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 역사 인물과 문화유적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나?
광명시 역사 인물과 문화유적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나?
  • 신성은 기자
  • 승인 2024.04.1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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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시독립만세운동 문화유산 보존 학술대회 열려
- 광명지역의 역사적 인물과 독립운동사 펼쳐
- 류지호 지사 생가의 역사적 가치 조망

광명시 독립만세운동 문화유산 역사적 가치와 보존의 필요성을 조망하는 토론회가 광명시 주최, 광복회 광명시지회(지회장 김충한) 주관으로 3월 27일 광명시평생학습원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광명지역의 역사적 인물과 문화 유적(양철원 학예사) ▲광명시 지역 독립운동사(홍순대 박사) ▲광명지역 애국지사 류지호가옥의 건축학적 성격(하태철 선임연구원) ▲광명지역 문화유산 현황과 보존계획(문화관광과)에 대한 주제로 열렸다.

양철원 학예사는 광명시를 대표하는 역사인물 오리 이원익과 무의공 이순신, 소현세자의 빈 민회빈 강씨, 조선 말 탐관오리에 대항하여 시흥농민봉기를 주도한 성우경, 기형도 시인 등을 소개 했다.

독립운동가 의산 김승학 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홍순대 박사는 광명시 독립운동 전개에 대한 소논문을 발표하였다. 홍 박사는 1898년 문봉오 군수의 탐학과 벼슬아치들의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봉기와 1904년 일제가 철도 건설을 하기 위해 노동자 강제 모집에 항거한 2차 농민봉기를 소개 했다.

또한, 홍 박사는 1919년 3월 27일 시흥 서면 주재소(현 광명시 노온사동 온신초등학교 자리) 인근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본 경찰에 치안법 위반으로 잡혀간 이정석과 다음날 28일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의 주도로 류지호 최호천 윤의병 최정성 김거봉 최주환 등 300여 명의 주민이 주재소를 찾아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와 만세운동을 소개했다. 시위 주동자 7명은 징역형과 벌금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1990년 광명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최호천 윤의병 류지호 최주환 지사에게 애족장 서훈하고, 이종원(1992년)과 김거봉(2013)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이외에 홍순대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흥지역의 야학과 운양의숙의 교육사업을 소개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윤의병 지사의 손자 윤석구님은 광명의 만세 운동은 노온사리 독립운동사가 아닌, 소하리 독립운동사로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온사리에는 일본 경찰 주재소가 있어, 이정석을 구출하기 위해 주민들이 찾아가 시위를 한 것이고(3월 28일), 광명의 독립운동 발원지는 서면 면사무소 앞이라면서, 이정석은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3월 27일) 노온사리의 경찰 주재소에 잡혀간 것이라고 말했다. 홍 박사는 노온사리 시위 표현은 재판 기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정리했기 때문이며, 소하리 독립운동 표현에 대해 연구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하태철 경기도자박물관 선임연구원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문화재의 성격과 상태, 활용가치 등을 판단하여 종합정비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는 하태철 선임연구원은 광명 만세운동으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룬 류지호 지사의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옥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주제 발표를 했다.

광명에서 광명 만세운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장소는 일본경찰 주재소가 있던 온신초등학교의 ‘3.1 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 뿐인 상황에서 구름산지구개발로 헐릴 예정인 류지호 지사의 가옥의 역사적 가치를 찾는 의미있는 발표였다.

하태철 선임연구원은 류지호 지사 가옥의 건축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목조건물의 최상부 부재의 종돌이를 올리는 축문이 적힌 상량문을 살펴보았다. 상량문에는 재액을 방지할 목적의 재액방지문 용(龍), 귀(龜), 해(海)이 적혀있고, 상량시에는 歲在 丙戌 三月十四日 戌時 立柱上樑 家主 壬寅生(세재 병술삼월십사일술시 입주상량 가주 임인생)이 적혀있다. 이는 1946년 3월14일 7부터 9시 사이에 기둥을 세우고 마룻대를 올렸다는 뜻이고, 집주인 임인생은 1902년에 태어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 선임연구원은 일제강점기 한옥의 성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제 식민통치 10년이 지난 3.1운동의 거센 저항을 받자, 일제는 문화통치로 술책을 바꿨는데, 건축분야에도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3.1운동을 전후하여 계층 분화와 함께 이농현상이 급증하고 도시집중으로 경성의 주택문제가 커지자, 도시형 한옥이 등장했다.

그림 1914년 지적원도와 1972년 지형현황을 비교해 보면, 설월리 마을의 기본적인 특성은 현재까지 비슷하게 남아 있다. 또한, 시대별로 건축구조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태철 선임연구원 발표자료

류지호 지사의 가옥의 주소지 363-1번는 두 번의 분할을 거쳐 현재 363-24번지가 되었고, 대지 면적은 569제곱미터의 목구조이며 연면적 94.8제곱미터 건축물로, 사용 승인은 상량일 보다 5년 늦은 1951년에 사용 승인이 되었다. 참고로 설월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1930년에 지어진 한옥이며, 1951년 까지는 목조 주택이, 1952년 부터는 블록조 주택이, 1978년 부터는 조적조 주택이 들어섰다.

류지호 지사의 가옥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필요에 의해 개량 되어, 한옥의 시기별 변화과정을 볼 수 있다. ⓒ하태철 선임연구원 발표자료

하태철 선임연구원 류지호 지사 가옥의 건축 현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류지호 지사 가옥은 민도리집으로 납도리를 사용했는데, 일반적인 민가에서 사용하는 구조이다. 또한 1고주 5량 구조로 상류주택 형태의 툇마루를 가진 일제강점기 때부터 민가에서 사용된 구조이다. 가옥의 배치는 ㅁ자 형태로 ㄱ자 안채와 ㄴ자 부속채가 이루어져 앞마당을 형성하는 주거형태이다. ㄱ과 ㄴ 사이가 떨어져 바람이 잘 통하는 형태는 경기 남부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된 주거형태이다. 규모는 16.5칸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류층의 가옥으로 확인된다.

하태철 선임연구원은 발표를 정리하면서 류지호 지사 가옥에 대해 1946년에 상량되어 3.27 광명 만세운동(1919년)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일제강점기 한옥의 성장 배경과 류지호 지사가 생을 마감한 가옥이라는 상징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가옥은 원상에서 필요에 의해 개량된 구조로, 근대 한옥의 시기별 변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제도적 개선을 통해 설월리 마을의 한옥에 대해 건축물과 생활상을 기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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