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

탑골편지

2017-07-29     양영희(교육잡지 벗 이사, 민들레 편집위원)
복날이라고 마을회관 앞에 가마솥을 얹고 장작개비 태우는 연기와 땀으로 범벅된 아낙의 벌건 얼굴은 사라지고 없다. 아낙들은 모두 할머니가 되었고 젊은 축도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노인회장이 차려낸 소머리국밥을 직사각형으로 모여 앉아 더위 반 국물 반으로 복날거리를 대신한다.

탑골의 위계는 분명하다. 남자, 여자노인, 곧 노인이 될 여자 순이다. 음식을 상에 놓는 순서도 꼭 이 법칙을 따라야 한다. 수박이나 커피를 드리는 순서도 바뀌면 안 된다. 마을의 막내로 밥을 먹는 일은 열 번도 넘게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어른들이 필요한 것들을 갖다드리는 일이 중심이 된다. 덜 늙은 순서로 설거지와 식사당번은 정해져 있고 그보다 더 오래 그 일을 담당했던 오래전 젊었던 여자노인들은 뒷줄에 나앉아있다.

갑제 할머니는 어느 날 부터 ‘내개 먼저 음식을 갖다 주더라. 그런데 그 일이 슬프더라 대접 받는 거 좋은 일 아녀’ 하신다. ‘남은 음식을 버려야 한다, 아니다, 음식이 짜다 싱겁다’ 등 뒷줄에 앉아있는 모든 여자어른들이 입장을 내는 시간들도 함께 모일 때마다 배경음처럼 들린다.

조금은 조심스런 식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이어지면 아주 잠시 탑골의 위계는 느슨해진다. 처음으로 남녀가 술잔을 부딪칠 수도 있고 노인회장님의 배꼽 잡는 유머와 농 섞인 말들로 회관에 웃음꽃이 피기도 한다. 기운이 없어 가까스로 앉아 계신 최고령 어른들은 새소리와 물소리만 듣다 구경거리처럼 술 마시며 노는 칠십대의 재롱을 즐긴다. 마음은 늙지 않은 윗집 아줌마는 술 못 먹어 분하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노인회장님은 그럼 엉덩이라도 흔들라고 농을 친다.

홍열 아저씨의 아들이 가져온 옥수수가 가스 불 위에서 익는 냄새가 난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녀’ 술 권하며 강조하는 홍열 아줌마의 인생관에 ‘왜 그렇게 똑똑 한 겨?’ 맞장구치는 노인회장님. 옥수수가 덜 익었다는 말에 ‘입이 에꾼겨’ 하신다. 회장님은 내게 농촌생활을 가르쳐주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인생 뭐 있 간디, 그냥 이렇게 어울려 사는 거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