의 질문에 "표 얻으려면 조상 묘도 판다는 게 정치인 아닌가"라고 답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 2023년 3월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1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형석 의원으로부터 "북한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의도대로 개입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느냐"고 질의하자 "그렇다. 북한이 개입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는 말씀"이라고 답해 종전 입장을 고수했죠. 이에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현직 사퇴를 요구하였습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폭동으로, 매스컴은 광주사태 또는 광주소요사태 등으로 매도했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5.18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줄여서 5·18로 부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5.18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한 사건으로, 지만원을 위시한 극우파에서는 전두환의 주장을 답습하여 무장 폭동이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확인했고,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해석하였습니다. 시민군의 무장과 항쟁을 가리켜 위법적 또는 위헌적이라고 주장하는 무장 폭동설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결로 근거 없는 주장임이 확인된 것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zYzH3s4RQqk
출처. 유튜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zYzH3s4RQqk

지난 5월 15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광주민중항쟁 43돌을 맞이하여 5․18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광주민중항쟁 기념 순회시국미사를 드렸습니다.

사제단은 이날 발표한 <십자가의 사람> 이란 제하의 성명서에서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 아래 한반도 전역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유일하게 침묵을 깨고 피 흘려 저항하였던 도시, 광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빛고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마시며 자라났거니와, 사제들에게도 ‘오월광주’는 타성에 젖은 자아를 채찍질하고, 다시금 세상을 위한 헌신을 맹세하게 해주는 일종의 성사”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사람의 사람다움과 사제다움의 조건은 십자가를 짊어질 때라고 말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1)는 말씀이 궁극적으로는 사람다움의 조건을 알려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광주항쟁은 우리 시대의 십자가와 부활의 표상이라고 강조합니다. “저항과 대동, 두 정신으로 악마의 군대를 물리친 광주는 십자가와 부활의 표상”이라는 것이죠.

사제단은 5·18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왜곡을 바로잡고 민주 정신을 오롯이 계승해야 한다며 “우리 다시 십자가의 분투를 다짐하자.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호소에 공명하는 참여로서, 병든 세상을 책임지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운명을 맡기는 투철한 복종으로서 십자가를 부둥켜안기로 굳게 다짐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5.18 민중항쟁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도 매우 아픈 기억을 남겼습니다.
당시 감리교청년회(이하 감청),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이하 EYC)와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저는 뭔가 달라진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조짐을 보게 됩니다.

1979년 10월 중순 감리교신학대학 축제 개회 예배시 저는 지금 벌어지는 현실에 대해 강하게 성토하며 성명서를 뿌리고 유신정권 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담당 형사에 의해 체포되어 천연 파출소로 연행이 되었죠. 당시의 관행으로 보면 긴급조치 위반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였고 보통 2년 정도의 형을 살았습니다.

저도 시위를 준비할 때는 그 정도 각오를 했죠. 당연히 중앙정보부로 이송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행된지 10시간 가까이 되어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나타났는데 저를 이송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저는 풀려나면서도 이게 뭐지, 뭐가 잘못된 건가 하는 의문을 가졌죠.

기숙사로 돌아와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채플에 모여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계속 가두시위에 나섰고, 전국에서 최초로 휴교령을 맞게됩니다. 그리고 나서 곧 바로 10.26사태가 터진 거죠. 중정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궁정동 안가에서 총으로 살해한 겁니다.

저는 그 사태를 맞이하고서 나서야 그래서 내가 풀려나게 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상계엄하에서 새 세상을 향한 열망은 거세게 타올랐습니다. 민주화 운동 진영은 통일주체대의원 선출이 아닌 대통령 직선제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일명 ‘YWCA위장결혼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126명이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과 유치장에 처해졌습니다. 저는 126번째 마지막 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개학이 되면서 대학가는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에 대한 반대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가득했습니다. 신군부의 탄압도 더욱 거칠어졌죠,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집결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가장 앞에는 감신대와 한신대 신학생들이 포진하였죠. 밤이 깊어지자 지도부 안에서는 시위를 계속해야 한다는 측과 잠시 관망하자는 측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결국 서울대 심재철 등이 주장한 회군이 관철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광주에서 처참한 학살극이 일어난겁니다.

출처. 국가기록원 5.18민주화운동
출처. 국가기록원 5.18민중항쟁_계엄반대시위
518민중항쟁 시민을 잔혹하게 구타하는 공수부대원

고(故) 김의기 열사의 투신 <동포에게 드리는 글>

김의기 열사

광주항쟁이 신군부의 진압으로 막을 내리고 3일 후, 저와 함께 감청과 EYC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친구 고(故) 김의기 열사가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장갑차 위로 투신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김의기 열사는 감청과 EYC에서 농촌선교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열사는 당시 3월부터 농촌활동 자료집을 발간하기 위해 전남지방의 농촌과 서울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함평 고구마 농민 투쟁 승리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농민운동가들과 함께 광주를 방문하게 되었죠. 그날은 5월 19일이었는데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끔찍한 만행이 백주대낮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열사는 이 광경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서울로 올라온 열사는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계획합니다.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열사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계엄군의 학살을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금요기도회는 돌연 취소되었고 기독교회관 입구는 계엄군들에 의해 봉쇄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위를 결행하기로 한 열사는 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300여 장을 등사로 찍어냅니다. 계엄군이 진입해 체포하려고 했지만 김의기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결국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고 투신하게 되죠.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과 유서가 없다는 점을 볼 때, 계엄군과의 몸싸움 끝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도 의심이 됩니다. 열사는 혜화동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집안의 6남매 중 막내였던 김의기 열사는 대학 2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며 양복을 사주었지만 늘 흰 고무신에 물들인 군복 바지를 입고 다녔죠. 가난한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형님들이 기름옷을 입고 일하는데 내가 어떻게 좋은 옷을 입겠는가?”하였다는 겁니다.

김의기 누나인 김주숙씨의 회고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김의기 열사 영정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br>
김의기 열사 영정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

<의기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양복을 한 벌 해주면서 “너도 양복 좀 입고 다녀라”고 했더니, 여전히 작업복, 군복 같은 것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의기야, 대학생이 입고 다니는 옷이 그게 뭐냐? 대학생답게 입고 다닐 수 없냐?” “누나, 사람이 한번 편하면 더 편해지고 싶고 그러면 도둑놈 마음이 생겨!” 그래서 자기는 그렇게 입고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기는 대학졸업앨범에 실을 사진을 찍을 때도 양복을 입지 않고 셔츠만 입고 찍었습니다. 결국은 장례식 때 제가 해준 양복을 수의 대신 입혔습니다.>

김의기 열사의 매형인 박철 목사는 처남에 대해 SNS에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현하였습니다.

<1990년 2월 서강대학교 졸업식에서 김의기 명예졸업장을 장모님이 대신 받으셨다. 그때 내가 장모님을 모시고 졸업식장에 갔었는데 그 종이 쪽지 한 장이 무엇이라고 장모님이 많이 우셨다.

울 처남 김의기는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76학번이다. 대학을 남들보다 2년 먼저 입학했다. 김의기가 3학년 무렵, 자신보다 어려운 후배 등록금을 대납해 주어서 자신의 졸업은 한 학기 늦어졌다. 원래는 80년 2월 졸업 예정이었다.

만일 등록금을 후배에게 주지 않고 정상적으로 80년 2월 졸업했더라면, 80년 5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김의기 집안 형편은 매우 가난했던 시기였다. 자기도 가난한데 자기보다 더 가난한 후배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결국은 그것이 인과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민주제단에 바치게 되었다.>

5.18 광주민중항쟁 43주년을 맞아 ‘5.18이 우리 민족의 십자가’임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부활을 꿈꾸며 악한 세력과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있길 소망합니다.

고(故) 김의기 열사가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의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이승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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